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시학 2호-신작시】 노점상 외 9편 - 최영순

장소시학 승인 2023.04.13 20:47 | 최종 수정 2023.04.13 21:10 의견 0

신작시

 

노점상 외 9편

최 영 순

 

보도블록
파라솔 우산 그늘 
대야에 소복이 얌전하다
할머니 
종이 박스에 써서 세워 놓았다
 
봉숭아 주무르지 마세요
영감 붕알이 아닙니다

얼굴에 화색이 돌고
입꼬리 올라가는 팔학년
여친이 발그스름한 복숭아 미소로 
엉금엉금 이층 계단을 오른다
둘이서 무슨 놀이할까.

 

시집 내면서

삶이 어리석어
팍팍하고 세련미가 없어
씻기고 닦고 요리조리 보고
최종 교정지 보냈다

보고 싶었던 책을 마산도서관에서 만나고
산호공원 예술의 동산에서 여유 부렸다
글자 보면 읽는 습관
시비 안내도 열네 편의 시비

공원 오르막길에서
천천히 가슴에 새겨보는데 
저만치 시비를 닦는다
높고 그늘지고 빗돌에 새겨
자세히 보아도 다 볼 수 없어
읽는 나와 닦는 그이가 아쉽다며
말문 트니 작가

내 시는 누구의 심장을 쿵쾅
찔러 줄까.

 

우포

걸으면 세 시간 자전거 타면 한 시간
커플 자전거로 
출발부터 약간 오르막
몸 따로 마음 따로 퍽퍽 
남편 바가지 밖에서도 줄줄 샜다
안 새는 아들 바가지로 호흡 박자 맞춰
바람 속을 가르며 
씽씽 두 바퀴로 만나는
어중중한 초록빛인데
왜가리 체온 조절 중이라며 한 발로 서 있고 
청둥오리 기러기는 저 멀리 콩알만 하다
물가 갈대는 
문드러진 속이 
언제 비었는지도 모르고
부러지지 않으려 곳곳에 마디를 두었다. 

 

씨앗

토닥토닥 
네 식구 늦은 저녁을 먹는다
엄마 손이 떨기 시작했다

다음날 시장 가신 엄마 오지 않았다
오렌지 능소화가 활짝 핀 담부랑에 
햇볕 쬐면서 아줌마들 도망 얘기 하셨다
남동생은 축구공 차고 노는데
엄마 찾아 달라 조르며
아버지 서면 서고 뒤만 졸졸 
다방 문 밀치고 들어가시니 
유리문 앞에서 기다렸다

그 여자는 
너거 아버지 씨앗이 
내 몸에 들어왔다고 했다

자주 다투고
몰래 눈물 훔치시는 엄마 
아버지가 너무 미워 
등지고 싶어 
공무원 꿈도 쫓기듯 접고

아무런 준비 없이 
친구 소개로 서울 남자한테 시집갔다. 

 

내게로 와서

봄 이고 허위허위 왔다
여섯 식구 
이 삼 일을 돌며 관찰하더니
이층 현관 옆에 한 쌍이 남아 
개울가 젖은 흙과 잡초 물어다 집 짓고
번갈아 알 품어 노란 주둥이 다섯
비와도 부지런히 먹잇감 나른다

한 달 쯤 
전기 줄에 먹이 물고 앉아 
주지 않고 
미끈한 몸매 곡선비행에
마주 보며 재재거리던 새끼들
날아라 조금 조금만 
더 더 더
밤에는 와서 자고 가끔씩 오고 
빙빙 돌다 오지 않는다
새소리만 나면 문 열고 내다보니 
나를 속였다 솟적솟적.

 

모르쇠가 아프다

발에 동테 달고
손톱 밑에 피가 나도록
돈 되는 일이라면 
물속 불속도 가리지 않았다

사십대에 남편이 암 선고 
아들 고 삼, 딸 중 삼학년
한 달 병원비 백만 원
아픈 사람이 
오징어회 낙지볶음 먹고 싶다는데 
어차피 보낼 사람 외면했다

지금도 시장가면  
고개가 저절로 돌아간다
보기 싫어.

