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시학 창간호-서평】 여섯 시인들의 어머니를 읽다 - 김영화 외 지음, 『양파집』

장소시학 승인 2023.01.18 14:09 | 최종 수정 2023.01.22 05:45 의견 0

여섯 시인들의 어머니를 읽다

- 김영화 외 지음, 『양파집』, 시와시학, 2020, 235쪽.

 

한경희 | 문학평론가·안동대 교수

 

1. 어머니를 위한 시간

공동시집 『양파집』 시인들은 모두 여성이다. 딸로 태어나 며느리나 아내, 그리고 어머니가 되었다. 어머니가 되었지만 어머니들에게도 그리운 어머니가 있는 법이다. 시인들이 기억하는 추억 속 어머니는 아련한 그리움이 되었다. 옛 어머니들은 가족을 책임지는 일에 몸을 아끼지 않았으니 그런 모습을 보고 자란 딸들도 어머니를 닮아 있다. 자식을 사랑하는 어머니를 그렸지만 시인들 역시 이미 그런 어머니가 되어 있다. 어머니라는 거울을 통해 딸들은 서로 닮은 구석을 만난다. 딸의 거울로서 어머니, 딸의 자리에서 어머니를 닮은 자신에 놀라거나 당황하는 기색이 없이 덤덤하게 어머니를 닮아 온 자신의 시간을 헤아린다.

옛 어머니들의 모습이 이 시집에 그대로 보인다. 자기 삶이 따로 없이 자식에게 한평생을 희생한 어머니들이 등장한다. 그동안 가족 안에서 어머니 역할은 제한적이었으나 페미니즘이라는 인식 확장으로 현실의 모성을 자연스럽게 이야기하게 되었다. 급기야 모성은 사회문화적으로 형성되거나 의도적으로 왜곡되기도 한다는 공감도 생겼다. 여성들에게 숭고한 모성을 강요하다보니 가정 안에서 어머니 헌신은 너무 당연한 것이었다. 어머니는 숭고한 대상이 되어야 했다. 어머니도 과정 속에서 태어나고 낯선 경험으로 하나씩 학습해 가면서 형성되는 것을 배제했던 것이다.  

어머니는 본능적으로 헌신적이며 희생을 위해 태어났다는 모성신화도 힘을 잃은 시대가 되었지만 시인들이 쓰고 있는 어머니들은 가부장 아래 헌신의 어머니로 그 신화 근처에 계셨던 분들이다. 비교적 젊은 어머니로 읽히는 돼지엄마 역시 큰 틀에서 별로 다르지 않다. 엄마의 욕망 실현이 솔직하게 드러날 뿐 헌신은 현재에도 이어지고 있다. 모성이 만들어졌다는 입장에 따르면 18세기말경 여성 역할이 가정 안에서 어머니로 제한되어 여지껏 이어진다고 한다. 오래된 풍속이기에 영향력은 현재도 발휘되는 중이다. 모성은 여성이면 타고나는 본성이 아니라 사회와 문화 그리고 정치 지형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모성은 하나의 감정이며 언제나 우발적이라고 하지만 옛 어머니들은 그 감정을 절제하고 조절했을 가능성이 크다.    

헌신의 시간을 통과해 온 어머니이지만 여섯 시인들은 어머니가 거룩해지기를 바라지 않는다. 어머니는 몸을 가진 인간이며 자식 옆에서 눈물, 콧물 감추며 감정을 절제했을 뿐이다. 그런데 모성과 자연을 일치시키고 모성을 타고나는 본성으로 간주하고 어머니에게 모성의 신성성을 강요한 시간이 길었다. 그래서 우리들의 어머니는 희생을 자기정체성으로 삼고 살았다. 여섯 시인들도 그런 어머니를 그리워하고 아파한다. 희생과 헌신의 세월을 살고 노년에 도착한 어머니들은 당신의 삶이 온통 혈족으로 채워져 있음을 자랑스러워한다. 그 혈족의 대표 상징은 아들이다. 당신의 자기부재는 온통 아들을 통해 확인되지만 늙은 어머니들은 차라리 든든하다.  

자식들은 어머니 몸을 터전으로 태어나고 어머니 희생을 먹고 자란다. 어떤 생명도 희생없이 자랄 수 없다. 어머니 희생은 숭고하지만 그렇다고 모성을 신성한 성전에 모시는 일은 곤란하다. 여섯 시인도 사랑하는 어머니를 성스러운 자리에 가두지 않는다. 그녀들은 어머니 희생을 일반화시켜 숭고한 모성이란 틀을 만들지 않았다. 이미 어머니의 삶을 살아내거나 살아가는 이들은 가부장제의 곤혹스런 시선을 알아차리고 있었다. 출산과 양육, 그리고 평생 가사노동 해온 노모를 바라보는 여성 시인들은 동병상련의 연민이 크다. 모성도 아이를 낳고 점점 구체화되는 어머니 되기 과정에 불과함을 몸으로 체험한 이야기를 펼쳐 본다. 

