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광 장편소설】 「팽이의 시간」(15) - 제4장 끝이 보이는 곳에서의 출발(끝)

이광 승인 2023.06.26 15:26 | 최종 수정 2023.07.05 15:52 의견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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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왔다. 고등학교 삼학년 학생들에겐 학교는 하루하루가 대학입시를 향한 일상이었다. 그러한 가운데 사회에 대한 관심도 깊어져가는 나이라 담쟁이가 담을 넘어 덩굴손을 뻗듯 인호는 학교 밖의 세계에도 눈길을 던지곤 했다. 그는 신문을 자주 정독했다. 서울의 모 대학에서 유신헌법 철폐 시위를 주도한 학생 두 명이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그들의 구속을 다룬 기사는 아주 짤막하게 실렸다. 전국적으로 나비의 개체수가 줄어든다는 기사도 있었는데 인호는 그런 뉴스를 대부분의 사람들이 관심 밖에 두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는 나비가 점점 살기 힘들어지는 환경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분명 여러 곳에 있을 거란 확신을 버리지 않기로 했다.
 
그 무렵 인호를 가장 번민에 빠뜨리게 한 것은 다름 아닌 흔들리는 신앙심이었다. 그것은 처음에는 자신의 기도를 하느님께서 다 듣고 계실까 하는 의구심에서 출발했다. 하느님의 전지전능을 믿으면 믿을수록 이 세상은 왜 하느님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지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인호는 묵상을 통해 자신이 품고 있는 의문을 나름대로 풀어나가려고 애썼다. 기도가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을 당장 바꾸어주진 않으나 그 현실에 맞서는 우리 자신을 변화시킬 수는 있다는 생각이 그를 격려해주었다. 이는 독서회 활동을 하며 이 사회가 변화하기 전에 우리 자신부터 변해야 한다던 하석진의 생각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호는 신의 절대 선에 위배되는 악의 존재를 거론하며 신을 부정하는 논리 앞에서는 그만 무력해지곤 했다. 그렇다고 무신론의 입장에 동조할 의사는 추호도 없었다. 언제나 하느님께 다가가려 하면서도 어느 순간 멈춰서 있는 자신을 뛰어넘지 못하고 있었다.
 
인호는 부자들이 누리는 안락에 이미 길들여진 상태였다. 냉장고를 갖춘 집안에서 그는 지난해 여름 시원한 음료를 맘껏 마셨다.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날도 그의 집은 에어컨 바람에 몸을 편히 맡길 수 있었다. 식생활 또한 더 이상 바랄 게 없는 만족 그 자체였다. 이는 다 부모의 노력 덕분이란 걸 인호도 잘 알고 있었다. 앞으로도 그러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선 그 또한 그런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사실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시인이 되고 싶으나 가난한 시인의 삶을 택할 열정을 자제하는 자신을 확인하곤 했다. 세속의 것을 탐하면서 영혼의 영역을 넓히려는 건 욕심보다는 위선으로 느껴졌다. 그럴 바엔 아버지처럼 사업가의 길을 나서는 게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예전 아프리카로 가고자 했던 동심의 세계와는 꽤나 멀어진 제 모습을 인정했다. 신앙을 몰랐던 어린 시절 길 위의 동전을 주었을 때 환희에 차서 내질렀던 ‘찍’이란 소리가 떠올랐다. 획득의 기쁨은 어린 자신을 얼마나 고무시켜 주었던가. 많은 사람들이 ‘찍’이란 소리를 내심 외치며 그러한 획득을 위해 살아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깊은 묵상에 들어갔다. 보이지 않지만 실재하는 신비의 세계에 눈을 뜨면서 외웠던 ‘아멘’이란 소리가 가슴에서 메아리처럼 울려 나왔다. 그것은 ‘찍’과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 주님 앞에 오롯이 자신을 맡기는 소리였다. 인호는 자신의 신앙이 흔들릴 때마다 두 손을 모우고 주님을 향해 ‘아멘’ 하고 외우면 마음이 평온해진다는 걸 알고 있었다.
 
“주님. 참된 신앙인은 세상의 부귀영화를 꼭 멀리해야만 하는 것입니까? 세속에 물이 들어 혼란스러운 저를 올바른 길로 인도해주십시오. 부귀와 영화에 눈을 돌리기 시작한 저에게 참된 지혜를 주시옵소서. 아멘.”
 
