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부산 사람도 잘 모르는 부산
우리는 의외로 자기 지역 역사나 문화에 무관심할 경우가 적지 않다. 필자 역시 부산에서 태어나서 자라, 교육을 받았으나 본인의 문제의식은 항상 서울을 향한 해바라기씩 발상으로써 정작 자신이 뿌리를 내리며 생활한 부산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였다. 약 십 년에 걸친 일본 유학 생활과 몇 년간의 중국 필드 활동 활동을 통해, 지역사 연구에 대한 중요성에 대해 절감하게 되었다. 일찍이 일본 도쿄에서 재일교포 역사학자의 ‘100여 년 전의 부산’이라는 슬라이드 상영을 보면서, 부산에 대해 처음으로 알게 된 것들이 많아 부끄러웠던 적이 있었다. 혹 외국인 연구자 중에서 전근대 부산의 역사에 대해 우리 한국인보다 더 많이 알고 있어 놀랐던 기억이 있다.
잠시 발을 멈추고 가만히 들여다보면 지역 속에 매몰된 수많은 역사 이야기, 그리고 지명유래와 민속문화 속에 새롭고 흥미진진한 수많은 이야기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지명 속에는 그곳에 살아온 수많은 사람의 인정 넘치는 이야기들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21세기 세계화 시대 속의 진정한 국가 발전은 각 지역의 특성을 잘 살린 다양한 경제발전과 성숙한 문화환경 위에서 비로소 꽃피울 수 있다고 생각된다.
2. 부산에는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을까?
오늘날과 같은 부산의 지형은 1만 년 전쯤 형성되었고 그 이전에는 일본열도와 제주도가 육지로 연결되어 있었다고 한다. 일본열도나 제주도에는 구석기 시대 유적이 존재하는데, 그 당시 사람들은 걸어서 서로 이동했으나, 지형의 변화로 바다가 생기고 일본열도나 제주도가 섬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구석기 시대 사람들은 부산지역을 통해 일본 쪽으로 이동해 갔을 가능성도 있으며, 부산근교 바다 밑에는 이때의 유적이 있을 것으로 유추되고 있다.
한편 부산에 사람이 살았던 것이 언제부터라고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1990년 해운대구 청사포 구석기 유적 발굴과 1992년 해운대 좌동 신시가지 조성지역 발굴조사로 주먹도끼, 찍개, 모룻돌, 돌날, 망치 돌 등 다양한 구석기 유물이 출토되어, 대략 기원전 2만 년에서부터 기원전 1만 5천 년 전후로 추정되고 있다. 구석기 시대, 해운대에 살았던 사람들은 수십 명씩 무리를 지어 수렵채집 생활을 영위했던 것 같다.
그리고 신석기 시대에 부산에 살았던 사람들의 흔적은 조개무덤[패총․貝塚] 형태로 여러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다. 예를 들면 영도구 동삼동 1~2 패총, 아치섬, 영선동, 서구 암남동, 사하구 다대포, 북구 금곡동 율리, 강서구 강동동 북정 등등과 같이 부산의 남쪽 바닷가 지역에서 많은 조개무덤 유적지들이 있다. 특히 영도의 ‘동삼동 조개무지’는 남해안 패총 중의 최대 규모로 잔존상태도 매우 좋으므로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그리하여 부산 및 남해안 지역에서는 물론이고 우리나라 신석기문화 변천과 추적에도 매우 귀중한 학술적 유적지로서 손꼽히고 있다.
3. 부산이라는 지명의 유래
지명과 전설에는 그 지역 사람들의 정신과 민속이 반영되어 있을 뿐 아니라 그 지역의 정치․사회․문화․지리․역사적 발자취가 반영되어 있다. 따라서 어떤 지역에 대해 살펴보고자 할 때, 그 지역 주민들의 역사 및 생활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지명을 소홀히 다룰 수 없다.
우선 부산이라는 지명 유래는 가마솥같이 생긴 산[부산 釜山]에서 유래하며, 그 산 아래에 있는 포구가 부산포로서 동래부에 있었던 용당포, 감만포, 우암포, 백운포, 남천포, 개운포, 두모포, 감천포, 다대포 등 수많은 포구 중의 하나이었다. 그러한 많은 포구를 제쳐놓고 부산포가 동래부를 대표하는 포구로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바다 안쪽이 오목한 만으로 되어 거센 바람과 파도를 적게 받을 뿐만 아니라, 관아인 동평현과 그 주현인 동래현으로 오고 가는 교통의 요지로서 국내는 물론이고 일본을 비롯한 국외로 가는 교통 또한 편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한편 부산의 지명 변화에 대해 살펴보면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1486년)을 참조하면, ‘부산포는 부산 부곡에 있는 포구라 하여 부산포라 불리었다’라고 한다. 이 부산포는 1469년 조선 시대 성종 임금이 즉위한 한 달 뒤인 12월부터, 부자 부富의 부산포富山浦에서 가마 부釜의 부산포釜山浦로 바뀌게 된다. 그리고 1476년에 발간된 『해동海東제국기』에 소개된 ‘동래부산포지도’東來富山浦之圖에 의하면, 부산포의 위치는 오늘날의 동구 좌천동과 범일동 바닷가 지역에 해당한다. 부산이란 산은 현재 좌천동 배후에 있는 산[증산:甑山]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이 부산이란 산이 뒷날 증산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은, 임진왜란[1592~1598년] 때 이 부산이란 산에 왜군들이 성을 쌓았는데 그 성이 무너지고 보니 꼭 시루와 같다고 하여 증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4. 부산역사의 뿌리, 동래의 지명유래
오늘날 부산이라 불리는 지역의 조선 시대 행정명은 동래도호부이었다. 개항 이후[1876년] 근대화 과정 중에, 동래도호부 많은 포구 중의 하나이었던 부산포의 중요성이 주목받아 부산부라는 행정명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부산역사의 뿌리를 찾아가려면 동래부의 역사부터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삼국사기』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동래의 옛 국명은 거칠산국, 내산국, 장산국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원래 동래는 ‘독로’瀆盧라는 음에서 ‘독로→동네→동래’로 음전되어 불리어지게 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통일신라 경덕왕 16[757]년에 지방제도 개편 당시, 명칭을 모두 중국식 한자음으로 고침에 따라 동래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한편 거칠산군 또는 거칠산국은 ‘거친 뫼’, ‘황령산’荒嶺山에서 따온 것으로 볼 수 있다. 혹은 동래라 함은 동쪽[동해]의 내산을 말하는 것으로 이는 신선이 산다는 봉래산蓬萊山 또는 삼신산三神山의 약칭이라는 설도 있다.
◇박화진 교수
▷부산대학교 인문대학 사학과 졸업
▷일본 도쿄대학교 대학원 일본사학과 박사학위 취득(문학박사)
▷현) 부경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
▷저서 『부산의 역사와 문화』(2003), 『해양도시 부산이야기』(2018), 『해양도시 부산의 역사와 문화』(2019)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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