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시학 3호-특집 부산의 꽃부리, 동래】 문학전통 : 일제 강점기 의사醫師 양봉근의 민족적 책임 의식과 활동* - 윤효정

장소시학 승인 2023.11.24 12:11 | 최종 수정 2023.11.26 10:06 의견 0

문학전통

 

일제 강점기 의사醫師 양봉근의 민족적 책임 의식과 활동* 

윤 효 정

 

1. 구포 인물, 양봉근

양봉근楊奉根(1897~1982)은 1897년 5월 19일 동래구 화명리에서 아버지 양문택楊汶澤과 어머니 윤시의尹時儀의 3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양문택은 15~20마지기의 농지를 소유한 농업 종사자로 교육열이 꽤 높았다고 한다. 

어린 시절 양봉근은 구포에 거주했다. 그는 1912년 16세 되던 해 구포 사립 화명학교에 교사로 근무하기 시작했다. 화명학교는 민족학교로 맹자, 산학통편算學通編, 초등대수학初等代數學, 고등소학이과高等小學理科 등을 교재로 사용했다. 양봉근은 맹자를 교육할 정도의 한학에 대한 지식을 갖추고 있었고 수학 등 근대 지식에도 능통했다. 전통 학문에 대한 조예는 환경적인 영향으로 보인다. 그의 고향 화명리는 양반촌이었고, 한학에 대한 교육열이 높은 곳이었다고 한다. 

이후 양봉근은 경성의학전문학교(이하 경성의전)에 진학하면서 의사醫師의 길을 걸었다. 졸업 후 서울·울산·서울·회령·만주 등지로 생활 터전을 바꿔가면서 생업으로서 의업에 종사하는 한편 조선 민족을 위한 다양한 사회 참여 활동을 전개했다. 그는 식민지의 엘리트로서 조선 민족의 해방을 지향했고,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섰다. 

이하에서는 그가 민족의식을 체득하면서 민족의식을 가지게 된 계기로서 3·1운동과 경성의전 동맹휴학 경험, 조선 민족을 위한 사회 활동으로서 신간회 운동 참여, 의료 혜택에서 소외된 이들을 위한 민중보건운동 등 일제 강점기를 중심으로 그의 민족적 책임 의식과 낮은 곳을 향한 헌신적인 사회 활동를 소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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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신영전·윤효정, 「보건운동가로서 춘곡 양봉근(春谷 楊奉根 1897-1983)의 생애」, 『의사학』 26, 2005에 근거하여 작성했다. 

 

2. 3·1운동과 경성의전 동맹휴학 

(1) 구포 지역 3·1운동의 촉매 역할

양봉근은 1918년 경성의전에 진학했다. 그리고 본과 2학년에 재학 중이던 1919년 3·1운동을 맞이했다. 3·1운동의 주요 배경은 ‘민족 자결주의’ 사조였다.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1918년 1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질서의 14개조 평화 원칙 중 하나로 민족 자결주의를 제시했다.

민족 자결주의 원칙은 일본 언론을 통해 1918년 11월 무렵 국내에 전해졌다. 민족의 문제는 해당 민족이 스스로 결정할 권리를 가진다는 민족 자결주의 사조를 접한 한국 지식인들은 ‘독립’의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종교 지도자들은 여러 차례의 회합을 통해 조선의 독립 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했고, 3월 1일 독립선언식 거행을 결정했다. 학생들도 움직였다. 학생들은 1919년 1월경부터 회합을 거듭하면서 3월 5일 대중시위운동을 계획했다. 그리고 종교계 대표들은 학생들에게 연합을 요청했고, 학생들은 3월 1일 독립선언식에 합류하는 한편 처음 계획했던 3월 5일의 시위운동 역시 추진하기로 했다.

3월 1일 탑골공원에는 5천여 명의 민중이 운집했다. 그리고 학생들은 이날의 만세시위운동을 이끌었다. 또한 이들은 초기 학생 모임에서 결정한 3월 5일의 만세시위운동도 계획대로 추진했다. 당일 남대문 역 앞에 모인 인파는 만여 명에 달했다.