 

2. 자식들의 중심, 어머니 

김영화 작품 속 어머니는 자식들이 살아가는 중심이 되어 있지만 시적 표현 속에서 어머니를 부각시키지는 않는다. 의도적인 부각이 전혀 없이 아주 사소하게 스며든 어머니 묘사는 자식에게 어머니 존재가 어떻게 이해되는지 잘 보여 준다. 「원이오빠」에서 오빠를 보살피는 여동생들은 노모 마음을 헤아려 오빠에게 반찬을 해준다. “노모가 살아있는 동안” 반찬을 챙기기로 한 것이다. 딸들이 혼자 있는 오빠의 불편한 생활을 챙기는 것도 오빠를 아끼는 노모 마음을 헤아리고 있기 때문이다. 「정암교의 봄」에서 난장이 어머니가 딸기 농사로 생활의 여유를 찾으면서 난장이 아들도 생기를 찾아간다. 아들은 어머니라는 의지를 업고 자신과 진실하게 만난다.      

어머니의 흔들림 없는 의지를 그려낸 작품과는 달리 아버지는 매우 개인적인 기호에 집중되어 있다. 질긴 노계 고기맛을 특별히 즐긴 아버지 묘사는 개인의 독특한 입맛을 드러내는데 그친다. 자식이 응시하는 아버지 자리를 시에서는 침묵으로 던져놓았다. 가족관계가 과묵한 아버지보다는 살뜰하게 자식을 챙기는 어머니 중심으로 이어지는 것을 김영화는 무언으로 밝히는 중이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마지막을 지켜보며 챙기는데 시 「삼베」에서 보이듯 삼을 삼아 베를 짜 수의를 입혀 보내드린다. 수고스러운 어머니 인생은 남편과 자식이 더 부추기고 키우는 셈이다.   

 

젖 뗀 강아지 둘 에미 찾는 울음
새벽까지 이어지다 경운기 탈탈
아침을 연다 밥은 먹었는지 넘겼는지
사랑병원 앞마당에 세워놓고 오층 엄마 눈 맞춘 뒤
(중략)
삼천포 갯물에 손 담근 채 매운바람 시리게 맞아도
김치며 비린 찬 이따금 내려놓고 가는 작은 누이도
엄마 숨 붙어 있을 때까지만이라고
참 모질게도 마음을 먹는 것인데   

- 「원이 오빠」 부분   

 

「원이오빠」에서도 노모가 중심에 있다. 경운기 사고로 아버지가 죽고 요양원에 있는 노모를 매일 아침 만나러 가는 원이 오빠. 심한 노환으로 같이 살지 못해도 문안인사는 빠뜨리지 않는 아들이다. 혼자 사는 아들은 요양원에 있는 노모에게 매일 아침 인사한 뒤 밭으로 간다. 노모가 갖고 있던 아들에 대한 기대를 충분히 헤아리는 아들이 되어 있었다. 그 노모가 끔찍하게 아끼는 아들을 인정하는 여동생들은 오빠를 챙기며 노모 빈자리를 대신한다. 딸들은 어머니 마음을 헤아려 혼자 있는 오빠를 돌본다. 딸들은 어머니 손이 되어 어머니 마음이 가 있는 자리를 보살핀다.  

난쟁이 모자는 딸기농사를 지어 팔지만 낯가림이 심해서 딸기를 진열해 둔 공간을 벗어나지 못하고 맴돈다. 그러다가 아들은 그 낯가림과도 하나가 될 정도로 딸기 파는 일이 익숙해진다. 「정암교의 봄」에서 어머니가 스스로 딸기를 인생 선물로 만들자 아들은 딸기 파는 일을 통해 자신을 찾아낸다. 딸기를 매개로 난쟁이 모자는 봄다운 봄을 맞이하는데 그 한가운데 어머니가 계신다. 어머니 의지가 아들에게로 전해지면서 아들은 의욕을 찾는다. 

