<인본특집 - 계업령 내란 사태의 민낯>
12·3 계엄내란의 막전막후: 어둠과 빛의 시원(始原)을 찾아
차재권(부경대 정외과)
1. 어둠 속에 드러난 민낯, 그리고 빛으로 향한 민주주의
2024년 12월 3일. 모두가 하루의 일상을 내려놓고 잠자리로 향하던 그때, 우리는 반세기 전 불행했던 역사의 데자뷔를 경험하게 되었다. 윤석열 대통령의 계엄 발표, 그리고 그 뒤로 이어진 숨 막혔던 그 내란의 밤. 한순간, 탱크의 궤도 소리가 다시금 귓가를 맴도는 듯했다. 법과 질서의 이름으로 포장된 권력의 두려움, 민주주의의 외피를 두른 채 국민 위에 군림하려 했던 낡은 권위주의의 유령. 한국 현대사를 수놓았던 12.12 군사반란,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어두운 그림자가 또다시 드리워지는 듯했다. 우리는 그날, 반복되는 역사 속에서 다시 한번 한국 사회의 취약한 구조와 민낯을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되풀이된 역사는 다시금 우리에게 묵직한 시대의 여러 가지 화두들을 던져주었다. “도대체 무엇이 거의 완전한 민주주의로 진화한 대한민국에서 이런 사태를 불러오게 한 것인가?”,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민주주의의 위기는 우리만의 특수한 경험인가 아니면 세계가 겪고 있는 보편적 경험의 일부인가?”, “오늘의 이 위기는 한국 민주주의 역사의 우연인가 아니면 필연인가?”, “1987년 민주화 이후 우리의 민주주의는 과연 얼마나 달라졌는가?” 등등. 끊임없는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하지만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탄핵이 헌재의 인용 결정으로 완결된 오늘의 시점에서 지난 시간을 돌이켜 보자면 역사는 결코 단순 반복되는 것만은 아님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내란을 획책한 무리가 구상했던 전체적인 사건의 플롯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실제로 그들 무리는 역사의 헌 궤짝에서 철 지난 비상계엄계획과 계엄포고령을 꺼내어 무단 복제하듯 베껴 썼다. 하지만 사태가 진화한 방향은 확연히 달랐다. 역사는 반복될 듯 보였다. 하지만 역사를 움직이는 주체인 민중의 모습은 명확히 과거와 달랐다. 과거라면 침묵했을 시민들이 광장에 모였고, 두려움에 문을 걸어 잠갔던 목소리들이 거리에서 울려 퍼졌다. 언론은 더는 입을 다물지 않았고, 민주주의의 절차는 권력을 향해 명확한 선을 그었다. 계엄내란의 위기는 한국 사회의 민낯만을 드러낸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른바 ‘87년 체제’로 표상되는 민주주의 공고화(democratic consolidation)의 과정에서 우리 국민의 민주주의에 대한 의식이 어떻게 진화해 왔는지를 잘 보여주었다. 촛불혁명이 빛의 혁명으로 이어지는 순간이었다. 열에 아홉은 성공한다는 친위 쿠데타의 성공 확률에 대한 뿌리 깊은 환상이 여지없이 깨어져 나갔고 국민이 스스로 지켜낸 민주주의의 가치가 빈자리를 채웠다. 계엄을 해제하기 위해 노력했던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국회 의결의 형식과 절차를 지켜내려 애썼던 모습은 우리 사회에 절차적 민주주의가 얼마나 깊게 뿌리내렸는지를 증명하는 순간이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왜 다시 지나왔던 그 악몽 같은 시간을 기억하고 이 사태가 던진 시대의 화두에 답해야 하는가? 계엄과 내란의 위기 속에서 되살아난 과거의 그림자들이 여전히 우리 사회에 잠재해 있는 위험들을 일깨워주고 있기 때문이다. 권위주의적 정치문화, 분열된 사회적 구조, 그리고 독재 권력에 대한 강력한 유혹이 언제든 이제 갓 자리 잡기 시작한 우리의 민주주의를 위협할 수 있다는 경고음이 터져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그 어둠 속에서 한국 민주주의의 성숙함과 민주의식으로 무장한 깨어 있는 국민이라는 희망의 빛을 목격하기도 했다. 2025년 봄, 윤석열 대통령의 파면이 결정된 지금, 한국의 민주주의는 지나온 겨울의 악몽에 대한 기억과 두려움, 그리고 새로운 시작에 대한 희망과 기대가 교차하는 중요한 역사의 전환점에 서 있다. 계엄과 내란의 역사적 경험과 교훈을 반추해 봄으로써 한국 사회의 민낯과 함께 또 다른 발전의 가능성을 함께 들여다보는 노력이 요구되는 이유이다.