학교에서 예비고사를 대비한 모의고사가 치러졌다. 인호는 시험을 앞두고 부족하다고 여겨지는 과목의 학습을 밤늦도록 했다. 저녁식사 후 진한 커피 한 잔은 졸음을 쫓는 데 도움이 되었다. 야경꾼의 호루라기 소리가 집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 시간까지 계속 공부만 파고든 건 아니었다. 기분 전환을 위해 도서관에서 빌려온 시집을 잠시 펼쳐보기도 했다. 시험은 좋은 점수를 기대할 만큼 잘 보지 못한 것 같았다. 그건 다른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출제된 문제가 비교적 난이도가 높았기 때문이었다. 인호는 자신의 점수가 상위권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음을 확인했지만 마음을 놓을 순 없었다. 그와 비슷한 점수대의 층이 두터워 더 열심히 하지 않으면 치고 올라오는 상승세의 학생들에게 언제든지 밀릴 수 있는 것이었다.
 
유월 초순이었다. 학교에서 오후부터 교련 실시상황 검열이 있었다. 공습경보가 하달되어 학생들은 일제히 대피소로 향했다. 하늘이 흐리더니 민방공 훈련이 끝날 때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검열관들 앞에서 빗속의 열병식이 진행되었다. 빗줄기가 점점 굵어졌지만 검열은 중단되지 않았다. 검열관과 함께 교사들도 비를 맞는 학생들을 바라보며 우산도 쓰지 않고 거의 부동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밴드부도 빗속의 연주를 계속했다. 기수들의 기는 비에 젖어 처져 있었고, 교련복 속으로 스민 비는 내의마저 흠뻑 적셨다. 빗물을 잔뜩 머금은 모자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연신 볼을 타고 흘렀다. 흠뻑 젖었다는 것을 인식한 육신은 비를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고 평정을 되찾았다. 오히려 학생들의 행진은 평소보다 더욱 힘차고 절도가 있었다. 사열이 끝나고 비가 조금씩 잦아들었다. 총검술 시범이 이어졌다. 우렁찬 기합소리와 함께 활기찬 연속 동작을 선보이자 검열관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검열이 끝났을 땐 온몸이 물에 잠긴 꼴이 되어 양말까지 축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들 자신을 버려 새로운 자신을 찾은 것처럼 희열을 맛보았다. 어중간하게 젖었더라면 짜증과 불평으로 가득할 상황이 완전히 젖음으로써 모두가 하나 되는 완벽한 일치를 이룬 것이었다. 인호는 모두에게 주어진 최악의 조건이 공동체 의식을 고양하여 최상의 결과를 이끌어내는 놀라운 변화 과정을 체험할 수 있었다.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 속에서 인호는 신앙의 안정을 되찾곤 했다. 주일미사 시간 주님과 일치를 이루는 기쁨은 일상의 다른 무엇과 비교할 수 없는 은총이었다. 미사를 마치며 신자들과 함께 나누는 평화의 인사는 그날 하루를 평온하게 했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불행과 고통에서 자신은 보호될 것이라는 이기적인 믿음에 안주하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했다.
 
집에 돌아오면 혼자 떠도는 기분이었다. 가족들은 성당에 나가지 않아도 각자의 생활을 충실히 영위하고 있었다. 덕희는 대연동에서 손을 댄 집장사를 광안동까지 범위를 넓혔고, 이를 지켜보던 이정식은 주택사업 분야로 진출할 계획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준호는 미국의 도나라는 여학생과 서신 교환을 꾸준히 이어나갔다. 처음엔 편지지 한 장 채우기 힘들어했으나 이젠 기본이 두 장이었다. 인호는 홀로 제 방에서 성당에서 가르친 창조론과 학교에서 배운 진화론 사이에서 부질없는 시소게임을 하기도 했다. 신앙에 회의가 찾아올 땐 인호는 자신을 하느님의 품으로 이끈 이모를 생각했고, 학생미사를 함께하던 세실리아를 생각했다. 인호는 지갑 속 세실리아의 사진을 꺼내보곤 했다. 그리고 책상 위의 십자고상 옆에 놓아둔 태종대의 조약돌을 손에 쥐어보기도 했다. 세실리아가 그에게 준 달걀만한 크기의 돌이었다. 그는 대구로 돌아갈 날이 다가오고 있다고 속삭이는 내면의 소리를 듣고서야 마음을 다잡고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다.
 