 

오누이

크리스마스 놀이하다 
성냥불이 트리에 붙었을 때
뽀얀 피부에 수줍쟁이 엄마는
불이야
살려 주세요
소리치지 않았을까요
목욕탕에 들어가라 했어요
내복 입고 쪼르르 달려가 
귀 쫑긋 세우고 앉아 있었어요
뜨겁지는 않은데 
문틈으로 연기가 조금씩 들어와 어질어질
엎질러졌어요
엄마 아빠가 불렀지만 눈 뜰 수 없어
며칠 동안 잠자다
날개옷 괜찮아요
같이 라는 말이 좋아요
난 다섯 살 동생은 세 살 제가 지켜줄 거예요
별만큼 높이 올라가면 엄마 아빠는 더 잘 보이겠죠

뜨거운 건 무서워요
해님도 싫어요

꽁꽁 성냥불에 
손 녹이다
이제는 하늘나라 할머니 품에서
춥지도 배고프지도 않다는 언니
동생이랑 찾아 갈 거예요
밤마다 포릉 포르릉.

 

주방

알람 없이도 시작 여섯 시
실금 간 얼굴로 반겨 주는 조리대

가스레인지에 불 켜고 
서두르는 마음이 
뚜껑을 열었다 닫았다
뜸도 들기 전에 젓가락으로 찌르니
나를 버리지 마세요
상처 난 냄비 프라이팬 도마

성원식당 주방장 십 년에
음식 만들기 좋아하지만
몸에 좋은 것보다
나쁜 음식 안 먹는 게 최선이라며

눈대중으로 
군침 도는 겉절이 잠깐이면 뚝딱 
바글바글 끓이고 

자글자글 지지고
조물 무쳐 낸다 

넘 편은 언제쯤 척척 치댈 수 있을까
손대중으로.

 

흉년살이

농사는 하늘이 짓는다며
올해도 물랑가 못 물랑가

늪지대라 수해로 흉년이 들면
겨울에는 무밥 고구마로
쑥이 고개 내밀기 전에는
꽃다지 구슬쟁이 보리밥나물로 죽을 끓여 
조리에 받쳐 
건더기는 상에 올리고 
구 남매
시누이와 부엌에서 국물 마셨다며
돌아가신 어머님 속삭이셨다 

봄 하면 기억나는 것이 배고픔
풀뿌리 나무껍질에
평소 나물반찬이 연명 죽 되니
냉이 쑥 두릅은 귀한 양식
하도 고파 나물타령이 
보릿고개를 넘었다고 했다.

 

절골 수박

초록 보리 춤추던 골짝에
아기 수박이 이랑마다 밤낮으로 뒹굴었다
밭두둑에 원두막 지어 
바짓단 말아 올리며 고루고루 키우셨다

인건비만 주고 팔아서 장사 밑천 하라시며
일 톤 트럭으로 보내 주셨다
속을 알 수 없는 동글이

아버님 
수박도 암컷 숫컷이 있다
밑둥의 동그라미는 작아야 좋고
두드리면 
텅텅 통통 시원한 소리는 달디단 붉은색이고
퍽퍽 떡떡 줄무늬가 삐뚤빼뚤 엉덩이는 
맛없다 하셨다

대성 슈퍼마켓 
방과 후 석전초등학생 동글동글 집으로 가고
교육 끝나자 동네 할머니 아줌마 줄지어
수박 얼마미꺼
종일 들었다 놓았다 
힘듦에
종잣돈이 금고에서 넘쳐나는데 
셀 수 없었다.

 

최영순 시인

최영순 
시인. 함안 태생. 공동시집 『양파집』(2020)과 『문학고을』 신인작품상(2021)으로 문학 활동 시작함, 시집으로 『아라 홍연』(2022)이 있음. 
ms29241@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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