유년 추억을 호출할 때 가장 앞자리에 오는 어머니, 그리고 뒤따라오는 아버지, 아버지는 특별한 입맛에 초점을 두면서 세상 사람들 입맛과 아주 다른 입맛을 그렸지만 아버지 사랑을 직접 드러내지는 않았다. 아버지 과묵을 표현하기 위한 방편으로 보인다. 그런데 어머니 사랑은 곳곳에 스며 있어서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어머니는 손수 삼을 삼고 베를 짜서 아버지 수의도 짓고 무더운 한여름엔 그 남은 자락으로 자식들 삼베이불도 만들었다. 「삼베」에서 어머니는 아버지 마지막 길까지 챙긴다. 어머니라는 존재는 자식들은 물론이고 집안 온기가 되었던 것이다.

아버지 입맛은 「아버지와 노계」에서 단순한 것들이 오래 지속되면 갖는 깊이를 보여 준다. 아버지가 즐기던 닭고기 맛에는 단순하게 깊어진 오로지 그 한 가지 맛이 돋보인다. 진미를 느끼던 미감은 단순미에 시간이 보태져서 가능해졌다. 특별히 노계를 즐기던 아버지 입맛은 진짜 닭고기 맛을 즐길 줄 아는 미감이 되었다. 무엇이든 깊은 맛은 복잡하지 않고 단순해서 고유한 맛이 남아 있다. 특별한 양념없이 그저 마늘과 조선간장, 땡초에 고춧가루를 뿌리면 노계의 깊은 맛이 살아나는데 그 맛을 즐기던 아버지를 그리워한다. 

먹을 것이 귀하던 시절 부모님이 시장에 간다거나 장날이 다가온다거나 하면 아이들에게는 먹을 것이 생길 거란 기대가 솟는다. 「긴 오후에 기대어」에서 아이들은 먹는 일을 숨기지 않고 온몸으로 솔직하게 드러낸다. 밤을 새워야 하는 어머니의 힘든 노동은 뒤로 하고 다음 날이면 맛있는 것을 먹을 수 있다는 철없는 기대가 있었다. 어머니가 밤을 새워 솜틀로 누에고치를 깎아 공출을 가면 하루 종일 담벼락에 기대 어머니가 오기를 기다린다. 사실은 어머니가 아니라 박하사탕을 기다리는 중이다. 하루 종일 기다린 보람은 어긋난 적이 없어서 잠이 깨면 머리맡에 박하사탕이 놓여 있었다.

 

3. 아들을 믿는 고목, 어머니

박해숙 작품에 등장하는 어머니도 당신 홀몸으로 집안을 건사하고 온몸이 무너져 더이상 돌이킬 수 없을 때까지 살아낸 이 땅 헌신의 상징으로 등장한다. 거기다가 아들과 딸을 차별하고 집안 재산을 지키는 일은 당연히 아들 몫으로 여긴다. 그런 어머니를 그대로 사랑하는 딸 목소리가 더욱 울림이 있다. 「홰나무」의 어머니는 마을을 지키는 고목처럼 집안을 지켜온 역사가 되었다. 억척스럽게 삶을 꾸린 시간은 몸이 감당하지 못하는 데까지 이어진다. 생의 마지막 단계에 이른 어머니를 모시는 자식 목소리에는 애틋함과 미안함이 섞여 있다. 「아들과 딸 사이에서」의 노모는 엄밀하게 아들과 딸 사이에 있지 않고 아들에게 완전히 기울어져 있다. 아들자식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가졌던 옛 어머니들처럼 이 작품의 노모도 아들과 딸에 대한 구별심이 크다. 아들을 향한 믿음은 신념으로 굳어져 노모가 살아가는 힘이다.   

「홰나무」에는 홰나무가 나오지 않고 불면 날아갈 것 같은 엄마가 나온다. 비록 거동이 불편한 어머니이지만 딸에게 어머니는 동구 밖 당나무처럼 오래오래 그늘과 쉼터가 되는 존재이다. 드나드는 사람들이 쉬어가던 마을입구의 당나무였던 홰나무처럼 집안이 훤하게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은 어머니는 집안 홰나무가 되었다. 알아서 농사를 짓던 엄마가 더 이상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몸이 되어 아들네 거실 침상 위에 누웠다. 엄마 의지로 누웠다기보다는 노환이 엄마를 일어나지 못하게 했다. 큰방을 다니는 길목, 손녀 방, 욕실, 부엌살림이 훤하게 다 보이는 자리에 침상을 두고 누운 엄마는 거실에 자리를 잡기 전까지 골짜기에 있는 논까지 부치며 가을을 풍성하게 거두었다. 그러던 엄마가 모든 걸 내려놓은 것인데 화자는 노모의 자리보전을 아주 적극적으로 읽었다. 당신 의지인 양 “이제는 그만 할란다” 하고 노모가 의지로 내린 결단처럼 묘사한다. 노모 평생이 당신 의지대로 흘러온 것인 양 화자인 딸은 노모와 스스로를 함께 위로하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아들이라고 지가 한 게 뭔데
요양병원에 데려다나 놨지……
너그 오빠가 주고 싶어서 또옥 그래 사도
큰 아가 욕심이 많아서 안 그렇나
요번 가실하면
쌀하고 감 몇 박스 보내주라고 하꾸마
아들은 믿거라 하는 거뿐이지
딸이 났다
우리 망내이가
젤 잘 하구마  