양봉근이 3월 1일과 5일의 시위운동에 참여했는지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그가 이 소용돌이를 겪은 것은 분명했다. 독립선언서를 확보해 구포로 향했기 때문이다. 양봉근뿐 아니라 수많은 학생들이 3월 10일 휴교령이 떨어지자 고향으로 돌아가 지역 차원의 만세운동을 독려했다.

구포에 도착한 양봉근은 당시 구포면사무소 서기였던 임봉래林鳳來를 만나 서울과 평양의 만세운동 소식을 전했다. 평양은 서울과 더불어 3월 1일에 만세시위운동이 있었던 7개 도시 중 하나였다. 그리고 임봉래에게 구포 지역에서도 독립만세시위를 일으킬 것을 당부했다. 임봉래는 양봉근이 경성의전 입학 이전 재직했던 사립 화명학교의 교사였다. 양봉근의 독립만세운동 제의는 임봉래 등 지역 지식인들을 북돋았다. 임봉래는 자신의 지인들과 함께 구포장날인 3월 29일 정오 독립만세시위운동을 전개했다. 이렇듯 양봉근은 구포 지역으로 만세운동을 확산시킨 적극적 기여자였다.

3·1운동기 중심적 역할을 했던 학생들은 민족 자결주의에 고무되었다. 양봉근 역시 3월 1일과 5일의 독립만세시위운동을 간접적으로 경험하면서 독립에 대한 기대를 품었고, 독립선언서를 구해 구포로 내려가 구포 지역의 만세운동을 독려했다. 이민족 지배의 시대가 종식되고 약소민족의 자주와 자결의 시대가 열린다는 희망 때문이었다. 

물론 약육강식의 시대에서 약소민족 자결의 시대로 바뀔 것이라는 한국인들의 판단은 국제 정세를 잘못 이해한 것이었다. 사실 윌슨이 제창한 민족 자결의 대상은 1차대전에서 패배한 패전국의 식민지들이었기 때문에, 승전국의 식민지들과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은 이에 해당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나 독립선언서를 품고 고향으로 향했던 청년 양봉근이 겪은 3·1운동은 그가 민족의식을 자각하고 자주 독립의 과제를 자신의 생애에 품게 한 중요한 사건이었다. 

독립선언서(출처 : 독립기념관) 
독립선언서(출처 : 독립기념관) 

(2) ‘구보 망언사건’에 대한 경성의전 동맹휴학 주도

1919년 3월 이후 양봉근은 학업에 매진했다. 그리고 경성의전 본과 4학년에 재학 중이던 1921년 5월 그는 다시 한번 민족 문제를 진지하게 마주하게 된 커다란 사건과 마주했다. 이른바 ‘구보久保武 망언사건’으로, 구보는 당시 경성의전 해부학 교수로 조선인에 대한 체질 인류학적·인종론적 연구를 한 인물이었다.

사건 경위를 보자. 1921년 5월 26일 경성의전 해부학 강의실에서 두개골 한 개가 분실되었다. 이때 구보는 조선인 학생들을 책망하면서 “조선 사람은 해부학상으로 야만에 가깝고 지난 역사를 보더라도 너희들 중에 가져갔다”고 몰아붙였다. 조선 민족에 대한 편견과 모멸의 발언이었다. 그러나 구보는 여기에 해부학적·역사적 근거로 자신의 주관적 견해에 객관성까지 부여하고자 했다.

이 어불성설의 망언에 경성의전의 조선인 학생들은 공분公憤을 느꼈다. 194명에 이르는 조선인 학생들이 일제히 6월 4일 동맹휴학에 들어갔다. 학생들은 구보 교수의 강의를 거부했고 학교 측에 적절한 조처를 요구했다. 그리고 이 사건은 민족적 분노를 일으키면서 사회적으로도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그러나 학교 측은 강경하게 대응했다. 동맹휴학에 참여한 194명의 학생 중 9명을 퇴학시켰고, 185명을 무기정학에 처했다. 양봉근도 이때 퇴학 처분을 받은 학생 중 한 명이었다. 다만 경성의전 졸업생들로 구성된 교우회와 학부형들의 중재로 학교 측은 학생들에 대한 징계 처분을 철회했고, 학생들은 6월 27일부터 등교하기 시작했다. 

