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질녘 낙동강 삼락공원의 텅빈 산책로에 강아지 한 마리. 누굴 찾아 저리 종종걸음일까?
지천명이 넘어서까지 누구를, 무엇을 한 번도 기다려본 일이 없는 사람은 없으리라. 확실한 기억도 가물가물해질테지만 아마 친구나 연인도 기다려보았을 것이고 입사합격 통보도 애타게 기다려보았으리라. 언젠가부터는 객지의 아이들이 가끔 걸려오는 안부전화에 울컥 목이 메이고, 기다림에 지쳐가기도 전에 두 아이와의 단체 채팅카톡에 조심스럽게 먼저 '문안' 인사를 하기도 한다(낀세대인 나는 시어른 다 모시고 이제는 자식 안부가 궁금해서 눈치를 본다).
시대에 따라 살아야 한다지만 TV프로에는 ‘며느리 모시기’ 프로그램까지 보인다. 격세지감을 느끼는 순간순간에 자주 강해야 살겠구나 싶을 만큼 그 무엇에 대한 그리움도 기다림도 허망하다는 것을 알아가고 혼자 왔다가 혼자 가야 하기에 외로워 말자고 일거리를 찾아서 헤매고 책속에서 위안을 찾아야겠다고 다짐한다.
빈집
가족이 울타리라는 말은 눈물겹다
명절 지내고 타지로 떠나는 뒷모습들이
저녁 풍경으로는 어울리지 않는
늦은 밤, 마지막 작은 아들도
슬그머니 가방을 들고 일어선다
전남 충남 울산 부산 식구 넷이서
갈 곳이 제 각각인 도시 하나씩 차지한
울타리의 반경은 넓다
막내아들이 현관을 나서며 홀로
남겨질 엄마의 등을 보듬는다
엄마 또 올게요
그래, 조심해서 다녀라
명치끝에 남는 예리한 통증
떠난다는 것과 보낸다는 거
홀로 남은 빈집에
비 내리는 소리 듣는다.
봄이 가는가 싶었는데 어느새 유월의 마지막 날이다
머지않아 집 앞 느티나무에서도 매미가 극성스레 울리라
시골에는 개구리 합창이 한창일지도 모르고
들녘에는 밀과 보리가 누렇게 익어가고 있으리라
가뭄을 도시에는 피부로 느껴지지 않지만
시골에서는 심각하다는 뉴스를 접하고 날마다 작열하는
태양아래 농작물들이 어떨지 걱정이 된다.
스무 다섯 살 철없을 때 나는 시집을 갔다. 결혼식에 참석하여 사진에 찍힌 19명의 친구 중에결혼한 친구는 한 명도 없었고 내가 처음이었던 것 같다. 무엇이 그리 일찍 가야 했던지 지금 생각해도 의아스럽지만 나는 결혼은 행복의 시작이라고 생각했던 무지랭이였고 남편은 언제나 내편이고 나만 챙기고 배려해 줄 것이라고 믿었었다.
요즘의 청춘들은 다 알고 있을 지식들을 깡그리 몰랐던 나는 남편도 없는 시집살이를 몇 년 동안 했었다. 자주 시누이님들의 어린 조카들은 (첫돌이 갓 지난) 새댁인 외숙모였던 나와 함께 했었다. 가난한 촌년일 뿐 전문직은 고사하고 시집살이 하는 조건으로 결혼을 했던 것 같다. 무엇보다도 아버지 자리가 부재했던 나는 시아버지를 모실 수 있다는 게 너무 좋았고 남편의 왕구라를 그대로 믿었고 나는 전화기도 없었던 가난한 친정집을 살아서 나오는 길은 결혼이 최선일거라고 생각을 했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은 무식이라고 어느 책에서 읽었던가? 내가 사회생활에 무식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렇지만 어떻게 보면 순수했고 순진하기 그지없었다. 사람들은 다 책임감이 있으며 약속을 안 지키고 거짓말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을 특히 남자가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진짜 몰랐다. 자랑 같지만 나는 어릴 때부터 타의 모범이라는 학교에서 받은 상장에서 처럼 살았기에 거짓말을 한 기억이나 타인에게 피해를 준 적은 더더욱 없으며 사기 같은 건 주위에서 들은 적도 없었다.
딸만 여섯 자매인 친정이라 자라면서 엄마한테 경상도말로 ‘가시나야’ 소리를 들어본 적 없고 어릴 때 바로 위의 언니와 말싸움 기억은 있지만 회초리 맞은 적은 없다. 선생님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딱 한번 중학교 3학년 때 벌 청소를 한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반 실장이었을 때 친구를 옹호하다 건방지다고 받은 벌이었다). 참 바보스럽게도 누구나 다 평범한 일상인 줄만 알았던 거 같다.
미안해, 엄마
왜 저 같은 걸 낳으셨어요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던
하얗게 질린 얼굴
내 청춘의 신열은 뜨겁고 혹독해서
자주 저편 세상을 꿈꾸었다.