- 「아들과 딸 사이에서」 부분

 

늙은 어머니는 아들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있다. 시 「아들과 딸 사이에서」 노모 목소리를 들어보자. “아들은 믿거라 하는 거뿐이지/딸이 났다/우리 망내이가/젤 잘 하구마” 아들에 대한 무한신뢰는 종교보다 깊고 거룩하다. 아니 노모에게 아들은 성스러운 종교가 된다. 귀여운 막내딸이 큰아들의 부족함을 아무리 쫑알거려도 노모의 귀에는 부드러운 봄바람처럼 들릴 뿐이다. 요양병원에 노모를 맡기고 집안 재산을 혼자서 다 차지한 큰 오빠를 두고 성토하는 막내딸에게 어머니는 절대 아들 흉을 보지 않는다. 아들은 두둔하고 며느리를 나무랄 뿐, “아들은 믿거라 하는 거 뿐이지”에서 알 수 있듯이 노모는 아들을 의지해서 살아있는 것이고 막내딸이 잘하는 것은 기분좋은 칭찬거리에 불과하다. 

 

4. 솔직해진 어머니의 시간

이영자는 “양파껍질 소리”가 나는 무릎(「양파집」)으로 마라톤 시를 13편이나 썼다. 마라톤 시는 마라톤에서 가능했다. 42.195킬로를 종주한 사건부터 종주를 못하고 구급차를 타거나 맨 꼴찌지만 완주한 이야기까지 다양하다. 그만큼 마라톤 시간이 오래되어 진정한 마라토너가 되어 있다는 증거이다. 이영자 작품에서 어머니가 중심에 등장하는 작품은 2편이 보인다. 「효자손」에는 어머니를 닮은 닳아버린 효자손이 나온다. 어머니 평생이 손에서 드러나는데 낡은 효자손 비유로 어머니 삶을 그린다. 우리 어머니들의 희생과 헌신적인 삶이 효자손으로 잘 드러나는 작품이다. 「언제 오냐」에는 늙은 어머니의 솔직한 심사가 그려진다. 자식을 위한 삶을 사는 일이 당신 인생 자체였던 어머니가 “앉혀 달라, 눕혀 달라” 속내를 드러내면 자식은 면전에서 시키는대로 하지만 마음 구석까지 흔쾌하지는 않다. 어머니 시중드는 일로 시간을 보내는 일이 무겁게 느껴지는 자식 마음을 솔직하게 드러냈다.   

 

작년 이사하며 쓰일 곳 없을 거라
트실트실 갈래진 끝 망설이다 버렸다
통돌이 바닥에 달라붙은 옷가지
미끼 없는 작대기 물지도 않는다

굽은 마디 손가락이 어느쪽이었는지
내 손보다 오래 잡은 
닳아버린 그 손
울 어머니 닮은 손 

- 「효자손」 부분

 

「효자손」에는 딸 손보다 효자손을 더 오래 잡았을 어머니가 등장한다. 효자손이 등 긁는 일을 멈추고 세탁된 옷을 꺼내는 엄마 손이 되어 있었다. 이때 효자손은 어머니 손을 연장한 손이다. 그렇게 세탁기가 낡아가는 시간 속에서 어머니가 노환을 앓자 더이상 효자손도 쓰임새가 사라진다. 세탁기가 낡은만큼 효자손도 갈라지고 뭉개졌다. “엄마 등 대신 긁던 통돌이 옆 효자손/나 없을 때 세탁기 양말 한 짝 더듬더듬/작은 키 대신하여 긴 팔 되어 주더니/그 손 놓고 누운 지가 얼마이던가” 어머니-세탁기-효자손이 오랜시간 속에서 함께 늙어간 것이다. 어머니가 효자손을 잡지 못해 놓아버린 상황이 되자 세탁기도 효자손도 그 기능을 잃어버렸다. 자식 손보다 오래 잡은 효자손은 엄마 손을 닮으며 함께 늙어갔다. 

