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짜여진 녹색항구도시를 제안한다
구자상(기후변화에너지대안센터 상임대표)
나는 처음 북극항로를 개척하여 부산의 미래를 열자고 했던 전임 오거돈 시장의 주장에 대해 틈만 나면 비판하고 비난하였다. 즉 전 세계가 기후변화로 인한 북극해의 해빙과 그로 인한 북극 생태계의 붕괴를 우려하는 현실에서 북극항로를 개척하는 문제는 단순한 경제적 동기를 넘어 대재앙의 방아쇠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되었다.
이재명 정부가 구성되면서 이 문제는 본격적인 현안으로 등장하고 있다. 북극해의 얼음이 해빙되는 시기에 북극항로를 이용한다면 현실적으로 큰 경비절감과 이윤 증대의 계기가 된다면 이를 환경생태의 명분으로 회피할 집단이나 국가는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다.
기후변화와 연동된 모든 생태적 재앙은 산업혁명 이후 누적된 탄소계 에너지 즉, 화석연료의 과다 사용이 가져온 인위적인 사건이다. 여기에 현대사 속의 거의 모든 전쟁의 속내는 자원, 즉 석유를 둘러싼 갈등이다. 당장 우크라이나 전쟁의 경우 다양한 이해의 충돌을 볼 수 있지만 이 전쟁의 상당 부분은 에너지를 둘러싼 충돌로 볼 수도 있다. 전쟁 전 러시아가 유럽 전역으로 수출하는 에너지수송 관로의 85%는 우크라이나를 관통하였다. 전쟁으로 에너지의 수출이 불가능하게 되었고, 발트해를 관통하는 러시아·독일 간의 해저 가스관마저 미국이 폭발시켰다. 유럽 전체의 에너지 수급 구조가 크게 변화된 것이다.
이런 중에도 2050년 탄소중립을 향한 중대한 실천은 무게 있게 진행되고 있다. 코펜하겐의 경우 내년이면 세계 최초의 탄소중립도시가 된다. 아랍에미리트는 인구 5만의 에너지 자립 도시 마스다르 시티를 건설했다. 석유를 좋아하고 기후변화를 부정하는 트럼프가 세계의 사정을 어지럽게 하지만 “2050 탄소중립”은 인간이 지구에서 연명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다. 그런 점에서 거대 항구도시 부산의 향후 모든 시도와 기획은 국제사회의 책임 있는 일원으로서 “2050 탄소중립” 정책에 귀속되어야 한다. 특히 북극항로 문제는 민감한 생태계의 속살을 간섭하는 문제로서 당장 이익에 눈먼 행동을 앞세우기보다 장기적인 생태학적 예측과 함께 책임 있는 실리가 필요하다.
녹색항구도시의 전망은 이런 취지에서 의미 있는 시도로 보인다. 생산적인 토론의 확산을 위해 최근에 본인도 참여하고 있는 부산녹색항구도시포럼의 발의문을 편집하여 옮긴다.
녹색항구도시 부산시민포럼 공동 발의문(안)
항구가 돌아온다. 해양이 부산이다. 해양수도 부산을 외친 지 25년 만에 해항(海港)도시 부산
이 소멸해 가는 그 면모를 탈바꿈할 절호의 기회가 왔다. 개항 100년을 넘어 부산항이 부산시민에게 개방되고 해수부가 이전하고 북극항로가 열리고 세계적인 해운사 본사가 둥지를 틀면서 부산은 실질적인 해양수도를 꿈꾼다. 이제 부산은 중앙정부 덕을 보는 수준이 아니라 내발적 발전을 시작해야 할 줄탁동시(啐啄同時)가 필요한 시간임을 절감한다.
1. 부산항은 부산의 지역자원이라는 공감을 시작한다.
▸부산항은 누가 뭐래도 부산의 자원이다. 개항이래 국가 무역항으로 그 역할을 해왔지만, 컨테이너 물동량이 부산신항으로 넘어가고 시민에게 돌아온 북항을 비롯한 남항, 감천항, 다대포항은 이제 부산의 자원으로 관리하고 개발해야 한다.
▸대한민국 한강 이남 최고의 랜드마크 부산항이 지역에 더 큰 가치를 창출함으로써 수도권 일극을 타파하고 청년들이 돌아오도록 해야한다.
2. 부산은 항구도시다
▸항구는 흐름이다. 여객과 물류가, 정보와 금융이, 문화와 산업이, 생산과 소비가, 생활과 역사가 흘러서 살아나는 곳이 항구도시다. 우리는 지금까지 항만 배후 원도심이 흐름에 동행하지 못해 소멸로 가는 오랜 세월을 지나고 있다. 이제 부산은 흐르는 관문도시로 그 역동성을 담아내야 한다.