2. 12·12의 데자뷰? 한국 민주주의의 빛과 그림자
한국 현대사에서 계엄과 내란은 반복적으로 등장했다. 80년 가까운 대한민국 헌정사에 존재해 왔던 계엄과 내란은 단순한 비상조치가 아니라 권력자의 두려움과 탐욕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늘 등장하곤 했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가 1961년 5·16 군사정변과 1980년 12·12 군사반란이다.
1961년 5·16 군사정변은 당시 이승만 정권 붕괴 이후 민주당 정권의 내분이 심화하는 상황에서, 박정희 소장을 비롯한 군부 세력이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확보하기 위해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사건이다. 당시 박정희를 비롯한 군부 내 일부 세력은 자신들이 정권을 잡지 못할 경우, 군 내부 숙청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두려움을 가졌다. 결국 그들은 군사 쿠데타를 통해 강력한 군사정부를 수립하고자 하는 탐욕에 빠져 군사정변을 감행하게 되었다.
1980년 12·12 군사반란은 10·26 사건으로 박정희가 사망한 후, 신군부 세력(전두환 등)이 정권을 장악하기 위한 쿠데타였다. 전두환과 신군부 세력은 당시 합법적 계승 권한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정권을 잡지 못할 경우, 자신들이 숙청될 것이라는 두려움과 함께 권력을 장악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계엄령을 확대하고 군사반란을 일으켰다. 특히, 당시 계엄군을 동원해 서울을 장악하고, 민주화 요구를 탄압한 것은 정권을 유지·확장하기 위한 계엄령의 전형적인 남용 사례였다.
이처럼 우리의 헌정사에서 계엄과 내란은 언제나 정치적 생존에 몰두했던 권력자의 두려움과 탐욕을 동시에 반영한 결과물이었다. 이번 12·3 계엄내란 사태 또한 이러한 흐름 속에서 반복된 것이었으며, 이는 단순한 일회적 사건이 아닌 한국 정치의 구조적 문제를 드러낸 사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12·3 계엄내란 사태를 과거 우리의 헌정사에서 경험했던 계엄내란 사태들과 판박이로만 치부할 수는 없다. 몇 가지 점에서 12·3 계엄내란 사태는 과거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특수성을 지니고 있었다. 먼저, 겉으로는 헌법적 질서와 법적 절차를 준수하는 것처럼 포장되었지만 실상은 12·12 군사반란이나 이전의 계엄 사례보다도 훨씬 더 헌법과 법률을 무시하고 위반한 사례였다. 과거의 군사정변들이 최소한의 국무회의 심의 절차를 거쳤던 것과 달리, 12·3 계엄 사태에서는 국무회의 심의조차 이루어지지 않았고, 국회와 선거관리위원회 등 헌법기관을 무력화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이는 계엄법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행위였으며, 명백한 헌정질서 파괴 시도였다. 절차적 민주주의의 외형조차 갖추길 거부했던 이러한 시도는 탐욕에 눈먼 권력이 얼마나 헌법적 가치를 경시할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다음으로, 12·3 계엄내란 사태는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유사한 사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실패한 친위 쿠데타’라는 점에서 기존의 계엄내란 사태와는 확연히 다르다. 국내 친위 쿠데타 사례로는 1952년 이승만 자유당 정권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위해 호헌동지회를 대상으로 일으켰던 ‘발췌개헌’, 1969년 박정희 공화당 정권이 3선 연임을 위해 일으켰던 ‘3선 개헌’, 1972년 박정희 대통령이 종신집권을 위해 일으켰던 ‘유신 개헌’을 손에 꼽을 수 있다. ‘발췌개헌’과 ‘3선 개헌’은 전국적 계엄을 동반한 대대적인 계엄 사태가 아니었고 성공적 결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12.3 계엄내란 사태와는 구별된다. ‘유신개헌’ 또한 전국 계엄을 전제로 했다는 점에서는 12.3 계엄내란 사태와 유사한 면이 없진 않지만 성공한 쿠데타라는 점에서는 분명 다르다.
12·3 계엄내란 사태와 유사한 친위 쿠데타 사례는 해외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1799년 나폴레옹의 ‘브뤼메르 18일’ 쿠데타, 1934년 히틀러의 ‘장검의 밤’ 쿠데타, 1953년 이란 팔레비 왕조의 친위 쿠데타, 1972년 필리핀 마르코스 대통령의 친위 쿠데타를 비롯해 2016년 튀르키예의 에르도안 대통령, 2017년 베네수엘라의 마두로 대통령, 2022년 페루 카스티요 대통령 등이 일으켰던 친위 쿠데타들이 대표적 사례이다.
