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송원 칼럼】 ‘꼰대’와 거짓 딜레마와 뉘앙스 ②거짓 딜레마

조송원 기자 승인 2023.12.05 13:04 | 최종 수정 2023.12.08 10:26 의견 0
이용우 화백
[그림 = 이용우 화백]

#1.견문이 적은 사람은 백로를 기준으로 까마귀를 비웃고(所見小者 以鷺嗤烏)

오리를 기준으로 학을 위태롭다고 생각한다(以鳧危鶴) -연암집/권7/종북소선-

#2.어느 날, 할아버지는 나를 장벽에 데려가 말했다.

“너도 알다시피, 이 장벽 안에는 우리 유크족이 살고, 장벽 너머에는 주크족이 산단다. 이제 너도 주크족이 저지르는 끔찍한 짓을 알 때가 되었다. 주크족들의 집과 마을에선 모두가 버터를 빵 아래에 바르지.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우리 유크족은 버터를 빵 위에 바른단다. 그리고 그것만이 올바른 방법이란다.”

할아버지는 이를 갈았다. “그러니 빵 아래에 버터를 바르는 주크족을 믿지 말고, 주크족을 감시해야 한단다. 그들은 영혼이 뒤틀린 자들이니까!”

-닥터 수스의 동화 『버터 전쟁 책(The Butter War Book)』(1989)-

버터 전쟁 책

#3.자공이 말했다. “관중은 인자(仁者)가 아닐 것입니다. 환공이 형제인 공자(公子) 규를 죽였을 때, 자기가 받들던 규를 따라 죽지 않고, 도리어 적인 환공을 도왔기 때문입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관중은 환공을 도와 제후를 제패하고, 천하를 하나로 바로잡았다. 민중은 지금까지 그 은사(恩賜)를 받았으니, 관중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머리를 풀고 옷깃을 왼쪽으로 여미었을 것이다.

어찌 필부들이 작은 신의를 지켜, 스스로 개천에서 목을 매어도 알아주지 않는 것과 같겠느냐?” -논어/헌문18-

 

거짓 딜레마(false dilemma) 혹은 거짓 이분법(false dichotomy)이란, 어떤 문제 상황에서 제3의 선택지가 존재함에도 이를 묵살하고 2개 선택지만 있는 것처럼, 이른바 ‘잘못된 흑백논리’로 상대에게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흔히 쓰는 흑백논리와는 좀 다르다. ‘타당한 흑백논리’도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x+2=5의 해는 x=3이다. 참인가, 거짓인가? 이 물음에는 제3의 선택지가 없고, 참·거짓 두 개뿐이다. 따라서 ‘잘못된 흑백논리’만을 거짓 딜레마라고 한다.

‘선과 악’, ‘내 편과 네 편’, 옳음과 그름‘, ’강자와 약자‘, 도덕과 부도덕’, ‘유죄와 무죄’, ‘거짓과 진실’, ‘사랑과 미움’, ‘음과 양’,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 등 두 가지로만 나누어 판단하는 관점이다.

우리 두뇌는 ‘경제원칙’을 철저히 준수한다. 곧, 최소 비용과 노력을 들여 최대 만족과 결과를 얻으려 한다. 쉽게 말해, 게으르고 약삭빠르다. 가능한 한 에너지가 드는 ‘머리 쓰는 일’은 하지 않으려 한다.

그런데 세상과 세상사는 간단하지 않다. 이 복잡한 현실에 적응해야 한다. 비용과 노력을 최소한으로 줄이면서도, 곧 게으름을 피우면서도 잘 살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있다. 그냥 남들 따라서 ‘거짓 딜레마’(잘못된 흑백논리)를 판단의 푯대로 삼으면 된다.

배고픈 여우가 포도를 발견했다. 높은 나무에 매달려 있다. 폴짝 뛰어도 보고 나무를 타고 올라가 봐도 도저히 포도까지 닿을 수가 없다. 결국 여우는, “어차피 저 포도는 시어서 먹을 수 없을 거야”라고 포기하면서 ‘정신승리’를 한다.(이솝 우화/신 포도)

쉽고 간단한 분류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는 것은 우리의 본성에 가깝다. 그러나 세상에는 이 분류에 잡히지 않는 부분이 훨씬 더 많다. 그러므로 진실을 알기 위해선 ‘팩트 체크’가 필요하다. 한데 이 작업에는 만만찮은 두뇌의 수고가 필요하다. 수고와 게으름은 양립불가능하다. 딜레마다. 이 딜레마 극복 방법은?

분류할 수 없는 회색까지 흰색이나 검은색 상자 안에 집어넣어, 회색을 없애고 흰색과 검은색 두 개만 남기는 것이다. 곧, 편(소속)을 선명히 정리하는 것이다. 낯선 것이나 내키지 않는 주장은 ‘그름’ 혹은 ‘네 편’, 친숙한 것이나 끌리는 것은 ‘옳음’ 혹은 ‘내 편’ 등으로 말이다.

#2에서 버터를 빵 아래에 바르든 위에 바르든 뭔 차이인가! 그러나 할아버지는 빵 아래에 버터를 바르는 주크족은 ‘영혼이 뒤틀린 자’라며 이를 간다. 단순히 동화에 불과한 이야기일 뿐일까?

#3에서 공자는 ‘문명/야만’의 표지(標識)로 ‘우임/좌임’을 든다. 우임(右衽)은 옷깃을 오른쪽으로 여미는 것을 말한다. 중국 복식의 특징이다. 좌임(左袵)은 옷깃을 왼쪽으로 여미는 것이다. 북방민족 복식의 특징이다. 오른쪽 왼쪽, 이게 무슨 대수인가!

시대적 한계를 인정해야 하고, 사상과 교육면에서 성인다운 업적은 인정한다. 그러나 공자 역시 화이론(華夷論)으로 무장한, 지독한 자민족중심주의자(自民族中心主義者·ethnocentrist)이며, ‘거짓 딜레마’에서 자유롭지 못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컴퓨터와 인터넷은 두고라도, 스마트폰이 생필품이 된 지 얼마나 되었나? 얼마지 않아 AI 탑재 기기가 스마트폰처럼 일반화할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표면적 변화에 불과하다. 더불어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포함한 우리 삶의 모든 환경과 가치관의 심층적 변화도 도도해질 것이다. 현대의 1년은 가히 중세의 100년에 필적한다.

그 변화를 감당하고, 주체적 삶을 살기 위해선 두뇌수고를 감수해야 한다. 감수하며 그 두뇌수고 자체를 ‘즐기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게으르면서도 태평하게 사는 사람도 있다. ‘거짓 딜레마’(잘못된 흑백논리)를 푯대 삼아, 매사를 내 편/네 편, 좋음/나쁨 등으로 명쾌하게 일도양단하여, ‘정신승리’하며 사는 사람이다.

즐기는 사람과 정신승리하며 사는 사람을 양극단으로 하는 스펙트럼, 그 어딘가에 우리는 위치할 것이다. 어느 쪽으로 기욺이 더 바람직스러울까? 모른다. 알 필요도 없다. 삶은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이 각자 제 몫을 선택하고, 그 선택에 책임을 지는 과정이니까.

<작가/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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