근 2주간 진행된 경성의전 동맹휴학은 어느덧 문제의 본질을 상실하고 있었다. 구보 교수의 사과도, 학교 측의 적절한 조치도 부재한 채 사건의 초점이 학생 징계 문제로 옮겨갔으니 말이다. 용두사미 격으로 끝나버린 감이 있었지만, 이 사건은 학생 양봉근의 내면을 성장시킨 중요한 계기였다. 사건 당시 친척 형에게 보낸 그의 편지에서 이를 엿볼 수 있다. 

 

“장래를 생각하여 자기를 희생함은 생물학자의 생물적 본연성이라고 생각합니다. ... 민족적 치욕으로 말하면 어찌 사소한 구보 박사 일언으로만 말하겠습니까만은, 저는 오직 와신상담할 뿐이라 배우고 힘씀이 그것을 설욕하는 유일한 방책이라 생각하여 주의하고 있습니다. ... 사건의 골자인 구보 박사의 抗斥 문제는 지금은 오히려 제2의 문제가 되고 퇴학과 정학자의 복교 문제가 주위를 점하게 됨이 안타깝습니다.”1)

- 양본근이 1921년 6월 17일 친척 형에게 보낸 편지 

 

이 편지에서 그는 ‘민족적 치욕’이라는 표현으로 민족 차별과 무시에 대한 분노를 표현했다. 또한 구보 박사의 망언으로 드러난 조선 민족 모멸 문제가 주변화되고 퇴학자와 정학자에 대한 징계 처분 완화 문제가 중심이 된 현실 상황을 안타까워했다.

이민족의 지배, 식민자들의 오만과 편견, 약소민족에 대한 차별과 멸시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그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생물학자’임을 자임하면서 힘써 배워 민족적 치욕을 극복하고 민족적 명예를 되찾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학교로 돌아갔다. 그러나 양봉근 개인에게 복교는 동맹휴학의 패배를 수용하는 행위가 아닌 민족 공동체의 자유, 평등, 행복을 위한 삶의 시작을 알리는 첫걸음이었다. 그리고 그는 졸업 후 이 무렵의 결심을 실천하는 삶을 살았다. 

구보 망언 사건에 대한 동아일보 사설(1921년 6월 8일) 
구보 망언 사건에 대한 『동아일보』 사설(1921년 6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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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양봉근이 친척 형에게 보낸 편지(신영전·윤효정, 「보건운동가로서 춘곡 양봉근(春谷 楊奉根 1897- 1983)의 생애」, 『의사학』 26, 2005, 5쪽, 6쪽에서 재인용).

 

3. 신간회 운동 참여

양봉근은 1922년 3월 경성의전을 졸업 했고, 이듬해인 1923년 7월 의사 면허를 취득했다. 졸업 후 그는 총독부병원 정신병 연구실에서 조수로 근무했고, 1925년경 울산으로 이주해 <울산병원>을 열고 1930년 초엽까지 운영했다. 

그가 사회에 나갔던 1920년대 전반기 조선 사회는 식민지 근대의 발전 속에서 불평등의 문제가 대두되었다. 지주의 횡포로 인한 농민 문제, 자본가의 수탈로 인한 노동 문제, 전통적 인습으로 신음하는 여성 문제 등이 사회 문제화되었다. 또한 이와 더불어 농민, 노동자, 여성은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기 위해 단체를 조직해 자신의 이익을 지키고자 했고, 각종 부문운동의 성장 속에서 사회주의, 페미니즘 등 새로운 사조 역시 범람했다. 