시 「언제 오냐」는 자식을 기다리는 노모 마음이 잘 나타난다. 어머니와 자식 자리가 바뀐 곳에서 이제는 자식에게 응석을 부리는 연로한 어머니 자리가 부각된다. 어머니는 자식을 의지하고 자식을 기다리며 오래 함께 있으며 보호받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자식은 하루 중 얼마의 시간을 비워 어머니의 요청에 따르지만 유쾌한 마음이 아니라서 더 무겁다. “앉혀 주고 가면 안 되나/눕혀 주고 가면 안 되나” 자식이 어린 아기였을 때 어머니는 수없이 앉히고 눕히고 안아 주고 잡아주는 일로 기뻐했을 것이다. 그 기쁜 기억에 머무는 어머니는 당신 스스로 그 아기가 되어 기쁜 추억을 연장하는 중이다. 그런데 자식은 어머니 응석을 받아내기가 힘들어서 마음이 무겁다. “……가면 안 되나”라고 묻는 어머니 말씀은 가지 말라는 말의 완곡한 표현이다. 좀더 같이 있고 싶은 어머니의 마음이 스멀스멀 드러난 것이다.    

 

5. 세상 어머니들의 종교

차수민 시는 유년시절 상처와 방황이 온통 “별에 바쳐져” 인생의 마디를 만들어낸 이야기가 단단하게 녹아 있다. 「늑대일까」에서 중학교에 못 보내겠다는 어머니 말씀을 듣고 화가 치밀대로 치민 시적 화자가 두드러진다. 이 시에서 등장하는 어머니는 “중학교에 못 보내겠다”는 말씀으로 그 존재를 드러낸다. 매우 단호한 어머니로 그려졌지만 넉넉하지 못한 살림을 꾸려내느라 어머니 삶도 충분히 고단했을 것이다. 중학교에 ‘못 가는 시적 화자와 못 보내는 어머니’의 아픈 마음은 경중을 달 수 없지만 시인은 어머니 마음을 어디에도 표현하지 않고 배경으로 묻었다. 「길에 바치다」에는 자식을 향한 어머니 정성이 한결같다. 그 대상이 무엇이든 자식을 기원하는 자리가 보이는 대로 빌고 빈다. 세상 어머니들의 지극한 소원은 자식 잘되는 일로 귀결된다. 「내 거 꼭 한번 가고 싶다」에는 자식 잘되라고 기원하는 어머니가 과거, 현재, 미래로 연결되어 있다. 어머니의 어머니가 그렇게 빌었던 자리를 딸이 어머니가 되어 찾아가서 빌면서 간절한 어머니들의 신앙이 된다. 자식들을 위한 기도는 언제나 물처럼 한결같이 흐른다.

「늑대일까」에는 중학교를 못 가게 된 시적 화자, “중학교는 못 보내겠다”는 단호한 어머니 말씀에 화를 참지 못한 화자가 나온다. 정신이 하나도 없어지자 어두운 산길에서 짐승을 만나도 무서울 게 없다. 두려움이 전혀 없이 화만 가득 차 있었다. 그 짐승이 경계를 풀지 않고 쏘아보거나 훑어봤지만 화가 난 시적 화자에게 다가서지 않았다. 개인지 늑대인지 모를 짐승도 겁이 나지 않을 정도였다는 것은 슬픔과 분노가 섞인 감정 상태의 극단을 드러낸다. 집안 형편을 이해하거나 어머니 마음을 헤아릴 나이가 아닌 화자는 자기 분노만 바라볼 수밖에 없어서 화는 더욱 끓었다. 산밭으로 달려가 엎어져 잠이 들었다가 깼는데 어두운 산길에 개 한 마리가 쏘아봐도 무서울 것이 없었던 그때 늑대일지 개일지 모르는 그 짐승은 시적 화자의 기운에 압도되어 그 자리를 떠날 정도였다. 그렇게 화가 치밀어 오른 화자는 어머니 마음을 돌아보기에는 너무 어린 아이였다.

