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시장을 세 번이나 연임했던 피오렐라 라과디아는, 1930년대 초 대공황 시기에 잠시 뉴욕시 치안판사로 재판을 하였다. 그는 배가 고파 빵을 훔친 어느 노파에게 10달러의 벌금형을 선고했다. 이어 그는 이렇게 말했다.
“배고픈 사람이 거리를 헤매고 있는데 나는 그동안 너무 좋은 음식을 배불리 먹었습니다. 이 도시 시민 모두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 자신에게 10달러의 벌금형을 선고하며, 방청객 모두에게 각각 50센트 벌금형을 선고합니다.”
방청객들은 순순히 벌금을 냈고, 라과디아는 이렇게 걷은 57달러 50센트를 노인에게 줬으며, 노인은 10달러의 벌금을 낸 후 47달러 50센트를 갖고 법정을 떠났다. -조국/디케의 눈물-
법은 강자와 부자의 무기만은 아니다. 이처럼 약자와 빈자의 방패로 이용하는 법조인들도 많다. 문제는 ‘법치’를 ‘법의 지배’(rule of law)가 아니라, ‘법에 의한 통치’(rule by law)로 왜곡하여 법을 오·남용한다는 것이다.
법무부는 세칭 ‘검수완박법’이라고 불리는 검찰 직접수사권 축소 법률에 대해 헌법재판소에 권한쟁의심판을 청구했다. 그 청구서에 “법치주의는 법에 의한(rule by law) 통치를 의미하는 개념”이라고 밝혔다. 과거 권위주의 또는 군사독재 정권도 자신들의 ‘법치’가 ‘법에 의한 통치’ 또는 ‘법을 이용한 지배’라고 말하지 않았는데, 윤석열 정부는 노골적으로 이를 표명한 것이다.
‘법치’가 ‘법에 의한 통치’나 ‘법을 이용한 지배’가 될 때, 법은 법의 외피를 쓴 폭력이 된다. 곧, 법치는 국가권력이 “법대로 테러”(노동자 시인 백무산의 시 구절)하는 것에 불과하게 되는 것이다. 헌법재판소는 위 권한쟁의심판에서 당사자적격이 없고, 권한침해 가능성이 없어 부적법하다고 각하했다.
법치가 법의 지배가 아니라 법에 의한 통치라는 마인드의 검찰이 직접수사권을 가지면 어떤 결과를 낳을까?
검사는 객관의무를 갖는다. 공익의 대표자로서 진실과 정의의 원칙에 따라 검찰권을 객관적으로 행사할 의무를 지는 것이다. 따라서 범죄 혐의를 받는 피의자의 억울함을 밝혀줄 의무도 갖는다. 예컨대 경찰이 잘못 수사했다면, 기소권을 가진 검찰이 보완 수사를 하게 하든, 혐의 없음 처분을 내리든 할 수 있다.
보통 형사부 검사는 경찰이 수사한 내용을 바탕으로 기소 여부를 따지기 때문에 제삼자의 입장에서 보고, 증거가 확실하면 기소한다. 하지만 수사권과 기소권을 다 가지고 있는 반부패수사부(2019년 10월 특별수사부에서 반부패수사부로 명칭이 변경됐다)는 본인들이 수사를 했기 때문에 어떻게든 끝장을 보아야 한다. 만약 증거를 잡지 못해 수사를 종결하면, 자신들의 무능력을 드러내는 꼴이 뿐 아니라 인사고과에서도 불이익을 받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와 조직이기주의가 결합해 ‘검사 무오류주의’란 독버섯이 자라났다. 임은정 검사는 2012년 9월, 민청학련 사건으로 15년을 선고 받았던 박형규 목사의 재심 공판에서 무죄를 구형했다. 당시 검찰 상부에서는 백지구형을 지시했다. 백지구형이란, 검찰의 할 일을 포기하고 판사에게 형량을 일임하는 것이다.
곧, 판사에게 “법과 원칙에 따라 선고해 달라”는 의견을 내는 것이다. 관행이라고 합리화하지만, 엄격히 말해서 검찰권의 포기이자 검찰 고유 권한의 불이행이다. 당시 부장 검사는 “무죄 구형은 검찰의 잘못을 스스로 시인하는 것이 되니, 하지 말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한데도 임 검사는 지시를 거부하고 무죄를 구형한 것이다.
이후 임 검사는 조직의 배신자로 낙인 찍혀 뭇 고초를 겪었다. 그러나 꿋꿋이 ‘계속 가보겠습니다’라며 건재하다. 여장부다. 임은정 검사 같은 검사다운 검사가 있기에 검찰에 한 가닥 신뢰를 주는 것이리라.
검찰의 직접수사권의 악폐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검찰의 수사는 기업, 조세, 금융, 부패 범죄 등 범죄성이 분명한 비리를 넘어, 정치적·정책적 판단 영역과 시민사회의 관행 영역까지 들어가고 있다. 남북관계에 대한 고도의 정치적 판단, 장관의 인사권 행사, 이전 정부의 대선 공약이었던 에너지 전환 정책(세칭 ‘탈원전 정책’)도 수사 대상으로 삼는다. 또한 시민사회에서 관행적으로 통용되었던 행위에 대해서도 수사의 칼날을 들이댄다.
그 결과 권력의 입맛에 맞지 않은 어떤 정치적·정책적 행위에 대해서 수사의 칼날을 휘두르며 검찰은 위세를 떨칠 수 있다. 그러나 정치·정책·시민사회 영역은 급격히 위축된다. 자신의 결정과 행동이 사후에 언제든지 검찰 수사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는 가히 대한‘검’국(大韓‘檢’國)으로 부를 만하다. 큰 뉴스는 거의 검찰발이다. 객관의무에 따라 억울함을 풀어주는 뉴스는 없다. 대개 거악과의 싸움이다. 대한민국에 거악이 그렇게나 ‘천지삐깔’인가.
검찰의 직접수사권은 박탈해야 마땅하다. 조만간 박탈될 것으로 예측한다. 권불십년이라고 했던가. 십년이 아니라 몇 십 년 누렸으면, 찼던 달이 이울 때도 됐지 않은가. 후인들이 따라가기에는 찍어온 발자국이 너무 어지럽다.
그러나 검찰의 직접수사권은 법적 권한이다. 직접수사권의 오·남용은, 객관의무를 일탈한 개개 검사의 잘못인가 법의 잘못인가. 검찰 외에도 검찰의 직접수사권을 옹호하는 세력도 많지 않은가!
“소가 수레를 끄는데, 수레가 가지 않으면, 수레를 때려야 옳은가, 소를 때려야 옳은가?”(“牛駕車 車若不行 打車卽是 打牛卽是”/『書狀』)
*이 글은 조국의 『디케의 눈물』(2023.9.11.)과 송영길의 『송영길의 선전포고』(2023.10.30.)에 크게 힘입었음을 밝힙니다.
<작가/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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