▸부산은 도시기본계획과 공유수면 관리계획이 따로 노는 이상한 도시다. 도심항을 끼고 있다는 이유로 부산은 사람중심 도시가 아니라 물류중심 도시로 살아왔다. 항만이 중앙정부에 조차된 채 시민이 바다에서 도시를 바라보지 못하고 사는 항구도시는 항구도시가 아니다.
▸해양과 항만의 도시발전 지표가 없는 도시는 해양수도가 될 수는 없다. 항만산업, 해양관광, 해양스포츠, 선물과 해양금융, 해항문화가 어우러지고 배후 원도심이 항만에 녹아드는 해항시대는 중앙정부가 주는 것이 아니라 부산이 성취하는 내발적 발전이 있어야 가능하다.
3. 부산은 그린항구도시이어야 한다.
▸부산항은 그린에너지를 생산하고 소비하고 가치를 창출하는 항구여야 한다. 탄소제로 스마트항만, 청정해역을 위한 생태계가 살아있는 지속 가능한 항구도시로 도시발전을 이루어야 한다.
▸산토리니 같은 산복로 워케이션 공간, 온난한 해양성 기후가 빚어내는 힐링도시, 산과 강, 바다가 함께 펄떡이는 맑은 도시가 청년을 품는 도시로 거듭나야 한다. 인구소멸이 지역소멸로 가는 끝없는 나락을 이제 멈춰야 한다. 그린은 소멸이 아니라 삶이다.
[부산의 행동]
1. 부산시민들은 부산을 지속 가능한 ‘녹색항구도시’로 만들고자 한다.
해양수산부의 이전을 계기로 부산은 과거의 한계를 극복하고, 녹색항구도시(Green Port City)라는 미래 비전을 설계해야 한다. 녹색항구도시는 단순한 ‘친환경 항만’이 아니다. 그것은 항만 운영권, 에너지 체계, 선박 전환, 국제 물류 전략, 해양환경 보전, 시민 참여를 아우르는 종합적 변화다. 세계의 항구들이 기후위기 대응과 에너지 전환의 최전선으로 나서고 있는 지금, 부산도 국제 흐름에 적극 부합하는 정책을 펴고, 실천해야 한다.
- 항만 자치권 확보 : 중앙집중에서 지역 자치로
부산항은 여전히 중앙정부가 관리한다. 부산항만공사는 해양수산부 산하 기관이며, 정책 결정의 틀도 서울에서 짠다. 항만 개발로 인한 부작용은 부산시민이 감당하면서도 의사결정에서는 배제되는 구조가 이어져 온 것이다.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 항만 자치권을 부산에 이양하고, 지역이 주도하는 항만 거버넌스를 구축해야 한다. 로테르담 항만은 지방정부가 운영권을 갖고 민간기업과 시민이 함께 참여하는 협치 구조를 갖추어 세계 1위 항만으로 성장했다. 부산도 시민 자치와 지역 거버넌스를 바탕으로 항만정책을 설계해야 한다.
- 재생에너지 기반 항만 조성 : 자급형 분산형 에너지 시스템
항만은 전력을 가장 많이 소비하는 곳이다. 컨테이너 크레인, 냉동창고, 조명과 물류 장비가 모두 전기에 의존한다. 지금까지는 중앙집중형 전력망에 의존했지만, 기후위기와 에너지 안보 측면에서 한계가 명확하다. 부산항은 태양광, 풍력, 그린수소 같은 재생에너지를 직접 생산해 사용하는 로컬 그리드(Local Grid)를 구축해야 한다. 부두와 창고 지붕, 배후단지와 주차장을 활용한 태양광 발전과 해상풍력 등 분산형 발전 체계를 갖추어야 할 것이다.
- 친환경 선박과 조선산업 혁신 : 해운의 녹색 전환
국제해사기구(IMO)는 2050년까지 해운 탄소배출을 ‘넷제로’로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LNG 선박이 과도기적 대안으로 쓰이고 있지만, 이제는 그린메탄올, 암모니아, 수소가 대세로 부상하고 있다. 유럽의 머스크(Maersk) 해운은 이미 그린메탄올 추진 컨테이너선을 운항 중이다. 싱가포르는 세계 최초로 메탄올벙커링 기지를 가동하며 국제 친환경 연료 허브로 도약하고 있다. 부산은 조선·수리·해운 산업의 집적지다. 이 강점을 살려 친환경 선박 기술 개발과 연료 인프라 구축을 병행해야 한다. 부산이 국제 친환경 선박 클러스터로 성장한다면, 단순한 해운 도시를 넘어 기후위기 시대의 해운 혁신 중심지가 될 수 있다. 이는 지역 일자리 창출과 산업 경쟁력 강화로 이어진다.