 

움마, 꽃잎이
손바닥에 딱 내리면 소원이 이루어진답미더
소원을 빌고 입에 딱 넣으면 이루어진답미더

눈만 꿈뻑꿈뻑 어머니
두 손바닥 내어
한참 올려보시다

벚꽃 낮은 가지
아기 엉덩이 분 바르듯
톡톡 치신다    

- 「길에 바치다」 부분

 

「길에 바치다」에서 어머니는 온갖 것, 사물들을 신앙으로 섬긴다. 그리 신비하지도 않고 흔한 자연현상을 두고도 소원을 비는 일을 잊지 않는다. 자식 키우며 자식들이 온전하게 살아가기를 간절하게 바라느라 기도 자체가 삶이 되어버린 것이다. 자식 잘되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절절함이 장독대에 올려둔 정안수로 멈추지 않는다. 일상 공간에서 언제나 그 절절함은 발휘된다. 세상 어머니들의 간절한 종교는 어머니의 어머니들, 그리고 그 어머니도 여전히 그 믿음을 놓지 않아 유전자처럼 어머니들로 대물림되는 중이다. “움마, 꽃잎이/손바닥에 딱 내리면 소원이 이루어진답미더/소원을 빌고 입에 딱 넣으면 이루어진답미더” 꽃잎이 자연스럽게 손바닥에 떨어지지 않으면 나뭇가지를 살짝 건드려서라도 그 우연을 만들어 손바닥 위에 꽃잎을 올려 믿음을 단단하게 만들어낸다.

「내 거 꼭 한번 가고 싶다」의 ‘거’는 어머니의 어머니가 다녔던 절집이다. 어머니를 다시 떠올려보고 싶은 그리움에서 일어나는 마음이다. 어머니 간절함은 문수암으로 꽉 차 흘러 고인다. “큰 절 두 번 하시고/두 손 모아/한 손 돌려가며 비신다/우짜든지 우짜든지/우짜든지 잘” 더 이상 말은 사실 필요없다. 어머니에게는 평생 주문이 되어버린 이 간절한 몇 마디 말이면 충분하다. 어머니 ‘간절교’에는 어머니를 위한 기도는 없다. ‘어머니의 어머니가 다니셨던 절집’은 어머니들이 대를 이으며 간절함을 단단히 묶고 더욱 간절하게 간절함을 키우고 간절해져서 어느 순간 스스로 간절 자체가 되어버린 장소가 되었다. 이보다 더 간절할 수 없을 때까지 이른 그곳에서 스스로 간절에 젖어 온 생을 다 태우던 자리이다. 

 

6. 며느리의 어머니, 어머님

최영순 시에는 ‘어머님’과 ‘어머니’가 대비되어 나온다. 한 여성을 며느리가 호칭하는 것과 딸이 호칭하는 것은 다르다. ‘어머님’은 자식들이 그리워하는 어머니와는 성격이 다른 자리에 놓인다. 시에서도 드러나듯 며느리는 시어머니를 부를 때 ‘어머님’이라는 존칭을 붙인다. 며느리 자리에서 시어머니는 예의를 갖춰 모시는 대상이 된다. 노환을 앓고 있으니 더욱 그러하다. 딸로 태어나 한 집안의 며느리가 된다는 것은 여성에게는 보통의 사건이 아니다. 자기 삶이나 딸로서 삶은 사라지고 며느리와 아내 삶이라는 낯선 시간대에 놓인다. 말하듯이 쓴 시에서 시인은 말을 대폭 줄여서 긴장을 만들고 급전환 속에서 웃음을 폭발시키기도 한다.

한 집안 종부로 시집와서 제사 모시고 남편 사업 돕고 자식 키우며 산 세월은 며느리 삶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어머님’을 잘 모신 며느리 역할을 뒤로 하고 53세에 시작된 공부길 행복이 시 창작으로 이어진다. 「고시촌」에서 보이듯 “소리 없는 책장 도서관에서 난 별똥별을 입속으로 밀어 넣었다”처럼 뒤늦게 대학에 입학한다. 쉰을 넘겨서 대학입학 꿈을 펼치고 “시를 숭덩숭덩 낳는 시 앎탉”(「시 쓰기」)이 되는 희망을 품고 시집을 내는 일까지 이뤄낸다. 

「53층」에서 등장하는 시어머니는 ‘어머님’이란 존칭으로 불리며 일 년 동안 며느리 수발을 받고 떠난 분이다. 어머님이 현실에 존재하지 않으면서 ‘53층’은 하고 싶은 공부를 하는 자유로운 시간과 만난다. 53층은 어머님이 계시는 동안 수십 층의 시간을 지나왔지만 며느리 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구완하기 위해/이십 년 내 일 접고/한 방에서/다칠세라 기저귀 뺄세라/일 년/어머님 주무시듯/돌아올 수 없는 여행 떠나셨다” 병든 어머님을 보살핀 힘든 시간은 ‘일 년’이라는 말 속에 모두 모아 넣었다. 일 년의 시간을 보낸 며느리는 꿈에 그리던 대학공부를 시작한다. ‘어머님’이 계시는 동안 종부였다가 ‘어머님’이 안 계시면서 대학생이 되는 변화는 삶의 차원을 달리할 정도가 되었다.  