이처럼 다양한 국내외의 친위 쿠데타 사례 중 국내적으로는 1972년 유신개헌을 위한 쿠데타, 해외 사례로는 2022년 페루의 카스티요 대통령이 감행했던 친위 쿠데타가 그나마 12·3 계엄내란 사태와 가장 유사한 성격의 친위 쿠데타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사례들도 공고화 과정에 있거나 완전한 민주주의로 이행한 사회에서 발생한 12·3 계엄내란 사태와의 유사성을 주장하기 힘들다. 유신개헌은 두 달 넘게 계엄이 지속되었고 결국 성공한 친위 쿠데타라는 점에서 12·3 계엄내란과는 달랐다. 카스티요 페루 대통령이 일으켰던 친위 쿠데타는 발생 배경이나 지속 기간, 그리고 실패한 친위 쿠데타라는 점에서 12·3 계엄내란과 닮은 꼴이지만 계엄을 동반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다르다. 따라서 12·3 계엄내란 사태는 그 자체로 인류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매우 특수한 정치적 사변으로 규정될 수 있다.
3. 12·3 계엄내란으로 드러난 한국 사회의 민낯
이처럼 세계 그 어느 친위 쿠데타 사례와도 단순 비교가 불가해 보이는 12·3 계엄내란은 왜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하지만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이유를 간명하게 설파하는 사람을 딱히 찾아보기 어렵다. 그만큼 이번 사태가 발생한 시점의 정치 상황이 하나 혹은 몇 가지의 단순한 발화점만을 가리키기엔 너무도 복잡다단했기 때문이다. 역사적 사건의 발생과 전개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시적이고 개별적인 요인뿐만 아니라 거시적이고 구조적인 요인 또한 함께 고려해야 한다. 이는 역사적 변화가 단순히 개인의 의지나 특정한 사건 하나로 귀결되지 않으며, 더 광범위한 사회·경제·정치적 배경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입장은 역사학, 사회학, 정치학 등 다양한 학문적 전통에서 논의되어 왔으며, 역사적 사건의 분석에서 미시적·거시적 접근을 병행해야 하는 정당성을 제공한다. 역사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Anthony Giddens)는 그의 ‘구조화 이론(Structuration Theory)’에서 구조와 행위의 상호작용을 강조하며, 개인의 선택과 행동은 사회적·제도적 구조 속에서 형성되며 동시에 그러한 구조를 재생산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즉, 특정한 역사적 사건이 발생할 때 개별 행위자의 의도와 결정이 중요한 역할을 하더라도, 이를 가능하게 한 사회적 맥락과 제도적 구조가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날학파(Annales School)의 거두인 페르낭 브로델(Fernand Braudel) 또한 ‘장기 지속(longue durée)’ 개념을 통해 역사적 변동을 분석하는 방법론을 제시한 바 있다. 브로델을 포함한 아날학파의 관점에 따르면, 역사적 사건은 단기적인 정치적 사건(événements)과 중기적인 사회·경제적 구조(conjonctures), 그리고 장기적인 지정학적·환경적 배경(longue durée)이 결합하여 형성된다.
역사적 사건을 분석할 때 미시적 요인(개별 행위자의 선택, 구체적 사건의 전개 과정)과 거시적 요인(경제적·사회적 구조, 제도적 환경, 국제 질서 등)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미시적 접근을 통해 개별 행위자의 동기와 전략을 분석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이러한 행위가 가능하게 된 거시적 배경을 함께 고려하지 않으면 사건의 근본적인 원인과 구조적 의미를 놓칠 수 있다. 따라서 역사 연구에서는 미시적·거시적 차원의 분석을 통합하는 복합적 접근이 필수적이며, 이를 통해 보다 정교한 역사 해석과 현실 인식이 가능해진다.
먼저 12·3 계엄내란 사태를 앞두고 한국정치에서 관측되는 미시적 상황 변화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2024년 제22대 국회의원선거의 결과, 집권세력의 권력이 약화하면서 국정운영의 동력이 크게 상실된 상황에서 친윤석열계와 친한동훈계로 분화된 집권세력 내부의 분열이 가속화되었다. 집권당 내부의 반발과 함께 거센 국민적 비판에 내몰린 윤석열 대통령은 갈수록 주술과 극우 이데올로기에 편승하기 시작했고 정상적인 정치적 리더십을 발휘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자신을 몰아갔다. 김건희 특검법에 대한 야당의 압박을 거부권 행사로 힘겹게 막아내는 와중에 명태균 게이트까지 터지면서 본인은 물론 가족의 신변 안전을 보장해야 하는 윤석열 대통령의 개인적 이해관계가 결국 계엄내란이라는 극단적 선택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는 설명이 가능해진다.
