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5공 청산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회동한 야권 3김(왼쪽부터 김종필 김대중 김영삼) 총재. 한국정치사에서 3김 시대는 지역패권주의 시대이기도 하다.
정치권에 ‘패권주의’라는 용어가 춤을 추고 있다. 여야를 막론하고 요즘 정당 지도자들의 발언에 ‘패권주의’라는 단어가 포함되지 않은 경우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친노패권주의, 친문패권주의, 친박패권주의 등. 그런데 이들 단어는 십중팔구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겨냥한 말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한국정치 폐단의 상징 지역패권주의
패권주의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 패권(覇權)이란 ‘무력으로 천하를 다스리는 자의 권력’이란 뜻이다. 패권주의(覇權主義)는 원래 ‘강대한 군사력으로 세계를 지배하려는 강대국의 제국주의적 대외정책’을 일컫는 외교용어다. 영문표기 헤게모니(hegemony)를 중국신문이 패권주의로 표기한 데서 비롯됐다. 미국은 대표적인 패권국가이며, 일본 아베 총리는 동아시아패권 야욕을 드러내고 있고, 중국도 미국과 일본에 맞서 패권주의 정책을 노골화하고 있다는 식으로 쓰인다.
패권주의가 정치에 오면 어떻게 쓰일까? 정치에서 패권주의란 '강력한 정치세력에 의한 폐쇄적이고 일방적인 정치행태' 쯤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선 강력한 정치세력이 필요하지만 그 운영을 폐쇄적이고 일방적으로 해서는 곤란하다. 정치의 본질은 소통을 통한 공존공생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패권적 정치행태는 정치의 본질을 거스르는 것이므로 비난받아 마땅한 것이다.
1996년부터 20년간의 신문기사를 ‘패권주의’라는 키워드로 검색해봤다. 2000년대 초 '3김' 시대까지만 해도 패권주의 앞에는 거의 예외 없이 '지역'이란 단어가 붙어 ‘지역패권주의’라는 용어로 쓰였다. ‘지역패권주의적 붕당정치’, ‘망국적 지역패권주의’, ‘지역패권주의와 경직화된 정당체제’, 영남 패권주의 등. 특정 지역에 대한 특정 정당의 일당지배구조를 가리키는 말이다. 귀가 따갑도록 들은 지역주의 정치의 폐단을 가장 함축적으로 표현한 단어가 지역패권주의인 것이다.
1997년 15대 대선 3당 후보 TV 토론에서 이인제 후보는 “이회창 후보가 ‘이인제 찍으면 김대중 후보가 된다’고 하는데 이것은 새로운 지역패권주의”라며 이회창 후보의 사과를 요구한 흥미로운 사례도 있다.
제왕적 총재인 3김과 이회창에게도 'OO패권주의' 붙이지 않아
그런데 지역주의가 절정을 이뤘던 ‘3김 시대’, 지역의 맹주이자 제왕적 총재인 ‘3김’ 개인들에게 'OO패권주의’라고 하지는 않았다. '3김' 못지 않은 제왕적 총재로 군림한 이회창 총재에게도 패권주의라는 딱지를 붙이지는 않았다. 3김이 무서워서일까? 아니, '패권주의' 딱지가 너무나 큰 형벌이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다만, 손학규 의원이 “정당 내 패권주의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이 총재의 전횡을 비판했을 정도다.
‘패권주의’를 사람에게 처음 붙인 것은 2012년 7~8월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 경선 때. ‘문재인 대 비문재인’ 구도로 치러진 경선에서 당시 조경태(현 새누리당 의원) 의원은 문재인 후보를 겨냥해 ‘친노패권주의’라며 맹공을 퍼부었다. 또 경선 과정에서 손학규 후보의 ‘민주당 위기는 친노패권주의 때문’ 발언이 큰 논란을 야기하기도 했다.