양봉근은 새로운 문제들을 외면하지 않았다. 그는 1923년 이전 대종교중앙청년회에 가입해 활동했고, 울산으로 이주 후 지역 사회의 지식인으로서 각종 대중 강연 활동을 진행했다. 그의 강연 주제는 ‘농촌문제대관’(1927), ‘일반가정위생’(1928), ‘노동문제의 사적 고찰’(1929) 등 농민, 노동자, 여성 등 사회적 약자에 관한 것이었다. 또한 그는 아동잡지 신소년에도 소년 위생에 관한 글(1927)을 싣는 등 아동 문제에도 관심을 보였다. 이처럼 양봉근은 식민지의 지식인으로서 노동자, 농민과 같은 기층 민중과 여성, 아동 등 민족의 다수를 차지하는 소외층의 편에서 민족 문제에 접근했다. 

잡지 신소년 5-1(1927년 1월)에 실린 양봉근의 글 
잡지 『신소년』 5-1(1927년 1월)에 실린 양봉근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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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朝鮮總督府官報 第2886號, 1922年 3月 30日, 「卒業生」, 399쪽.
3) 朝鮮總督府官報 第3275號, 1923年 7月 11日, 「醫師其他一般療屬ノ免許及免許證返納」, 110쪽. 

 

그리고 어느덧 조선 사회는 1926년 말 이래 분열에서 통일로라는 슬로건 아래 민족협동전선운동의 시대를 맞이했다. 이와 같은 시대적 요청은 1927년 2월 신간회의 창립으로 결산되었다.

신간회는 민족단일당으로 일컬어진다. 하나의 민족을 하나의 당으로 조직한다는 말이었다. 조선 민족의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신간회에 가입할 수 있었다.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처럼 이념이 달라도, 기독교도와 천도교도처럼 종교가 달라도, 자본가·노동자·지주·농민처럼 계급·계층이 달라도 조선 민족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민족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인사들은 모두 신간회에 모일 수 있었다. 다만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기획된 민족단일당에 친일파와 같은 반민족 인사는 포함될 수 없었다. 

양봉근은 이와 같은 시대적 흐름에 적극 대응했다. 그는 신간회 울산지회(이하 울산지회) 설립을 위한 위원장으로 활동했고, 1928년 3월 17일 울산지회 설립대회에서 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정치이념 면에서 양봉근은 민족주의 성향을 지녔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민족주의 정치세력에 가담했던 인사는 아니었다. 즉 양봉근은 양심적인 민족주의 지식인으로서 울산지회에 참여했다. 

울산지회의 활동을 보자. 울산지회에서는 위생적이고 건강한 민중의 일상을 위한 염색 옷 착용 선전을 기획했고, 노동야학 진흥을 꾀했으며, 지역 사회의 여성운동을 진작시키고자 했고, 지회 산하에 ‘분회’을 조직해 지회 운동의 내실을 다지고자 했다. 이처럼 노동자, 여성, 일반 민중에게 다가가려는 울산지회의 활동 계획은 사회적으로 차별받았던 이들을 위한 사회 참여 활동을 전개했던 양봉근의 행보와 일맥상통했다. 

또한 위생 문제와 같은 상식의 보급과 노동야학 등 기층 민중에 대한 교육 활동은 의료와 교육 혜택에서 소외된 조선 민족 다수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즉 울산지회는 여러 민중계몽 활동을 통해 식민 통치의 기만성과 한계를 드러내면서 조선 민중이 제국 일본의 일원으로 파편화되는 것을 방어하고 이들에게 약소민족 의식을 환기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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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안타깝게도 울산지회의 활동은 원활하지 못했다. 대부분 계획으로만 그쳤을 뿐이다. 울산지회 운동이 저조했던 원인에 대해서는 보다 넓은 탐구가 필요하다. 다만 현상적인 원인으로는 울산 경찰 측의 과도한 경계를 꼽을 수 있다. 