하지만 이런 미시적/개인적 차원의 설명만으로 12·3 계엄내란의 서사구조를 모두 완성할 수 있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미시적/개인적 차원 외에 거시적/구조적 차원의 요인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12·3 계엄내란 사태를 초래한 거시적/구조적 요인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먼저 제9차 개헌으로 등장했던 이른바 ‘87년 체제’가 지닌 민주주의의 이중성을 들지 않을 수 없다. 1987년 민주화 이후 한편에서는 제왕적 대통령제의 왜곡된 권력구조와 그로 인한 대의민주주의의 위기가 심화해 왔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절차적 민주주의가 강화되면서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 의식의 변화와 함께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 수준이 점차 높아진 것도 사실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의 눈높이는 한껏 높아진 데 반해 그것을 충족시켜 주는 정치체제의 효율성은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당연히 한국 정치는 정치시스템 자체에 대한 불신과 경쟁하는 정치세력 간의 공존보다는 사활을 건 막장 경쟁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 끝에는 정치의 양극화와 극단화라는 암세포가 자라날 수밖에 없다.
둘째, 87년 체제로 대표되는 한국 민주주의의 절차적 제도와 의식 간의 부조화와 대립적 갈등은 결국 민주주의 공고화의 과정에서 청산되었어야 할 권위주의적 정치문화가 여전히 사회 곳곳에 온존하게 만들었다는 점도 이유의 하나로 꼽을 수 있다. 법과 제도의 이름으로 권력을 정당화하는 방식은 과거 군부 독재 시절의 서사를 반복해 왔다, 윤석열 대통령이 장악했던 검찰권력은 그 서사의 막장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권력의 의도에 따라 헌법적 가치가 쉽게 무시될 수 있는 위험성은 민주화 이후 이립(而立)의 세월이 훌쩍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12.3 계엄내란은 그 막장 드라마의 끝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셋째, 언론과 지식인의 책임도 여전히 중요한 논점 중 하나로 꼽을 수 있다. 과거 계엄 상황에서는 언론이 침묵하거나 국가주의적 논리를 따르며 권력의 정당성을 보조했다. 이번 12.3 계엄내란 사태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일부 보수언론과 ‘극우 유투버’와 ‘아스팔트 우파’가 이끄는 또 다른 광장 권력이 가짜 뉴스를 통해 여론을 조작하면서 부정한 권력의 계엄 시도를 정당화하는 논리를 제공하는 데 앞장섰다. 완전한 민주주의 사회에서 언론은 제4의 권력으로 절대 부패하면 안 될 권력으로 손꼽힌다. 하지만 완전한 민주주의 사회에 가깝다고 자부하는 오늘의 한국에서는 늘 깨어 있어야 할 언론과 지식인이 계몽군주를 자처하는 대통령에게 스스로 계몽되었다고 고백하는 목불인견의 상황이 이어지고 있었다. 상황이 그러하다 보니 민주주의의 최후 보루인 공론장조차 위태로운 상황이 연출되었고 그 틈을 타 초활성 상태의 극우 정치세력들이 국회는 물론 사법부까지 흔들어대는 미증유의 민주주의 위기 상황이 이어졌다.
넷째, 극우 정치세력의 준동과 기성 정치와의 결탁은 이번 사태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이자 그 자체로 계엄내란을 가능하게 했던 요소이다. 아스팔트 우파와 같은 극우세력은 계엄을 옹호하고 탄핵에 반대하는 여론을 형성하며 서부지법 폭동 사태와 헌법재판소 협박 등 극단적인 폭력 행위와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을 자행했다. 이러한 행위는 단순한 정치적 의견 표출을 넘어 헌정질서를 위협하는 직접적 공격이었다. 더욱이, 이러한 극우세력이 일부 개신교계와 관계를 맺고 그 세력을 확장해 온 가운데 마침내 기성 정치세력과 연결되어 정당성을 획득하게 되는 일련의 과정은 한국 민주주의의 취약성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것이었다. 극우 정치세력의 준동이 더욱 걱정스러운 부분은 극우 아스팔트 세력을 이끄는 주체가 전광훈, 손보현 등 종교계의 지도자라는 점에서 정교분리의 헌법정신에 반하는 한국정치의 반이성적, 비정상적 상황이 극단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점이다.
