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5시 약간 넘어 보우스님이 현관문을 열고 나가시는 소리가 들렸다. 목욕탕에 가시는 것이다.
필자는 피곤감이 많아 좀 더 자기로 했다. 같이 목욕탕에 가고 싶은 마음이 있었으나 스님과 함께 목욕을 한다는 게 좀 뭣했기 때문이었다. 자는 둥 마는 둥 누워있는데, 현관문을 열려고 손잡이를 돌리는 소리가 “철컥” 났다. 스님이 목욕하고 오신 것 같았다. 시계를 보니 아침 7시반경이었다.
“물이 좋던데요. 가는데 30분 걸립디다.” 스님은 목욕탕까지 걸어서 다녀오셨다고 했다. 보우스님은 어제 부산에서 이곳 목압마을 필자 집으로 오셨다. 이날 필자 집에서 저녁 7시30분부터 시작한 한시 짓기 및 한문 강독 공부에 참여하신 후 하룻밤을 주무신 것이다. 지난 1월 첫째 주부터 매주 1회씩 필자가 사는 목압마을과 인근의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시를 중심으로 한 인문학 공부를 하고 있다. 필자가 목압마을에 은거하는 대가로 일종의 재능기부(?)를 한다고나 할까.
스님과 아침밥을 함께 먹은 후 서산대사 휴정스님이 출가하셨다는 원통암으로 향했다. 의신마을에 차를 세워놓고 암자로 걸어 올라갔다. 600여m 고지에 있는 원통암까지 0.9km라고 적혀있다.
암자로 올라가는 산길에 주목이 많이 자생하고 있었다. 절에 들어서자 보우스님은 대웅전에 먼저 가시어 부처님께 삼배를 하신 후 서산대사 영정이 있는 방에 가 또 절을 하셨다. 절 마당에 나오니 원통암의 스님께서 “차 한 잔 하고 가세요”라며 다실로 안내하셨다. 지난여름에 이 방에서 차를 얻어 마신 적이 있었다. 그때는 젊은 스님이 계셨다.
오늘 만난 원통암 스님은 칠불사의 운상선원 선원장을 맡고 계시는 진현(眞玄) 스님이었다. 여름과 겨울에는 선원에 계시고, 봄과 가을에는 이곳 암자에서 생활하신다고 했다. 다실에 전에 보지 못했던 ‘隨處作主’(수처작주)라는 족자 글씨가 걸려있었다. 중국 당나라 혜조선사인 임제 의현의 설법으로, 그의 어록인 『임제록』에 나온다. 서 있는 곳 모두가 바로 진여라는 뜻으로 주체적인 삶을 강조한 말이다. 진현스님과 잘 아는 모 서예가께서 이 방에서 바로 써주신 글이라고 했다. 족자의 ‘노옹선사’(老翁禪師)는 진현 스님 자신을 일컫는다고 했다.
칠불사를 복원하신 통광스님의 둘째 상좌인 진현 스님은 원통암을 복원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하셨다고 했다. 은사 스님인 통광스님은 원통암 아래 의신마을 우 씨 문중 출신으로, 탄허스님 강맥을 이어 받았으며, 쌍계사 강주와 주지, 조계종 역경위원장 등을 역임하셨다. 2013년에 입적하셨다. 원통암에 들어서면 보이는 입간판 ‘원통암과 서산대사’의 문장도 진현스님께서 직접 작성하셨다고 했다. 속세 나이로 60대 중후반은 되셨을 것 같았다. 칠불사로 출가하시기 전에 부산에서 직장생활을 하셨다고 했다.
진현스님으로부터 여러 좋은 말씀을 듣다 절 마당으로 나오니 안개에 가려 멀리 백운산은 조망되지 않고 파래봉만 어렴풋이 보였다. 진현스님과 작별인사를 하곤 마을로 내려와 화개 인근 순두부집으로 가 보우스님과 점심을 먹었다. 식사를 마친 후 스님과 식당 인근에 있는 커피집 호모루덴스로 가 커피를 한 잔씩 마시다 아래층에 내려갔다.