- 국제 녹색해운항로 허브 구축 : 글로벌 네트워크
세계는 저탄소 해운항로를 빠르게 확장하고 있다. 유럽연합은 FuelEU Maritime 제도를 통해 유럽 항만을 오가는 모든 선박에 엄격한 탄소 기준을 적용한다. 일본과 중국도 자국 항만에서 친환경 선박만 접안할 수 있는 제도를 강화하고 있다. 부산은 동북아 물류의 중심이자, 유럽·동남아·북극항로를 연결하는 전략적 거점이다. 따라서 부산을 국제 녹색해운항로 허브로 육성해야 한다. 탄소 중립 선박 중심의 글로벌 네트워크에서 부산이 중심적 위치를 차지할 때, 도시 경쟁력은 크게 높아질 것이다.
- 북극항로 전략적 진출 : 친환경 원칙 위의 도전
기후변화로 북극 빙하가 녹으면서 새로운 항로가 열리고 있다. 부산은 지리적으로 북극항로를 활용하기 가장 유리한 동북아 거점이다. 그러나 무조건적인 경쟁이 아니라 친환경 원칙에 기반한 진출이 필요하다. 부산은 쇄빙선과 친환경 선박을 기반으로 북극항로 개척을 선도하고, 친환경 연료 공급 기지를 확보해야 한다. 러시아, 중국, 일본이 북극항로 개발에 속도를 내는 지금, 부산은 ‘친환경 북극항로 전략’으로 차별성을 확보해야 한다. 북극항로를 환경 파괴 없이 개척한다면, 부산은 국제물류 루트의 새로운 중심지로 도약할 수 있다.
- 항만 대기질 개선 : OPS 도입으로 정박 중 배출 제로
부산항 정박 선박에서 나오는 배출가스는 부산 시민의 건강을 직접적으로 위협한다. 황산화물, 질소산화물, 미세먼지는 벙커C유 연소에서 발생한다. 이에 대한 대안은 육상전력공급(OPS, Onshore Power Supply) 시스템이다. 로테르담, 함부르크, 로스앤젤레스항은 이미 OPS를 도입해 정박 선박에 육상 전력을 공급하고 있다. 부산도 벙커C유 사용을 전면 금지하고, 재생에너지 기반 OPS를 구축해야 한다. OPS는 항만 대기질을 획기적으로 개선할 뿐 아니라, 국제 항만 경쟁에서 필수적인 기준이 되고 있다. 부산이 선제적으로 OPS를 도입한다면, 동북아 환경 항만의 모범이 될 수 있다.
- 시민 주도형 협동모델 : 항만 민주주의
항만의 미래는 시민과 함께 설계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항만정책에서 부산시민은 수동적 존재였다. 이제는 협동조합, 마을기업, 사회적기업이 항만 개발과 운영에 직접 참여하는 시민 주도형 협동모델이 필요하다. 전남 신안군은 태양광 발전으로 ‘햇빛연금’을 지급하며 주민이 직접 재생에너지 전환의 수혜자가 되도록 했다. 부산도 항만 재생에너지 수익을 시민과 공유하고, 정책 과정에 시민 참여를 제도화해야 한다. 시민이 주체가 될 때 항만 민주주의는 현실이 된다.
- 청정 해양환경 보전 : 바다가 맑은 부산
녹색항구도시는 바다의 건강을 지켜야 가능하다. 해수욕장 정화, 해안가 관리, 해양 수산 자원과 해양생태계 보전은 필수다. 부산은 관광도시이자 수산도시다. 따라서 해양환경 보전은 단순한 환경보호가 아니라 도시 경쟁력 자체다. 깨끗한 바다는 관광과 수산업, 주민 생활환경을 지탱하는 기반이며, 부산의 국제 브랜드 가치다.
2. 이러한 비전을 실현하기 위하여 <녹색항구도시 부산시민포럼> 공론의 장을 만든다.
해양수산부 부산 이전은 행정적 이벤트가 아니다. 그것은 부산 시민이 미래의 항만을 직접 설계할 수 있는 역사적 기회다. 항만 자치권, 재생에너지, 친환경 선박, 국제 녹색항로, 북극 진출, OPS, 시민 거버넌스, 해양환경 보전 등 부산을 둘러싼 제반 요소가 종합될 때 부산은 동북아와 세계의 녹색항만 도시로 도약할 수 있다. 낡은 항만도시의 관성을 반복할 것인가, 아니면 녹색항구도시라는 새로운 미래를 열 것인가. 해수부 부산 이전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우리의 목표와 비전에 공감하는 분들이 함께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시민의 의견과 목소리를 담아내고 정책에 반영하는 활동을 함께 해 나가고자 한다. 많은 분들의 동참을 기대한다.
2025. 8. 11 녹색항구도시 부산시민포럼 (준)
(공동준비위원장 : 석태호, 구자상, 김영춘, 김영수, 김대오, 황상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