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개골 모암마을에 사는 김필곤(73) 시인 댁 마루에 부산에서 온 이창희(54) 시인과 필자가 8일 오후 3시 넘어 막걸리를 놓고 마주 앉았다. 안주는 자그마한 소반에 오른 썬 오이와 견과류뿐.
이 시인은 울산에서 오랫동안 목회활동을 하고 있는 목사님으로 오는 10월에 퇴직할 계획이라고 했다. 필자와는 『시와 인간』 동인이었다. 『시와 인간』은 80년대 부산에서 시를 쓰는 시인들 가운데 문학적 지향이 비슷한 시인들이 의기투합해 활동을 하였다. 류명선 허철주 최규장 이창희 최영철 박병출 시인, 그리고 필자 등이 멤버였다. 부산에는 이 동인보다 윗세대인 선배 시인들이 하는 『시와 자유』 동인이 있다. 대부분 고인이 되신 박응석 박태문 임수생 이상개 이해웅 김창근 시인 등이 멤버였다.
시와 시조를 쓰시는 김 시인과 이 시인 두 분은 40년 가까이 친분을 쌓아온 지기였다. 2014년 10월에 중앙동에서 『시와 인간』 동인 가운데 류명선 허철주 이창희 최영철 박병출 시인과 필자가 낮에 만나 점심을 먹고 소주를 한 잔 한 적이 있었다. 필자는 이 시인과는 그때 이후로 처음 만났다.
두 분의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거론되는 사람들로는 통도사에서 그림을 그리시는 수안스님, 작고하신 국제신문의 최화수 선배, 작고하신 부산일보 김상훈 전 사장, 작고하신 임수생 시인, 류명선‧최영철 시인, 이윤택 연출가, 박범신 소설가, 백낙청 문학평론가, 정완영 시조시인, 법정스님, 정공채 시인 등 대개 문학과 관련한 이야기들이 물감 번지듯 온갖 색깔로 펼쳐졌다.
김 시인은 부산에서 우체국에 근무하시다 50세에 작정을 하고 사표를 낸 후 고향인 이곳에 들어와 사신지 24년 째였다. 시인의 삶을 살기로 작정을 하셨던 것이다. ‘달빛차’라는 상표등록까지 하고 녹차를 재배하시지만 경제적인 사정이 그다지 좋지 않은 느낌이었다. 김 시인의 술과 관련한 문학적 편력은 재미있었다. 이야기를 조곤조곤 재미있게 하시는 이 시인의 문학적 편력도 보통이 넘었다. 그분들의 문학적 대화가 바로 한국문학사였다. 한국문학의 과거를 되돌아보고 미래를 짚는 내용이었다.
필자의 집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녹차를 먼저 마신 후 밥을 먹곤, 두 분은 김 시인의 댁으로 돌아가셨다. 이 시인께 내 집에서 “주무시면 된다”고 해도 신세지기를 싫어하시는 이 시인의 성격을 하는 편이라 붙잡을 수가 없었다.
다음날인 9일 오전에 이 시인께 전화를 드렸다. 모암마을에 사신다는 강신주라는 친구 댁에 주무셨다고 했다. 오후에 이 시인께서 “의신마을에 가겠느냐”고 전화를 하셨다. 의신마을로 가 들른 곳은 마을의 맨 끝집인 ‘선유산방’이었다. 삼정마을로 올라가는 길 왼쪽에 있었다.
선유산방 사장님은 김율만(54) 씨로 원래 화개면 소재지 사람인데, 34년 전에 지금의 위치의 척박하기 이를 데 없는 땅을 구입해 조그맣게 집을 지어 살다가 현재의 모습으로 갖췄다고 했다. 닭백숙은 한 마리에 5만5000원, 흑염소는 한 마리에 65만~70만 원을 받는다고 했다. 흑염소의 경우 한 마리에 20명이 먹어도 남는다고 했다. 흑염소를 한 마리 먹은 후 그날 자고 다음 날 아침으로 염소 요리를 먹으면 75만~80만 원을 받는다고 했다. 민박 요금은 그때그때 다르지만 다른 곳보다 많이 받지 않는다고 했다.
이 시인은 30여 년간 화개골에 놀러오다 보니 친한 벗이 몇 있었다. 김율만 사장님도 그 중 한 분이었다. 김 사장님은 이 시인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짬짬이 붓글씨를 썼다. 많이 써본 자세였다. 2시간 넘게 이야기를 나누다 이 시인과 필자는 일어섰다. 사장님은 “도심마을에 양봉통을 놓아두었는데 큰 벌들이 양봉을 죽이기 때문에 그 벌들이 오면 잡아야 한다”고 했다.
의신마을에서 내려오면서 이 시인은 신세지고 있는 모암마을의 친구인 강기주 선생 댁으로 가고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이튿날 9일 이 시인으로부터 김필곤 시인과 함께 점심을 먹자며 연락이 왔다. 김 시인께서 좋아하시는 쌍계정 식당으로 갔다. 차량통행이 금지된 쌍계사 들어가는 다리 입구 맞은쪽에 있는 식당이다. 막걸리를 한 잔씩 마시며 두 분의 문학과 관련한 이야기는 또 이어졌다. 김 시인은 고전에 대한 지식도 해박하셨다. 화개장터 들어오기 전에 위치한 악양정에서 공부한 조선 중기의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1450∼1504) 선생에 대한 설명을 하셨다.
두 시간 넘게 두 분이서 이야기를 주고받다 일어섰다. 필자는 말주변이 없어 어느 자리에서나 대개 듣는 편이다. 두 분은 모암마을로 올라가셨다. 이 시인은 다음 날인 10일(금요일) 부산으로 돌아갈 예정이라고 했다.
10일 오전 11시쯤 “같이 점심 하시죠?”라고 이 시인께 전화를 드렸다. 이 시인은 “부산으로 가는 중이네. 함안 인근이네. 다음에 보세. 고마웠네.”라고 말했다.
미안한 마음이 컸다. 이 화개골짝까지 오셨는데 제대로 대접을 하지도 못했던 것이다.
<시인‧인저리타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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