신간회 울산지회 설립 기사 (동아일보, 1928년 3월 25일)
신간회 울산지회 설립 기사 (『동아일보』, 1928년 3월 25일)

이처럼 울산지회는 식민지 체제를 직접적으로 공격하려 하지는 않았지만, 조선 민족에게 불합리하고 부당한 식민지 체제의 본질을 드러내면서 이를 균열시키고자 했다. 이는 다른 지회 운동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른 지회에서도 일상에 필요한 상식과 지식의 보급, 조선 민중에게 불리한 식민지 지방 행정 관행에 대한 민족적 공론의 형성, 식민자 일본인들의 독점에 대한 약소민족의 이익 제기 등을 주요 활동으로 삼았다.

한편 1930년 초엽 양봉근은 울산에서 다시 서울로 올라와 <협화병원>을 개원했다. 또한 신간회 경성지회로 이적 울산지회에서 경성지회로 이적5) 했고, 1930년 11월 신간회 본부(이하 본부)의 중앙검사위원장이 되었다. 다소 갑작스럽기도 한 중앙검사위원장직은 기존 본부 간부들과의 인적 네트워크를 암시한다. 

그런데 양봉근이 본부 간부로 활동했던 시기는 신간회 운동의 마지막 국면으로 신간회 해소(이하 해소) 문제가 대두되었던 시기였다. 해소란 협동전선운동의 질적 변이를 목표로 제기되었다. 이는 대공황으로 인한 대중투쟁의 고양을 배경으로 노동자, 농민의 투쟁력을 흡수한 전투적 협동전선운동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었다. 따라서 해소는 일제에 대한 직접적인 투쟁을 위해 신간회의 전투적 요소를 추출하는 작업이었다. 이와 같은 투쟁적 협동전선은 반제협동전선으로 불리기도 했다. 

결국 신간회 창립 무렵 민족단일당을 중심으로 한 민족협동전선운동과 신간회의 해소를 통한 반제협동전선운동의 차이는 일제에 저항하는 방식에 있었다. 전자는 간접적인 균열 방식이었고, 후자는 직접적인 공격과 타격 방식이었다. 한편 해소는 사회주의 정치세력으로부터 제기되었고 이들을 중심으로 실천되었지만, 직접적인 항일투쟁의 시기라고 판단했던 민족주의 인사들 역시 이에 동참했다.

그러나 양봉근은 해소 반대의 입장에 섰다. 신간회 해소 이후 집필한 논설에서 그는 신간회가 해소된 지금도 우리 사회는 “민족적 협동전선당을 그리워 하고 있다”6)고 기술했다. 그의 인식 속에서 지난 신간회의 활동은 계속 이어갈 필요가 있었다. 양봉근이 회장을 맡았던 울산지회는 조선 민중의 현실적인 삶에 필요한 상식과 지식을 제공하고자 했다. 신간회의 사라짐을 아쉬워했던 그는 이제 신간회가 아닌 다른 통로를 통해 민중의 현실과 일상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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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울산지회에서 경성지회로의 이적 절차는 최종적으로 1930년 12월 8일 신간회 경성지회 상무집행위원회에서 마무리되었다(京鍾警高秘 第17260號, 1930年 12月 9日, 「集會取締狀況報告(通報)」, 3쪽).
6)楊奉根, 「其後의 情勢와 吾人의 態度」, 
三千里』 3-12, 1931년 12월, 9쪽. 

 

4. 민중보건운동의 전개   

신간회는 1931년 5월 16일 전체대회를 통해 회원들의 표결로 해소를 결정했다. 그러나 양봉근은 해소 지지자들과 달리 신간회와 같은 활동의 필요성을 인정했고, 신간회가 없어진 이후도 자신의 신념을 충실히 따랐다. 

같은 해 12월 15일 양봉근은 ‘보건운동사保健運動社’를 창립하고 민중보건운동의 시작을 알렸다. 그가 꼽은 조선 민중의 당면문제는 그들의 건강 문제였다. 보건운동사의 창립 취지문을 보자. 