문재인 후보가 18대 대선에서 패배하면서 ‘계파 패권주의’ 논쟁은 더욱 달아올랐다. 마침내 새정치민주연합 정치혁신실천위원회는 2014년 11월 전당대회를 앞두고 ‘계파주의 극복과 당 혁신 방안’ 토론회를 열기에 이른다. 이 자리에서 계파 패권주의에 대한 진단과 처방이 제시되기도 했다. 김태일 영남대 교수는 발제에서 문재인 의원을 겨냥, “새정치연합의 계파정치 문제는 결국 최대 최강 계파인 ‘친노’의 문제”라면서 “친노가 계파패권주의를 넘어서는 모습을 솔선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홍종학 의원은 “계파에 관한 부작용이 과대평가 돼 있다”면서 “새정치연합을 무력화하기 위해 계파논의를 확대재생산하는 측면이 있다”고 분석했다.
2015년 2월 전당대회에서 박지원 전 원내대표를 간신히 누르고 선출된 문재인 대표는 조경태, 안철수, 박주선 의원 등으로부터 ‘친노패권족’이라는 공격을 받았고, 결국 분당에 이르렀다.
'친노패권주의' 딱지를 맨 처음 붙인 사람은 조경태
그런데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태 이후 ‘패권주의’ 논란의 양상은 계통이 없어졌다. 예전엔 야권 내 비노비문계가 친노친문계를 공격하는 양상이었다면 이제는 새누리당에서 탈당한 비박계가 가세해 친박계와 친문계를 싸잡아 패권주의 청산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다. 4당 체제가 형성된 데다 조기대선이 기정사실화한 가운데 문재인 전 대표의 지지율이 계속 1위를 달리고 있다는 점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
정병국 개혁보수신당 창당준비위원장은 “친박패권주의뿐만 아니라 친문패권주의도 이 땅에서 사라져야 할 패권주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심지어 국민의당 주승용 원내대표는 “정권교체를 못하더라도 친문패권주의가 만연한 정당하고는 같이 할 수 없다”고 막말을 했다. 아무리 그래도, 이게 야당 원내대표로서 할 소리일까?
그러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국정농단의 공범인 친박들과 한솥밥을 먹은 개혁보수신당 의원들이 친박패권주의니 친문패권주의니 하며 비판할 자격이 있는 것일까? 게다가 야당을 향해 “이 땅에서 사라져야 할 패권주의”라고 하는 것은 정당한 비판일까?
김무성, 정병국, 주호영, 왜 친박패권주의는 몰랐을까?
물론 문재인 전 대표가 그동안 당내에서 ‘친노·친문패권주의’라는 직격탄을 맞는 데는 전혀 근거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문 전 대표는 새정치연합 대표시절에도 ‘비선 정치’ 비판을 받았다. 문 전 대표는 펄쩍 뛰지만, 항간에는 ‘3철’ 등의 비선조직이 입에 오르내리는 게 사실이다. 게다가 친노 정치인들의 뚜렷한 정치적 소신과 지지자들의 강력한 응집력도 보기에 따라서는 패권주의적이라는 오해를 살 만하다. 비문계 의원들을 향한 문 전 대표 지지자들의 문자폭탄 사례가 단적인 예다.
유력 대선 후보로서 '친문패권주'의 지적을 받는 문재인 전 대표는 아프게 새겨야 한다. 그렇다고 앞서가는 상대를 무조건 패권주의라는 딱지를 붙여 공격해도 좋다는 것은 아니다. 정치의 금도가 아니다. 적어도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의 부역자나 마찬가지인 새누리당 탈당파, 개혁보수신당 의원들이 친문패권주의 운운은 주제 넘는 소리다. 탄핵정국 이전에 이들이 언제 친박패권주의라고 한 적이 있었던가? 남의 눈에 티는 보면서 제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는 격이다.
대한민국 정치사에서 '지역패권주의' 해소만큼 무거운 과제는 없었다. 엄중하고 무거운 이름 '패권주의'를 단순히 상대 비판용으로 쓰는 정치인은 패권주의가 갖는 정치적 의미를 너무 가볍게 여기는 것이다. 유난히 친문패권주의, 친노패권주의를 노래부르듯 하는 사람은 누구였고, 또 누구일까? 20대 총선 직전 새누리당으로 날아간 조경태 의원, 새누리당 탈당파인 개혁보수신당의 정병국 창당준비위원장과 주호영 원내대표, 김무성 의원, 그리고 민주당 탈당파인 국민의당 주승용 원내대표, 박지원 의원 등. 다들 '너나 잘하세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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