장마가 시작되었다. 인호는 창문을 열었다. 바람이 잔잔하여 비가 들치진 않았다. 사람만 고독한 게 아니라 비가 감싸는 정원도 고독해 보였다. 제 집에서 몸을 웅크리고 비를 피하고 있는 코리도 외로울 것 같았다. 귀족 느낌의 향나무 또한 비에 젖어 노곤한 무상에 잠긴 모습이었다. 인호는 기말고사 시험공부를 위해 책상 위에 영어 교과서와 수학 문제집을 올려놓았다. 대학 입학 예비고사가 이제 넉 달을 앞두고 있었다. 인호는 지금처럼 노력을 지속한다면 대구의 원하는 대학을 갈 수 있을 것이라 자신했다. 대학은 과연 자유롭게 학문을 실천할 수 있는 곳일까? 인호는 지금껏 받아온 교육과는 달리 대학이란 새로운 곳에 깃든 자유를 기대 반 설렘 반으로 상상하면서 그날이 하루속히 오길 바랐다.
 
덕희는 인호를 서울의 명문대학으로 보낼 생각은 이미 접었다. 인호 본인이 원하지 않기도 했지만 6년간 자신의 품을 벗어나 있던 아들을 굳이 객지로 다시 보낼 것까진 없다고 마음을 정리했다. 대신 자식을 서울의 명문대학에 진학시켰다는 학부모로서의 긍지는 준호가 세워줄 것이라 기대했다. 준호는 중3이 되어서도 반에서 1,2등을 다투며 그녀의 자부심을 변함없이 지켜주었다. 덕희는 인호가 부산의 국립대학 상대로 진학하는 것만큼은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이정식도 마찬가지였지만 인호의 현재 점수로 볼 땐 좀은 높게 잡은 목표였다. 덕희는 이번 여름방학이 인호의 실력 향상을 꾀할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고 미리부터 알아본 게 있었다. 소수의 학생들에게 맞춤형 집중교육을 시키는 특별과외라는 것이었다. 인호는 어쩔 수 없이 방학을 하는 대로 과외수업을 받아야 했다. 그리고 대구에 하루 다녀오는 것을 허락받았다.
 
대구로 향하는 길은 또 하나의 가족들 곁으로 돌아가는 귀향의 감정을 갖게 했다. 지난해 겨울 조기방학으로 대구를 찾은 이후 근 8개월 만이었다. 집에는 경숙만 홀로 인호를 맞아주었다. 세실리아는 친구를 만나러 나갔고 곧 돌아올 거라고 했다. 늘 변함없을 줄 알았던 대구의 집에도 조금씩 변화는 일어나고 있었다. 여전히 경기가 좋지 않은데다 근래 한복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줄어 일감이 뚝 끊어지는 경우도 생기곤 했다. 예전엔 두 사람이 부지런히 일을 해도 주문이 밀릴 때가 잦았는데 이제는 한 사람 일거리가 안 되는 날이 많았다. 그래서 안나는 화장품 외판을 했던 경험을 살려 화장품 가게를 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점포 임대보증금은 경숙이 빌려주기로 했고, 초기 사업자금은 루시아가 자신이 다니는 은행에서 대출받기로 의논된 상태였다. 경숙은 인호가 하룻밤 자고 가길 바랐으나 덕희의 당부에 어쩔 수 없었다.
 
“내일부터 과외공부 한다꼬 엄마가 오늘 늦더라도 보내라더라. 저녁 후딱 묵고 가래이. 오늘은 불고기 맛있게 해주꾸마.”
“불고기 조오치!”
 
경숙의 말에 힘차게 대꾸하면서도 인호는 세실리아가 오는지 대문 쪽으로 신경을 쏟고 있었다. 결국 대문 앞으로 나가 세실리아를 기다리기로 했다. 세실리아보다 먼저 안나가 모습을 나타냈다. 그녀는 화장품이 담긴 가방을 들고 있었다. 화장품 가게를 물색하는 동안 사전 영업을 하는 중이었다. 인호를 반겨준 그녀는 옷을 갈아입고 경숙을 거들기 위해 부엌으로 곧장 걸음을 옮겼다. 얼마쯤 지나 세실리아가 들어왔다. 오랜만에 보는 세실리아는 그동안 부쩍 성숙한 티가 흘렀다. 인호는 봉긋해진 그녀의 가슴에 쏠린 시선을 거두며 조금은 멋쩍은 미소를 보냈다. 세실리아도 자신의 달라진 모습을 보이는 게 어색했는지 처음엔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 그녀는 지난겨울 인호가 노점에서 사준 노란 머리핀을 꽂고 있었다. 둘은 금세 남매처럼 스스럼없는 사이로 돌아와 그간의 밀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루시아가 퇴근이 늦어져 먼저 식사하기로 했다. 인호가 안방에 큰 상을 펼쳤다. 저녁식사는 즐거웠지만 곧 부산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느긋할 순 없었다.
 