 

품앗이 날
막내 업고 논두렁에 서면
젖 먼저 물리고
새참국수 드신다
(중략)

사카린 밥물로
막내 업어 달래면서
온 동네 개골개골 꾸르륵 쪽쪽
눈과 귀는 대문만 쳐다본다  

- 「엄마 그래도」 부분

 

「엄마 그래도」에 오면 어머님은 안 보이고 엄마가 등장한다. 어머님과 엄마의 거리는 며느리와 딸의 거리를 가리킨다. 품앗이 끝낸 엄마는 배가 몹시 고프겠지만, 그래도 막내에게 젖을 먼저 물리고 새참을 먹는다. 우리들 엄마가 보여주는 익숙한 풍경이다. 엄마는 모내기로 한창 바쁘고 품앗이까지 일이 널려 있으니 어린 막내에게 엄마 손길이 멀다. 큰딸은 막내 동생에게 엄마자리를 대신 메우는 엄마가 된다. 바쁜 엄마, 일하는 엄마 대신 막내에게는 언니 엄마가 더 가깝다. 엄마가 된 언니들은 엄마를 흉내낸 엄마였다.   

 

7. 새로운 ‘어머니 풍속’

하순이 시는 결이 매우 다르다. 다른 다섯 명 시인과는 어머니를 호출하는 방식도 다르다. 다섯 명이 전통적인 어머니를 그렸다면 하순이는 요사이 어머니 역할에 중점을 뒀다. 특별히 작품 전체가 교육현실 문제에 집중하고 있으며 문제를 더욱 부추기는 어머니들을 조명하고 있다. 시인은 다섯 시인과는 달리 시의 제재나 주제가 십대 아이들, 청춘의 대화에 집중하고 있다. 화자가 아이들인 경우가 많은데 은따, 학원 이야기, 공부 스트레스 등이 주요 대상이다. 짤막한 시인 소개에 보이는 것처럼 독서 논술 강사를 한 본인의 체험을 쓴 것 같다. 그래서 하순이 시에는 좋은 대학입학을 위해 경주마처럼 달리는 돼지엄마가 나온다. 입시경쟁에서 이기는 아이를 키우는 엄마를 보여 준다.  

「돼지엄마」는 속칭 학원 정보를 다 아는 입시 분야의 만능 엄마를 달리 부르는 말이다. 아이를 대학입학이라는 틀 안에 가두고 예비단계로 특목고 진학을 준비한다. 특목고 입학을 위해 필요한 내용은 모두 엄마가 준비하고 아이는 엄마가 시키는 것을 잘 따르면 된다. 특목고 예비진학반에 다니는 시적 자아는 토요일이면 학원보충수업, 음악 레슨, 창의 과학 실험 수업, 봉사활동도 간다. “엄마는 무엇을 배우는지 모르신다/나도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 모른다/SKY, 하늘을 날고 싶은 엄마는/늘 엄마 서랍 속에다/나를 챙겨 푸드덕푸드덕 날개 치신다.” SKY로 대변되는 꿈을 위해 엄마는 맞춤식 교육을 시키느라 바쁘다. 엄마는 특목고 입학 이외에 아이가 무얼 배우는지 관심이 없고 아이 역시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면서 열심히 공부한다. 이 시에서 아이는 엄마 서랍 안에 갇혀서 그 서랍을 탈출하지 못한다. ‘서랍’은 엄마가 그리는 하늘이기도 하다. ‘SKY’, 그 하늘을 날고 싶어하는 건 아이가 아니라 엄마임을 드러낸다.  

 

엄마는 큰생각 학습지에 다닌다
생각이 많은 엄마는 집을 크게 하고
나랑 동생도 크게 키우고 싶어
선생님 학습지 선생님이 되었다 
(중략)

아파트 조무래기들은
우리집이 110호였다가 공부방이었다
엄마는 이모였다가 선생님이었다   

- 「씽크빅」 부분

 