 

<保健運動社 趣旨書> 

“우리는 지금 우리 민중 앞에 놓여 있는 많은 문제 가운데 보건운동이 중대한 급무인 것을 외친다. 지금 우리 조선 민중의 보건 상태가 얼마나 염려할 지경에 있는지는 눈을 가진 자라면 누구나 인정하는 바이다. 이와 같이 된 원인이 날로 빈곤의 정도가 심해지는 대중 생활의 필연한 결과라 할까? 우리는 이 운동을 사회정책적으로 해결하여야 될 것을 말할지며 또한 그 원인이 조선 민중의 보건 위생 사상이 유치한 데서 기인되었는가? 우리는 이에 선전과 보급에 힘쓰려 한다. 무기력한 체구와 빈혈에 지친 창백한 얼굴의 소유자는 바로 우리 조선 민중이다. 피폐한 사회에서만 나타나 퍼지는 모든 유행병과 나쁜 병이 쉴 틈 없이 덮치고 여러 종류의 만성 질병의 통계 수치가 날로 높아 가는 지라 건전한 정신은 건전한 육체에서만 생긴다는 말이 틀림없다면 조선 민중은 무엇에 의하여 씩씩한 갱생의 원기를 뽐낼 수 있을 것인가? 조선 민중에게 위생 사상을 보급시키자! 보건의 대중적 철저를 도모하자! 햇빛과 공기와 영양과 의료 등 오직 민중보건을 위하여서만 있게 하자! 이것이 우리들이 들고 나오는 깃발이다. 농민보건을 위하여는 농촌에, 노동대중을 위하여는 공장과 일터에다, 학생·시민을 위하여는 학교·가두에다 우리의 깃대를 세우려 한다. 동지여! 합력하려는가? 우리의 이 민중보건운동에로!”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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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조선일보』, 1931년 12월 16일. 

이에 따르면, 조선 민중의 건강은 ‘중대 급무’였다. 이와 같은 진단은 타당했다. 대공황의 여파 속에서 민중은 기아에 허덕이면서 각종 전염병과 폐결핵, 신경 쇠약 등 난치병으로 사망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이는 분명 빈곤과 질병에 대한 방어력이 없는 사회 구조의 문제였다. 이 취지서는 민중보건이 사회정책으로 취급되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지적했다. 그러나 정치적 자유와 민주주의 절차가 보장되지 않았던 식민 통치 체제에서 민중보건의 정책화는 사회운동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따라서 보건운동사는 보건위생 관념의 선전과 보급에 주력하겠다고 했다. 이는 조선 민중의 병든 몸뚱이의 또 다른 원인이 보건위생 인식의 부재에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건운동이 농민, 노동자, 청년학생, 도시 시민 등 민족의 다수를 향해야 함을 밝혔다. 이는 일관된 양봉근의 신념이었다.

  민중에게 건강을 지키는 과학적 방법과 질병에 대한 합리적 대처법을 알려 주겠다는 보건운동사의 활동 방향은 식민지 조건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해야 한다는 제약된 조건에서 선택한 현실적인 방법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보다 적극적인 차원에서 양봉근의 보건관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대공황을 거치면서, 농민들과 도시 하층민들의 삶은 곤궁에 곤궁을 더해갔다. 소작쟁의와 노동자 파업은 생계의 문제와 맞닿아 있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생계형 자살에 관한 소식이 연일 신문지면의 한 부분을 차지했다. 당장 먹을 것을 구할 길이 없어 기아가 만연했고 전염병이 퍼져도 의료 시설은 턱없이 부족했다. 

양봉근은 이와 같은 민중의 현실에 무지하지 않았다. 또한 어떻게 보건위생에 대한 앎이 굶주린 기층 민중으로 하여금 밝은 햇빛을 받고 맑은 공기를 마시면서 신체를 단련하게 하고 영양가 있는 음식을 섭취하게 하며 과학적 방법으로 병을 치료하게 할 수 있겠느냐는 세간의 의심 섞인 의문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생각을 더 들여다보자. 

