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뚜라미

이 광

올 것은 그냥 둬도 제삿날 오듯 온다

내내 용케 숨었다가 어느새 오고 만다

깜깜한 기억의 골방 반짝 불이 켜진다

지난해 못 다했던 울음 다시 꺼내 운다

한동안 끊은 소식 쫑알쫑알 들먹이다

오래전 듣던 발자국 생각난 듯 뚝 그친다

매미가 떠난 지상은 합창단의 무대가 끝나고, 이제 시 낭송의 차례가 된 듯 귀뚜라미가 등장합니다. 나희덕 시인의 시 ‘귀뚜라미’는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높은 가지를 흔드는 매미 소리에 묻혀/ 내 울음 아직은 노래 아니다’ 이제 서늘해진 바람과 함께 귀뚜라미의 시간이 왔습니다. 매미가 나무의 높은 가지를 흔들었다면 귀뚜라미는 우리 마음 한 자락을 흔들고 있습니다.

위 작품은 진술 위주로 이루어졌는데 첫수 초장에 ‘제삿날 오듯’이라는 비유가 있습니다. ~처럼 또는 ~듯이 등의 형태를 가진 직유는 은유에 비해서 단순하나 시의 전반적인 분위기에 미치는 힘은 직접적이고 강력합니다. 따라서 이 작품을 접한 독자는 제삿날이란 말이 작품을 읽는 내내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작가가 왜 제삿날이란 비유를 택했는지 공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제삿날이면 만나는 반가운 얼굴들, 제삿날이면 떠오르는 그리운 얼굴이 귀뚜라미 소리와 함께 깊어지는 밤의 정서를 더욱 깊게 해줍니다.

이광 시인

◇이광 시인 : ▷2007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당선 ▷부산시조 작품상, 이호우 시조문학상 신인상, 나래시조문학상 수상 ▷시조집 《당신, 원본인가요》, 《소리가 강을 건넌다》, 《바람이 사람 같다》, 현대시조 100인선 《시장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