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 시인의 단시조 산책 (63) 엄마의 서책 - 이석수

이광 승인 2022.12.28 09:31 | 최종 수정 2022.12.31 05:41 의견 0

엄마의 서책
                                   이석수

 

붉게 언 남천 열매 물끄러미 바라본다

정리하다 문득 잡은 풀 먹인 여름 잠옷

십년이 훨씬 지났지만 들먹이는 그리움

이석수 시인의 <엄마의 서책>을 읽는다. 시인은 ‘붉게 언 남천 열매’ 앞에서 생전 그 광경에 눈길이 머물던 어머니를 떠올린다. 그리고 옷장 속에서 발견한 ‘풀 먹인 여름 잠옷’을 잡으며 어머니의 정성 어린 손길을 만난다. 풀 먹여 잘 개어진 잠옷이 어머니가 남긴 서책인 듯 만져본다. 우린 누구나 가슴에 어머니라는 책을 한 권씩 품고 산다. 그 책을 펼칠 때마다 ‘들먹이는 그리움’이 꾸밈없이 다가온다. 이처럼 시조는 귀에 익은 운율과 눈에 선한 심상으로 격의 없이 소통되는 우리 고유의 시문학이다.

지난해 10월에 시작하여 1년여에 걸쳐 단시조 산책을 연재했다. 처음엔 이미 잘 알려진 단시조 명편을 위주로 선정하려 했으나 필자의 생각이 바뀌게 되었다. 2000년대 이후 등단한 작가들과 이후 대거 등장한 신진들 작품 중에서 다양하게 찾아내기로 한 것이다. 좋은 작품을 미처 소개하지 못한 아쉬움을 뒤로 하고 이제 그만 연재를 마감하려 한다. 매주 한 편씩 발굴하는 작업이 그리 녹록하지 않고 필자의 능력도 부족함을 느꼈다. 그간 졸문을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들께 감사드린다.

시조는 겨레의 얼이 담긴 문학이다. 만고충신 정몽주의 단심가와 그를 회유하려 했던 이방원의 하여가는 시대를 뛰어넘어 회자되고 있고, 동서고금을 통틀어 가장 위대한 장군 이순신도 전쟁 중의 깊은 시름을 시조로 풀어냈다. 절세가인 황진이가 동짓달 기나긴 밤의 그리움을 읊은 절창은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조선 시가의 양대 산맥인 윤선도와 정철은 시조로 당대문학의 정수를 보여주었고, 퇴계와 율곡 같은 천하의 대학자들도 시조시인이었다. 왕을 비롯하여 사대부를 중심으로 향유되던 시조는 조선 후기 평민층으로 확대되고 사설시조가 등장하면서 시대상과 일상의 희로애락을 생생하게 노래했다.

일제강점기 국민문학파의 시조부흥론으로 새로이 맥을 이은 시조는 당시의 문화말살정책을 이겨내고 현대시조로 거듭난다. 즉 시조의 정형성과 언어미학을 추구하는 순수문학이라는 두 날개로 비상을 시작한 현대시조는 이제 많은 창작자를 가진 독립 장르로 오늘에 이르는데 특히 45자 내외로 인생을 담아내는 단시조는 사이버 시대에 가장 어울리는 문학 장르라 생각한다.

그러나 여전히 시조를 형식에 갇힌 구시대적 유물로 폄훼하는 시각이 있다. 자유시를 발표하면서 시조 한 수 제대로 쓰지 못하는 걸 자랑처럼 말하는 시인을 볼 땐 씁쓸하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 것의 소중함을 알고, 우리 것의 훌륭함을 깨친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 다행스럽다. 천년의 역사와 함께 이어지는 시조의 물줄기는 머잖아 한국문학의 큰 흐름으로 자리할 것이다.

 

이광 시인

◇이광 시인 : ▷2007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당선 ▷부산시조 작품상, 이호우 시조문학상 신인상, 나래시조문학상 수상 ▷시조집  《당신, 원본인가요》, 《소리가 강을 건넌다》, 《바람이 사람 같다》, 현대시조 100인선 《시장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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