 

“一般 民衆으로 하여 人體에 對한 生理的 常識과 病理學的 槪念이 생기여 自己 몸을 튼튼하게 가지는 길을 알게 되고 病을 豫防하는 곳에 發明이 생기여지는데서 民衆은 스스로 適宜한 營養을 慾求하는 힘이 굳세어질 것이며 體育의 民衆化라든지 醫藥의 社會化를 이루게 될 것이다. 이에 保健運動은 生活運動으로 될 것이요 決코 一部의 非難하는 배부른 者들의 작난으로 되지 안이할 것이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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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楊奉根, 「朝鮮民衆保健運動의 方略」, 三千里』 4-3, 1932년 3월, 21쪽.

   

여기서 나타나는 특징은 ‘몸에 대한 자기 통제력’이다. 즉 신체에 대한 과학적 이해를 통해 민중은 스스로 자신의 건강을 지키고 병을 예방하게 되며 적절한 영양을 추구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는 그의 여러 저작물에서 나타나는 “씩씩한 내 몸을 짓자”라는 구호로 압축되었다. 이와 같은 주체성·자율성을 강조한 그의 보건관은 위생 경찰을 중심으로 조선 민중을 규제의 대상으로 삼았던 일제의 정책과는 분명하게 달랐다. 

또한 민중 개개인의 능동성을 강조하는 그의 보건관은 새로운 ‘생활’의 형성 과정이었다. 윗글에서 그는 ‘보건운동’이 곧 ‘생활운동’이어야 함을 강조했다. 즉 건강에 대한 자기 통제력은 의약을 소비하는 수준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그에게 보건이란 질병의 과학적 치료 영역뿐 아니라 질병 예방, 체육 부분, 섭식 등 일상의 총체적 재편을 의미했다.따라서 보건운동사의 활동 역시 포괄적이었다. 보건운동사 사칙에 따르면 그 사업은 네 가지로 구성되었다. 첫째는 조사 연구에 관한 사항으로 ①민중보건위생에 관한 학술연구, ②민중의 일반적 건강 상태와 특수 질병 조사, ③민중보건에 적당한 체육의 조사 연구였다. 둘째는 체육에 관한 사항으로 ①민중체육장 설치 장려와 ②체육의 민중화를 포함했고, 셋째는 선전에 관한 사항으로 ①기관지 보건운동의 간행 및 보건에 관한 도서 발간과 ②강연회·강습회·영사회·전람회 개최를 세부 내용으로 했다. 마지막은 의료에 관한 사항으로 이는 순회진료를 의미했다.9)

실제 보건운동사에서는 민중의 건강 상태 조사를 위해 시민 무료 검담을 실시했다. 시민들에게 검담기를 제공해 담을 담아 다시 가져오도록 하고 질병 상태를 알려 주는 방식으로, 이와 같은 검사는 폐결핵 등 질병의 보균 여부를 밝히는 데 활용되었다. 그리고 체육과 보건위생 지식 보급은 기본적으로 대중강연회 및 강좌를 통해 실천했다. 또한 잡지 보건운동도 발간되었다. 아울러 보건운동사 지부를 만들고, 순회 진료와 공장 노동자들에 대한 무료 건강 진료를 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순회 진료와 노동자 진료의 실행 여부는 불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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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保健運動社社則」, 『保健運動』 창간호, 1932년 1월, 74쪽.

보건운동 창간호(1932년 1월)
『보건운동』 창간호(1932년 1월)

그런데 보건운동사의 활동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1931년 12월 15일에 창립된 보건운동사에 관한 기록은 1932년 7월경까지만 확인된다. 보건운동도 1932년 1월 창간호와 2호만이 남아 있다. 그리고 양봉근은 1932년 하반기에서 1933년 상반기 사이에 함북 회령으로 이주하고 다시 만주로 떠난 것으로 보인다. 보건운동사의 활동 위축은 그의 갑작스러운 이주와 관련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5. 나가며

경성의전 학생이었던 양봉근은 의사로서 개인의 삶을 영위하는데 만족하지 않고 민족 공동체의 삶을 껴안았다. 이와 같은 선택에서 그가 학생 시절에 겪었던 3·1운동과 동맹휴학은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3·1운동은 양봉근이 식민지 민족의 현실을 자각하고 민족의 해방이라는 과제를 자신의 삶에 품은 중요한 사건이었고, 구보 망언 사건으로 인한 동맹휴학은 그가 민족을 위한 삶을 살기로 결심하게 된 동기였다. 