버스 정류장까지 세실리아가 따라 나왔다. 인호가 내미는 손을 세실리아가 잡아주자 그는 그녀의 손을 꼭 쥐었다. 손아귀에 힘을 넣어 아프지 않을 정도로 손을 쥐며 세실리아에 대한 자신의 의지를 담아냈다. 그가 두 번 세 번 이어서 자신의 의지를 전달하자 그녀 또한 손가락에 힘을 주며 자신에게도 그러한 의지가 있음을 표현했다. 해가 길어진 거리에 땅거미가 깔리기 시작했다. 인호는 아직 시간이 있으니 세실리아에게 성당에 가보자고 했다. 둘은 길을 건너 성당을 찾았다. 인호가 세례를 받은 신앙의 고향이었다. 그곳에서 인호는 최근 수시로 흔들리던 자신의 신앙심을 다시 단단하게 다지는 시간을 가졌다. 잠시였지만 평온한 행복감이 그를 에워싸 주었다.
 
성당을 나와 길을 건넜을 때 버스 정류장에는 인호가 타야할 버스가 들어오는 게 보였다. 하지만 인호는 서두르지 않았다. 세실리아가 손으로 버스를 가리키자 그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인호는 버스 정류장에서 조금이라도 더 머무르는 것을 택했다. 버스를 보내고 다음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의 짬이라도 벌고 싶었다. 사거리를 지나서 다가오는 다음 버스를 발견한 세실리아가 인호를 바라보았다.
 
“오빠, 저거 타. 가서 공부 열심히 하고...... 대학은 대구로 오는 거 문제없지?”
“물론이지. 이제 몇 달 후면 결판이 난다. 슬슬 끝이 보이기 시작하네.”
“오빠가 부산으로 가고 난 뒤, 다시 올 거란 생각도 많이 했지만 못 올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어. 하지만 이젠 아니야. 오빠가 떠난 빈방을 볼 때마다 혼자 속삭여. 오빠는 꼭 저 방으로 돌아올 거라고 말이야.”
 
세실리아의 보조개를 보면서 인호 또한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래, 믿어줘서 고마워.”
“오빠, 어서 타. 오빠를 위해 기도할게.”
“응, 간다. 나도 니 생각하고 기도할게. 잘 있어.”
 
인호가 승차하자마자 버스는 다음 정류장을 향해 출발했다. 인호는 차창 밖의 세실리아에게 손을 흔들었다. 세실리아도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인호는 빈 좌석에 앉지 않고 그녀를 향해 서 있었다.
 