남자라곤 한명도 없었던 우리 집이 이사를 하는 어느 해였던가. 엄마가 하시는 말을 들은 기억이 생각난다. 여자 천 명을 두들겨 부셔도 남자 눈알하나 못 만든다더니... 힘든 가재도구들을 번쩍 드는 아빠나 아들이 얼마나 부러웠으면 혼자말로 그랬을까 싶지만 그것도 어쩜 내게는 상처였는지도 모른다. 다행히 나는 손위 시누이 세 명에 외동인 남편과 결혼해서 아들만 두 명이다. 남들은 딸이 좋다고 하지만 내게는 아들이 태어나서 내 상처에 치유의 효과를 준 건만은 사실이다. 그것으로 나는 효도를 다 받았다고 스스로 위로 한다 아들들만 건강하고 행복하다면 그 무엇도 상관이 없지 않은가.
나의 시집살이의 아픔은 내게서 生의 가장 긴 암흑으로 다가왔었다. 그 시절의 상처는 지금 생각하면 사소하고 작았을지는 모르지만 고집과 자존심이 센 나는 견딜 수 없을 만큼 힘들었던 것 같다. 그러다 자식들이 태어났고 나는 그 아이들에게 혼신을 다 했었다. 여느 전업주부들도 마찬가지였을 지도 모르지만 참 어리석은 집착으로 내 보상심리를 모두 아이들에게 퍼부었다. 그러다 간경화, 치매를 앓았었던 시어른들의 병 구환을 교대로 6, 7년을 넘게 혼자 했었고 다 돌아가신 후에도 아이들이 대학을 갈 때까지 나는 사회생활을 할 수 없었다.
중학교 때 부터 좋아했던 시를 배운다는 건 알지도 못했지만 집에는 내가 쓴 대학노트 넋두리 일기장이 50권이 넘는 장서가 되다시피 했다. 나는 날마다 일기를 쓰고 찢고를 반복했었다. 어느 해였던가. 일간신문 독자코너에 詩라고 보낸 게 실린 적이 있었지만 그때도 나는 패쇄적이어서 문학의 길을 몰랐다. 그 시절 동네의 책 나눔터가 유행이다 싶은 만큼 많았기에 대여한 책을 많이 읽었고 틈틈이 시집을 사러 서면을 나갔다. 그러다 만학으로 대학원을 몇 학기하면서 너무 늦었다는 생각을 했고 그리고 무엇보다 별 실력 없이 보여지는 거, 프로필을 위한 거라면 아니다 싶어 휴학을 했다. 이제야 스스로에게 학위를 줄 수 있을 만큼 비로소 성숙해 있었다.
그렇게 평범하게 살아가면서 가족에게 혹은 타인에게 진실이 있다고 믿었던 나는 믿음에 철저히 배신을 당하는 일에 부딪혔고 스스로 ‘진실의 영원한 부재’ 란에 도장을 꾹 눌러 찍었다.
이제는 분신이었던 아이들이 다 자라 떠나고 자식이지만 내가 보고 싶다고 말하면 부담스러워한다는 것을 아는 나는 체념 아닌 체념을 다시 배운다.
이제 더는 무엇이든 기다리면 안 된다고
영원한 내 것은 누구든 무엇이든 존재하지 않으므로, 그러나
기다림
그리움
그 얼마나 아름다운 문학적인 언어였던가.
나이가 내게 그리워도 말고 기다리지도 말아야 된다고 하고 있다.
그런데 요즘 내게 기다림과 그리운 존재가 새로이 생겼다.
비다. 소낙비 그리고 장맛비다.
자주 바다를 만나고
가뭄 속에서 장대같이 내릴 비를 기다려본다.
가난한 詩
사랑, 이별, 가난
고뇌, 슬픔
이런 걸 사랑했다. 너는
책갈피에 끼워둔 네잎 크로바
코스모스 꽃잎처럼
애틋하고 소중한 그 무엇이
연둣빛 새순으로 움트는
내 여린 시어는
작은 풀꽃의 미소 같이
비굴하지 않을 만큼만 빛나기를
그것이 맑은 슬픔이란말로
아픔도 서정이 되었다
너는 어쩔 수 없이
가난한 내 애인이었다.
혹자는 시인의 가난은 자발적이라고들 하지만
나는 가난하다
아니, 가난했었다 그러나
가난속에는 아픔만큼의 아름다움이 착함이 있었던 거
가난은 오만하지 않는 배려와 연민과 그리고
배부르면 가질 수 없는 게 나의 문학이다
그 배고픔이 그리움이든 기다림이든
어제는 비가 내렸다 나는 비속에서 보헤미안이 되고 싶었다
자주 다니던 길이 불빛아래 어찌나 이국적이든지 길 옆 찻집에서 커피 한잔
시켜놓고 맞은 편 OB생맥주집을 보며 맥주를 마실까 하다가
아서라 용기 없는 나란 존재의 비굴함
아직도 그대, 일탈이 그리운가
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 언제까지 쓸쓸해질까
궁금하지만 아름답지 않은가
어제 내린 비에 태산목꽃, 유도화, 능소화가
다 진다해도 미친 듯 퍼붓는 장맛비가 하염없이 그립기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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