오는 15일 이 아래층에서 목압서사 한시연구회 주최의 ‘제1회 한시 읊기 대회’를 갖는다. 보우스님이 행사 3부에 특별출연을 하시어 한시 4편을 읊어주시기로 돼 있기 때문이었다. 스님은 한시를 잘 읊을뿐더러 직접 한시를 짓고 글씨를 써 병풍을 만드시기도 한다. 커피를 다 마신 후 필자의 집으로 와 녹차를 마시다 스님은 부산으로 출발하셨다. 시집을 3권이나 낸 시인이기도 한 보우스님은 부산 감천문화마을에 있는 적멸보궁인 관음정사 주지로 계신다.
스님이 부산으로 가시고 잠시 쉬고 있는데, 모암마을에 사시는 김필곤 선생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필자의 서재를 구경하고 싶다고 하시며, 소장하고 계시는 고서 2권을 휴대폰 사진으로 보내셨다. 전화를 드려 모시러 가겠다고 했다. 바깥에는 비가 소나기로 내리고 있었다. 모시고 집으로 왔다. 고서를 들고 오셨다. 한 책은 1800년대 필사한 필사본이며, 다른 책은 목활자본이었다. 고서를 일별하며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김 선생님은 시인이시며, 이 화개골의 모암마을이 고향이다. 일전에 선생님 댁에 가서 차를 얻어 마신 적이 있었다.
부산의 집이 이제야 정리되어 필자는 오는 20일 이곳으로 완전 이사를 한다. 현재는 필자가 보는 책들만 가져다 놓은 상태여서 서재라고 말하기에는 부끄러웠다. 오는 15일 ‘한시 읊기 대회’에 대한 말씀도 드렸다. 한시연구회 회원 6명이 1부에서는 다른 문사들이 지은 기존의 한시를, 2부에서는 자작한 한시를 각각 읊을 예정이다.
그러자 김 선생님은 예전에 목압마을에 서당이 있었다고 했다. 당시 훈장 선생님은 전남 광양 출신으로 남해 어느 사찰에서 주지를 지낸 적도 있는 창애(蒼崖) 강한식(姜漢植)이란 분이라고 했다. 1959년부터 1963년까지 손자를 데리고 와 서당을 운영하셨는데, 그 무렵 그 분의 연세가 여든쯤이었다고 하셨다. 화개에 중학교가 없어 김필곤 선생님이 ‘복오리서당’(목오리를 이곳 주민들은 복오리로 잘못 부르고 있음)으로 불린 그 서당에서 공부를 하셨다고 했다. 학동은 10명가량이었다. 서당에서 소학까지 배우고, 논어를 조금 배우다 그만두셨다고 했다. 당시 고등공민학교가 생기는 바람에 그와 연관되어 서당이 없어졌다고 했다. 용강마을에도 서당이 있었다고 말씀하셨다.
창밖에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고, 밤 11시를 조금 넘기고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깥에는 화개동천의 물소리가 우렁찼다. 오랜만에 제대로 들어보는 화개동천의 기분 좋은 소리였다. 지리산 화개골에는 수많은 도사(?)들이 산다는 말이 실감나는 하루였다.
다음은 계곡의 물소리를 듣고 지은 필자의 졸시이다.
화개동천의 물소리를 들으며
저기 겹겹의 산들도 귀 기울이고 있었다 섬진강으로 흘러가는 화개동천의 웃는 듯한 물소리 난해 너무 가물어 마르다시피한 계곡 그렇지, 산들도 어쩌지 못해 마음만 졸였지 동천이 말라 상처투성이였을 정도였으니 이 골짝에서는 누구든 한가롭게 살지 못하였다 소낙비처럼 퍼붓는 삼월 초순의 하늘 냉해까지 입어 버쩍 말라버린 차나무도 물 없어 키 더 자라지 못한 산죽도 오랜만에 살아있음에 감격해하며 이 깊은 밤에 이죽이죽 웃고 있을 게다 그래, 삶이란 견디며 살고볼 일이지.
<역사·고전인문학자, 교육학 박사>
저작권자 ⓒ 인저리타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