다섯째, 87년 체제에서 심화해 온 국민 내부의 분열과 갈등 역시 12.3 계엄내란 사태는 물론 그로 인해 빚어진 사회적 위기를 증폭하는 데 이바지해 왔다는 점이다. 윤석열 대통령의 이번 계엄내란 시도에 대한 국민의 즉각적이고 조직적인 대응은 분명 과거의 계엄내란 사태와 비교해 진일보한 측면이 없지 않다. 하지만 계엄내란 이후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탄핵 정국이 장기화하고 초기의 계엄 반대와 탄핵 찬성 여론의 동력이 약해지면서 정치적 성향과 지역주의에 따라 국민 내부의 입장 차이가 확대되고 있는 느낌을 주었다. 이러한 분열은 결국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집단적 저항과 연대를 약화시킬 수 있는 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4. 빛의 혁명과 완전한 민주주의에 대한 희망의 재발견
12·3 계엄내란 사태로 촉발된 오늘의 위기가 단지 한국 사회의 민낯만을 드러낸 것은 아니었다. 이번 사태는 한국 민주주의가 얼마나 성숙해졌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했다. 국민의 민주의식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했다. 시민들은 과거처럼 공포와 무기력에 머무르지 않았다. 오히려 광장과 거리에서 민주주의의 가치를 외쳤고, 헌법적 절차를 준수할 것을 요구했다. 이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고립되었던 광주의 목소리와는 달랐다. 이번에는 전국적 연대와 동시적 대응이 가능했다.
절차적 민주주의의 내재화가 이루어진 것 또한 이번 사태를 거치면서 발견하게 된 긍정적 요소이다. 헌법재판소, 법원, 국회 등 민주적 절차와 제도적 장치가 실제로 기능하면서 권력의 폭주를 제어했다. 12.3 계엄내란 사태는 단순한 시민 저항을 넘어 국가 시스템이 민주주의의 수호자로 작동할 수 있음을 보여준 첫 번째 사례였다.
언론과 시민사회의 역할 변화도 주목할 만했다. 물론 조·중·동을 비롯한 보수언론은 과거의 언론과 마찬가지로 권력의 논리를 대변하는 수단이 되길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4차 산업혁명의 기술진화로 훨씬 외연이 확대된 다양한 뉴미디어 매체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비판적 저널리즘과 적극적인 시민 담론이 민주주의를 방어하는 데 매우 큰 역할을 했다. 이러한 변화는 한국 사회가 권위주의적 정치문화의 유산을 극복하고 성숙한 민주주의 사회로 나아가는 과정에 있으며, 12.3 계엄내란 사태를 극복한 이후 우리가 맞게 될 새로운 민주주의의 지평을 가늠케 해준다.
우리를 삼킨 어둠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를 직면하려 할 때, 비로소 우리는 빛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새로운 지혜와 용기를 얻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12·3 계엄내란이 초래한 위기는 또 다른 시작의 증거이며, 민주주의를 향한 여정이 여전히 진행 중임을 알려주는 나침반이다. 앞서 살펴본 바대로 12·3 계엄내란 사태는 우리 역사의 반복과 변화의 가능성을 동시에 보여주었다. 과거와 달리 이번에는 내란의 밤, 국회 앞에서 계엄군의 총부리와 장갑차를 맨몸으로 막아내면서 국민이 주체적으로 민주주의를 방어할 수 있었다. 엄동설한의 눈보라를 마다하지 않았던 키세스 시위대의 장엄한 모습은 우리 국민의 민주주의에 대한 헌신과 용기를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이번 계엄내란으로 빚어진 탄핵심판과 내란 극복의 과정에서 경험했던 서부지방법원 폭도 난입과 헌법재판소에 대한 무차별적 공격은 빛의 혁명이 보여준 희망에도 불구하고 권력에 대한 강한 유혹과 절차적 민주주의의 위기가 여전히 잠재적 위협으로 남아 있음을 잘 보여준다. 따라서 우리의 민주주의는 걸어온 길만큼이나 걸어가야 할 길 또한 멀다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그렇기에 4월 4일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파면 결정 이후 이어질 조기 대선과 내란 극복의 과정에서 12·3 계엄내란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87년 체제의 이중성, 권위주의적 정치문화의 청산, 언론 권력의 민주화, 정치의 정상화를 통한 정치의 양극화와 극단화 극복, 지역주의, 세대 간 갈등, 정치적 분열 극복과 민주적 가치에 기반한 국민통합의 정치를 펼쳐 나갈 필요가 있다.
< 차재권(부경대 정치외교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