「씽크빅」에는 학습지 선생님이 된 엄마가 등장한다. 어머니는 아이 공부에 직접 개입하고 앞서서 모든 일을 결정한다. 아이 대신 엄마 결정이 우선되고 아이는 그 결단을 묵묵히 따른다. 학교에서 선생님께 배우고 혼자 공부하던 옛 시절 공부법은 사라지고 엄마의 학원탐험과 과외교사정보와 경제력에 의해 아이들이 교육되는 현실을 잘 담은 작품이다. 아이가 알아서 공부하도록 한 발자국 뒤에서 따라가며 아이 결정을 이끌어내는 교육은 어디에도 찾을 수 없다. 옛 어머니와 오늘 어머니가 아이를 사랑하는 방식이 매우 달라진 건 경제구조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엄마가 ‘큰생각’ 학습지 선생님이 되고 이웃 아이들도 엄마 학습지로 공부하자, 집은 공부방이 된다. 엄마는 이웃들에게 친절하던 이모에서 공부방을 운영하는 선생님으로 변신한다. 집이었던 공간이 공부방으로 바뀐 이후 아이는 “엄마 따라 공부방에 갇히”자 “선인장 가시 위에 앉은 마음”이 되어버린다. 집이 사라지면서 아이의 심리적 충격과 상처는 깊어진다. 공부방은 선인장 가시처럼 날카롭게 몸을 찌르는 아픔을 준다. 정서적인 여유와 편안한 휴식 공간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아이는 집이 사라지자 적응이 힘들지만 엄마는 아이 상황을 전혀 모른다.   

아이만 힘든 것이 아니다. 엄마였다가 선생님이 된 엄마 역시 힘든 것은 다르지 않다. 공부방을 차린 엄마 고충은 「달리는 말」에서 보인다. 학습지 선생님이 된 엄마 현실은 단지 바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여러 역할을 혼자 감당하느라 힘겹고 버겁다. “엄마의 거친 일밭”이 그것이다. 엄마는 선생님으로 불리지만 학부모 상담에 청소까지 혼자 한다. 마음속 걱정을 덮느라 겉으로 웃음을 띠고 몸이 아파도 쉬는 일이 없다. 대학입시가 아이만 힘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를 맞춤형으로 교육시켜야 하는 과외 교사에게도 어려운 일이다. 학습지 선생님이 된 엄마는 ‘암말처럼’ 달리기만 한다.

하순이 시에는 사교육의 현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공교육이 손 놓은 지점에 “헬리콥터 맘”이 아이를 자신의 하늘(SKY)로 보내고 있다. 한때 인기드라마 『스카이캐슬』에서 보여 준 세계가 하순이 작품에 잘 드러난다. 작품 속 어머니가 옛 어머니와 다른 점은 아이의 교육에 직접 개입한다는 점이다. 옛 어머니들은 아이들을 뒤에서 응원했다면 요즘 어머니들은 아이들 앞에서 길을 제시한다. 그 길은 학원으로 가는 길이지만 대학과 직장, 결혼까지 이어지고 있다. 교육이 존재하는 이유가 기회균등에 있는데 어머니들이 출발선을 마음대로 옮기며 그 철학을 흔들고 있는 현실을 잘 꼬집는다. 

 

8. 어머니의 마음에도 어머니가 있다  

어머니가 계신 자리는 여섯시인들을 통해 확인된다. 이 시집에는 표현이 이상하지만 세 부류의 어머니가 등장했다. 옛 어머니들, 요즘 젊은 엄마, 그리고 시어머니가 등장한다. 중년을 넘긴 시인들의 어머니들, 옛 어머니들의 삶은 네 명의 시인들에게 비슷비슷하게 기억되어 있다. 자식, 특히 아들을 하늘로 알고 당신 목숨으로 알고 살았던 우리들의 어머니가 등장한다. 이와 결이 다른 어머님은 며느리가 모시는 시어머니이다. 시에서 특별한 표현이 없이 빈칸으로 두고 있어도 그 여백을 읽을 수 있다. 

돼지엄마로 불리는 엄마들이 대거 등장해 대한민국 사교육을 쥐락펴락하는 현실은 아랫세대 어머니들이 그리고 있는 풍속이다. 요즘 젊은 엄마들은 옛 엄마들보다 더 힘들 수 있다. 밥해 먹이는 일은 좀 줄었을지 몰라도 아이 대학진학을 온통 책임지고 결정하기 때문이다. 아이의 미래를 언제까지 엄마 몫으로 둬야할지 엄마들에게만 물을 일도 아니다. 사교육 문제가 얼마나 아이들을 힘들고 아프게 하는 일인지 잘 보여 준다. 교육철학도 변해야 하고 경제구조도 바꿔야 하는 참 큰일이 우리 앞에 있다.

여섯시인들의 공통점, 시를 오래 짝사랑해 온 사람들의 생애 첫 시집이라는 점이다. 시를 배운 스승이 같은 동학이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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