 
대학 입학 예비고사를 한 달가량 앞둔 어느 날이었다. 육군 일병 계급장을 단 하석진이 인호 앞에 나타났다. 첫 휴가를 받고 찾아온 것이었다. 석진은 신병훈련을 마치고 최전방인 땅굴 사단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땅굴 사단이란 북한이 남침을 대비해 파둔 땅굴을 제일 먼저 발견한 부대의 별칭이었다. 군 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는 듯 얼굴빛은 좋아 보였다. 그의 말에 의하면 그가 소속된 중대 내에서 대학 재학 중 입대한 사람은 그를 포함해 두 사람뿐이었다. 도시에선 흔히 볼 수 있는 대학생이지만 최전방 보병부대에선 드문 존재였다. 석진은 처음엔 소대의 소총수로 배치되었으나 대학생이란 이유로 중대 행정병으로 발탁되었다. 그는 중대장의 신임을 받으며 잘 지내고 있다고 했다. 인호는 그에게 진학할 대학을 대구로 정했으며 국문학과를 택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대구로 가는 거 부모님하고 상의한 거니?”
“아직. 예비고사 치고 나서 말씀드릴 생각이에요.”
“국문학을 택한 건 잘한 것 같네. 열정을 가지고 학문에 접근해야 진정한 성취를 맛볼 수 있지. 인호가 나중에 아버지 사업을 이어받는다 하더라도 문학적 상상력이 경영에 참신한 바람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봐. 젊음이 좋다는 게 뭐니? 무한한 가능성이잖아. 자신이 진정으로 원할 때 최선을 다할 수 있고 최선을 다했다면 결과는 뭐, 나중의 일이지.”
“형, 누가 나를 어떤 틀에 집어넣어 나 아닌 나를 만들려고 한다면 당연히 맞서야겠죠? 그 누가, 바로 우리 부모님이라 해도 말이에요.”
“내 생각은 이래. 사람들이 어떤 결정을 내릴 때 그 시점의 자기감정에 영향을 받게 된다는 거지. 그래서 다른 사람들 의견에 귀 기울이기가 쉽지 않은 거야. 내가 옳다고 판단한 부분도 미처 못 본 문제점이 있다는 걸 전제해야 해. 그래야 자기가 잘못 판단한 것을 인정할 줄 아는 눈이 트이는 거거든. 성인이 되면 자기 생각에 책임을 져야 하잖아. 나이가 들수록 심사숙고해야 할 일과 자꾸 부딪히게 돼. 심사숙고란 말이야, 자기 생각만 깊이 물고 늘어지는 건 아니라고 봐. 다른 사람 의견도 경청해서 처음과는 분명 달라진, 폭 넓은 사유의 결과물을 내놓는 거 그게 제대로 된 심사숙고야.”
“형이 무슨 말 하려는지 잘 알겠어요. 내 생각만 너무 내세우지 말라는 거죠? 하지만 이번 대학 진학은 내 뜻대로 관철시킬 거예요. 부모님 뜻에 따라 고등학교는 부산으로 왔지만 대학은 대구로 갈 겁니다. 이건 세실리아와의 약속이기도 해요,”
 
석진은 인호의 결연한 의지에 고개를 끄덕였다.
 
“세실리아를 생각할 때마다 기뻐하는 인호를 보면서 새삼 느낀 게 있어. 상대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게 오로지 기쁘기만 할 때 그런 게 사랑이구나 하고 말이야. 사랑은 가지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주는 거지. 화수분처럼 주면 줄수록 자꾸 채워지는 거겠지. 네 사랑에 박수를 보낸다. 내년 휴가 땐 인호 대구에서 만나겠네, 허허.”
 
석진은 부대로 복귀했다. 그의 말처럼 내년엔 대구에서 그를 만난다고 생각하니 여러 가지 즐거운 상상들이 뒤를 이었다.
 
학교에서는 예비고사가 얼마나 남았는지 카운트다운에 들어갔다. 15일, 14일, 13일....... 학생들은 이제 도착점을 눈앞에 두고 있는 마라톤 선수처럼 지친 몸을 정신력으로 추스르며 달려야 했다. 3일, 2일, 1일. 드디어 예비고사 하루 전날이었다. 신문에서는 올해 예비고사가 2.5대 1의 경쟁률을 보인다고 했다. 즉, 응시자 다섯 명 중 두어 명은 정규대학에 들 수 없다는 것이었다. 경제성장과 더불어 대학진학을 원하는 학생들이 해마다 계속 늘어나는 추세였다. 학생들은 점점 치열해지는 경쟁사회에 이미 발을 들여놓고 있었다.
 
인호는 과목별로 암기를 요하는 몇 가지 사항만 점검하고 평안한 마음으로 책을 덮었다. 잠을 청하기 전 내일 시험을 실수 없이 치를 수 있도록 주님께 기도했다. 긴 여정을 흘러온 강물이 먼발치의 바다 앞까지 도달한 듯했다. 이모와 함께 세실리아의 얼굴이 떠올랐다. 인호는 끝이 보이는 곳에서의 새로운 출발을 꿈꾸며 달콤한 잠에 빠져들었다. <끝>
 
 

◇ 이광 시인 : ▷2007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당선 ▷부산시조 작품상, 이호우 시조문학상 신인상, 나래시조문학상 수상 ▷시조집  《당신, 원본인가요》, 《소리가 강을 건넌다》, 《바람이 사람 같다》, 현대시조 100인선 《시장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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