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소득(basic income)에 대한 관견(管見) ➀프롤로그
기본소득(basic income)에 대한 관견(管見) ➀프롤로그
조송원
승인
2017.03.06 00:00 | 최종 수정 2020.03.14 1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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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팔트 위의 배추 한 포기.’ 해는 뉘엿뉘엿, 을씨년스레 찬기 품은 바람까지 분다. 산행을 마무리 지으면서 아스팔트 위를 걷는다. 발길에 뭔가 툭 걸린다. 울퉁불퉁 산길에 조심성은 진즉에 두고 왔는데 매끈매끈 아스팔트에서 뭐에 뒤채이다니… 기우뚱 섰다. 내려다본다. 웬걸, 배추 한 포기! 아스팔트 위에 배추라, 툭 차버리고 가던 길 다조질까? 하다가 말고 차려던 발을 다시 내려놓는다. 화장실에서 김 모락거리는 쌀밥 한 공기와 조우한 느낌이다. 이 생뚱맞은 아스팔트 배추를 만만하기도 하니 툭 차 버리고 싶다는 마음이 제일감이었다. 본능은 당연히 그런 행동을 유발한다. 그러나 우리 인생살이 대부분의 경우 진실은 항상 본능 너머에 있다. 해서 아스팔트와 배추 한 포기라는 이 짝맞지 않는 현실 상황에 대해 생각이라는 것을 해볼 수밖에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에 따르면, 이 배추는 씨앗이 밭이랑에 뿌려질 때 이미 아스팔트 위에 버려질 운명이었다. 농부가 배추밭을 일구면서 이 놈은 누구 집 김치가 되고 저 놈은 운반 중에 아스팔트 위에 버려져라, 이렇게 농사를 짓는다는 말이 된다.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가자. 대사상가나 위인도 어느 구석에는 산골 무지렁이보다 더 무지하다는 것을. 곧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는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대사상가도 우리가 사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어서 ‘해가 지고 해가 뜬다.’고 생각했다.
농부가 풀덤불 갈아엎어 이랑 짓고 파종하여, 가슴골의 땀방울과 마음속의 노심초사를 거름 삼아 속이 꽉 찬 배추 한 포기 한 포기들의 배추밭을 일군다. 잘 영근 배추밭을 휘둘러보면서 웃통을 벗어젖히고는 ‘올해는 날씨도 도와줘서 제대로 수확을 하게 되었다. 우리 먹을 김장거리만 제쳐놓고는…’ 하면서 상인에게 전화를 건다. 욕심이 과한 탓일까, 갑바(화물덮개)를 씌웠는데도 너무 고봉으로 실어 배추 포기들 위로 덮개가 들뜬다. 그래도 어쩌랴. 밭떼기로 샀으므로 가능한 한 많이 실어야 한다. 그래도 못 실은 포기가 여럿이다. 줄을 너무 꽉 조일 수도 없다. 배추가 상하면 안 되니까. 해서 넘치도록 싣는다. 기름 값이며 운송비가 얼마인데… 시간이 돈이다. 새벽시장에 닿아야 한다. 밟자, 과속 카메라에 안 걸릴 만큼은. 한데 아뿔싸, 앞에 경운기, 맞은편 차선에서도 승용차가 온다. 브레이크, 덜컥. 당연히 추돌은 면했지만 그 바람에 위태하게 조임줄에 빗물려있던 배추 한 포기는 트럭에서 이탈한다. 아, 아스팔트 위의 배추 한 포기! 허리 숙여 고이 껴들고는 몇 발짝 옮겨 밤나무 밑으로 던졌다. 김치가 되지 못해 완전한 삶은 못 되더라도, 거름의 보람이라도 가지라고.
아스팔트 위의 배추(A)와 새벽시장을 거쳐 무사히 주부의 손에 들어간 배추(B)와의 사이에 가치의 경중을 따질 수 있을까? A와 B로 갈린 원인은 순전히 우연이다. 더 나아가 A가 없었으면 남은 많은 B들 중에 하나는 A의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걸레도 버리는 것이 아니다. 방 안에 엎질러진 물이 있고 걸레가 없다면 수건으로 닦아야 한다. 곧 걸레가 있기에 수건은 온전히 수건 노릇을 할 수 있다는 이치다. 하여 걸레와 수건의 가치 경중을 따지는 일은 어리석음이다. 모든 존재는 존재 이유가 있다. 가치 경중을 따지기에 앞서 존중 받아야 한다. 더욱이 이 존재는 사라져 간 존재들에도 크게 빚지고 있다.
호프 자련<랩 걸, -나무, 과학 그리고 사랑. 김희정 옮김>에 의하면, 매년 지구 땅 위에 떨어지는 수많은 씨앗 가운데 싹을 틔우는 것은 그중의 5%로도 되지 않으며, 싹을 틔운 나무 중 1년을 버티는 건 또 그중 5%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하여 단언컨대, A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거나 스러져간 95%의 씨앗을 홀대한다면 우리 밥상 위의 김치를 바랄 수 없는 것에 한 걸음 더 나아가 지구의 허파인 나무숲이 사라져 버려 인류 자체의 생존도 불가능할 것이다. 자연이 이러할진대 영장이라고 하는 우리는 어떻게 하고 있으며 어떻게 해야 할까? 이건 ‘자연주의 오류’가 아니라 자연에서 지혜를 빌려오는 일이다.
꼭두새벽에 생활쓰레기를 저임금으로 수거해 가는 환경미화원과 탄핵 반대 집회에서 태극기를 흔드는 고임금의 국회의원, 누가 더 대접을 받아야 할까? 나라와 사회의 아무런 돌봄도 받지 못하고 사위스런 뭇 눈길 대상인 노숙자와 권력을 더럽게 사유화한 대통령에게 충성을 다한 ‘영혼 없는’ 고위 공직자, 누가 더 사회의 해악인가? ‘헬조선’의 대부분의 모순과 문제점들은 ‘기본 소득’으로 해소할 수 있다. 당장 이 제도를 시행할 충분한 경제적 여력이 있다. 정치적, 사회적, 철학적 당위성도 차고 넘친다. 하여 이어지는 글에서 기본 소득의 개념과 그 당위성을 하나하나 짚어나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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