이는 졸업 이후 그의 사회 활동으로 드러났다. 무엇보다도 양봉근은 민족 구성원 중 사회적 약자에 해당하는 노동자, 농민, 여성, 아동 등의 편에서 민족 문제를 풀어가고자 했다. 이는 신간회 운동기 울산지회 활동과 보건운동사의 민중보건운동에서 확인할 수 있다. 

만주로 떠난 후에도 그는 동포와 함께 했다. 만주 장춘에서 <박애의원>을 운영했고, 해방 직후 만주 동포들의 귀국을 도왔다고 한다. 그리고 1948년 10월 연변의과전문학교 부속의원 원장을 시작으로 줄곧 연변 지역 병원과 의학 발전에 종사했다.

이처럼 양봉근은 식민지의 엘리트로서 민족에 대한 책임감을 지니고 민족 공동체의 삶에서 자신의 삶을 추구했다. 그리고 그가 향한 곳은 언제나 가장 낮은 곳이었다. 즉 그의 생애는 민족 다수의 행복한 미래와 함께 했다. 이와 같은 양봉근의 생각과 실천은 더 많은 이들의 행복과 건강, 사회적 약자에 대한 보호의 문제를 여전히 안고 있는 오늘날의 지역 공동체와 국가 공동체에서 기억할 만한 역사일 것이다. 

 

❙도움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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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료 

『동아일보』, 『조선일보』. 
『三千里』, 『保健運動』.
朝鮮總督府官報 第2886號, 1922年 3月 30日, 「卒業生」.
朝鮮總督府官報 第3275號, 1923年 7月 11日, 「醫師其他一般療屬ノ免許及免許證返納」.

 

2. 저서 

강만길 외, 『한국사 15 민족해방운동의 전개-1』, 한길사, 1994. 
강만길 외, 『통일지향 우리민족해방운동사』, 역사비평사, 2000. 
김정인·이준식·이송순, 『한국근대사』 2, 푸른역사, 2016.
박찬승, 『한국독립운동사』, 역사비평사, 2014.
이균영, 『신간회 연구』, 역사비평사, 1993. 
한국역사연구회, 『시민의 한국사② 근현대편』, 돌베개, 2022. 

 

3. 연구논문 

김상태, 「경성의학전문학교 학생·졸업생들의 국내 항일운동-3·1운동 참여 학생들의 이후 활동을 중심으로」, 『동국사학』 67, 2019. 
박태일, 「나라잃은시기 아동잡지로 본 경남·부산지역 아동문학」, 『한국문학논총』 37, 2004.
신영전·윤효정, 「보건운동가로서 춘곡 양봉근春谷 楊奉根 (1897-1983)의 생애」, 『의사학』 26, 2005. 
윤효정, 「민중대회 사건 이후 신간회 중앙본부 주도인물들의 결집과 활동」, 『한국근현대사연구』 51, 2009.
윤효정, 「신간회 해소론과 전체대회 연구-‘국제선’ 재건그룹과 ‘태평양노동조합계열’을 중심으로」, 『한국민족운동사연구』 105, 2020. 
윤효정, 「신간회 운동의 비타협적 성격 재론」, 『역사와 담론』 104, 2022. 

 

◇ 윤효정

| 고려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 받음. 한국근현대사 전공. 고려대학교 강사로 일하면서 독립연구자 활동. 대표 논문으로 『신간회 운동 연구』와 「일제말 『매일신보』의 조선인 학병 동원 담론의 양상과 특징」, 「근우회의 위상 변화 연구: 규약 개정을 중심으로」 들이 있음. Qorwh99_@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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