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잤다던데, 애가 생기면 어쩌려고….” 중3 때, 우연히 엿들은 아지매들의 이 말을 도대체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시골 남녀공학 중학교였다. 그 당시에도 조숙한(?) 친구들은 남녀 학생이 어울려 수업을 땡땡이치기도 했다. 다음날 결석까지 하기도 했다. 막 소문이 돌았다. 그러나 ‘같이 잔다=애가 생긴다’는 방정식은 중3으로서는 풀 수 없는 3차 방정식이었다.
50여 년 전의 기억을 억지스레 소환해 보면, 이 땡땡이 남학생들이 ‘꼰대’라는 단어를 쓴 것 같다. 대다수의 중3다운 중3의 사전에는 꼰대라는 단어가 없었다. 이 사실은 고3 때까지 마찬가지였다. 꼰대라는 단어가 필요 없었기 때문이다. 왜?
지금 언어생활에서 꼰대라는 단어에는 부정적 이미지가 짙다. 권위주의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윗사람이나 연장자를 비하하는 멸칭으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흔히 꼰대들은 ‘라떼는 말이야’란 말을 사용한다고 비아냥댄다. 곧, ‘세상 참 많이 좋아졌어. 나 때는 말이야 …….’
꼰대의 사전적 정의는 ‘할아버지, 아버지, 선생의 변말’이다(한국학회/우리말 큰사전). 변말은 ‘남이 모르게 저희끼리만 암호처럼 쓰는 말’이다. 그러므로 은어(隱語)와는 다소 의미가 다르다. 은어는 ‘특수한 집단이나 계층에서 남이 알아듣지 못하도록 자기네끼리만 쓰는 말’이다. 꼰대는 ‘일부 학생들의 변말’이었지, ‘깡패들의 은어’는 아니었다.
60,70년대 중고생 시절, 꼰대라는 단어의 이미지는 ‘비하’가 아니라, ‘불평과 두려움’이었던 듯하다. 근엄한 할아버지와 아버지, 도덕군자 같은 깐깐한 선생님은 학생들의 ‘불량기’에 간섭하거나 제재를 가했다. 대부분의 평범한 학생들은 굳이 제재 받을 정도의 일탈은 없었다.
간섭이나 제재하는 아버지와 선생님을 그냥 아버지와 선생님이라고 부르면 성이 차지 않는다. 하여 불평과 두려움을 섞어 그들을 ‘꼰대’라 호칭했다. 꼰대라 별칭하면서도 귀책사유는 자신에게 있다는 걸 암암리에 인정하고 들어갔다. 그러므로 ‘꼰대’에는 비하의 의미가 없었고, 제한된 학생들만 그 단어를 사용했고, 평범한 학생들은 그 용어를 쓸 이유 자체가 없었다.
말(단어)은 모든 생명과 마찬가지로 ‘탄생-성장-소멸’한다. 성장과정에서 그 뜻이 확장되거나 전와(轉訛·어떤 말이 본디의 뜻과 달리 전해져 굳어짐)한다. 한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 어제의 강물을 이미 흘러가버렸다. 오늘 들어가는 강물은 새 강물이다. 이처럼 어제의 꼰대는 오늘의 꼰대가 아니다.
한데도 50여 년 전 중고생 시절의 꼰대의 의미로 아직도 현대의 꼰대를 해석하고 있으면, 그는 곧 꼰대가 된다. 이미 꼰대의 의미가 확장·전와하여, 과거의 자기 방식이나 가치관을 강요하는 사람을 좀 경멸스럽게 부르는 단어가 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과거라는 딱지를 붙여 원칙까지 버리는 것은 아닐까? 과거의 가치관을 대체할 현재의 가치관이 과연 더 향상된 삶에 기여한다는 보증은 있는 것일까? 생각해 볼 문제이다.
사람은 부모보다 시대에 더 영향을 받는다. 스마트폰으로 검색하고, GPT-4를 활용한다고 해서 과거보다 더 현명하게 사는 것은 아니다. 그냥 후발주자의 이점을 누리는 것일 뿐이다. 아무리 많은 정보에 접근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비판적 사고’가 멈추는 순간 꼰대가 됨을 면치 못한다.
꼰대의 대표적 징표가 ‘거짓 딜레마’(false dilemma·흑백논리)이다. 이에 대해 다음 글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계속>
<작가/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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