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군 악양면 축지리 문암송. 2008년 천년기념물로 지정되었다.
하동 악양 축지리에 가면 ‘문암송(文巖松)’이라 불리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있다. 지역민에게는 꽤나 알려져 있고, 전국 각지의 ‘눈 호사’ 즐기는 이들도 제법 가풀막 마다 않고 발품을 파는 곳이다. 우리 민족에게 가장 흔하지만 가장 사랑받는 나무가 소나무다 보니 어느 동네인들 이름 높은 낙락장송이 없으랴! 볼품이야 여기서 저기인데 그래도 이름값을 하는 이유는 터 잡은 데가 바위라는 사실이다. 커다란 바위를 뚫고 자라나 있어 마치 바위에 걸터앉아 있는 형상이다.
‘평범함’이 진리이고 우리 일상이고 아름다움인데, 다들 ‘평범하지 않음’, 곧 ‘비정상’에 눈길을 돌린다. 지긋지긋한 일상 탈출로 색다른 풍광에 한 번씩 일탈하는 거야 뭐라 하겠냐만, 그 비정상에 해석이 고약할 때는 문제가 심각해진다.
“자 보십시오. 가슴 뭉클하지 않습니까? 땅이 척박한 정도가 아닙니다. 숫제 바위를 뚫고 거목으로 자란 이 생명력, 우리 민족의 저력이라 생각합니다. 이 문암송의 처지에 비한다면 우리의 경제적인 어려움은 차라리 꽃방석입니다. 누구 탓하지 마세요. 자신을 탓하세요. 이 문암송의 근성이면 이보다 더한 어려움도 외려 약과입니다. 그러니 좌절하지거나 누구 탓하지 말고 이 문암송의 끈질긴 근성을 배워 찬란한 미래를 창조합시다.”
짝짝짝, 박수갈채. 어느 ‘높으신 분’이 수하들과 동민들에게 했다는 연설이다. 부자는 농담을 잘한다고 했다. 별 시시껄렁한 말을 해도 듣는 사람들이 웃어주니까. 하니 진짜 감동을 받아 손바닥 아프도록 박수를 친 청중도 있을 것이고, 눈비음으로 박수 시늉만 낸 사람 또한 많으리라. 문제는 청중에 있는 것이 아니다. 세상살이의 어려움, ‘소비절벽’이라 이름 하는 현 경제 상황에 대한 ‘높으신 분’의 상황 인식이다.
아스팔트 위에 씨를 뿌려놓고 싹을 틔우지 못한다고 겨우 틔운 싹이 꺾인다고 씨앗을 탓하는 농부가 있다면, 우리는 그를 온전한 정신의 소유자라고 할 수 있을까? 잠을 줄여 새벽부터 해넘이까지 일한다, 사치라고는 시름풀이용 담배 하루 한 값. 그런데도 살림살이 무게에 허리가 꺾인다. 뭐가 잘못 되었을까? 사람은 혼자 살아가지 않는다. 체제 내의 존재이다. 살림살이에 미치는 영향은 개인보다는 체제가 우선한다. 우린 그런 경제 구조에 종속된 존재이다. 하여 개인이 부끄럽지 않게 노력했는데도 세상살이에 짓눌린다면, 자신을 탓하기에 앞서 한 번쯤은 사회체제, 경제구조에 대해 의심을 가져봐야 진정한 민주시민이다.
문암송은 우연의 산물일 뿐이다. 그 주위에 떨어진 수천 아니 수백만 씨앗은 삶터 잡을 수 없어 말라져 죽어갔다. 천행 만행으로 바위 틈새의 흙에 의지해 겨우, 어찌어찌하여 살아남은 것일 뿐이다. 이런 사실에서 뭘 배워? 확률이 거의 제로 가까운 삶에 목숨을 걸라고? 너나 잘하세요.
현 체제의 혜택을 독차지하고 있는 ‘높으신 분’과 ‘가진 자’들이 해야 할 일은 이런 씨도 안 먹히는 말장난이나 할 게 아니다. 산을 개간하여 옥토로 만들거나 최소한 바위에 떨어진 씨앗을 밭으로 논으로 옮겨주는 일이다. 그러라고 담배 값 반 넘어 떼어서 봉급 주고 대우해 주는 것 아닌가.
하여 문암송을 보면서 그들은 자신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아니, 우리가 그들에게 자신들의 책무를 다하지 못하고 자리보전하고 혜택만 챙겼음을 상기시키고 엄중 문책해야 한다. 우리가 하인이나 노예가 아니라 주인이지 않는가. 용이 물 밖에 나면 개미가 침노한다고 했다. 주인이 주인 노릇하지 못하면 하인(civil servant)이 주인 행세할 게 뻔한데, 이 거꾸러진 현실 누구의 탓이뇨?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 1861~1947)는 『관념의 모험(Adventures of Ideas)』에서 인간의 역사에서 활기차고 혁명적인 관념의 변천이 인간 사회의 현실적인 기본 조건들을 어떻게 변화시켜 왔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인간의 본질적인 권리’라는 일반 관념은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소수의 마음속에 들어있는 사변적인 착상으로 출발해, 어쩌면 지루하게 느껴질지도 모르는 장구한 변화의 시간을 거쳐 한 문명의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지배적인 일반 관념으로 성장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문명의 진보를 가로막는 ‘무분별한 작인’, 곧 힘이나 폭력에 의해 잠시 정체할 수도 있지만, 관념의 의식적인 영입이나 정신을 고양시키려는 철학 등의 ‘설득의 작인’에 의해 문명은 정점을 향한 모험을 계속하게 되는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인류의 역사를 ‘맹목적인 충동’과 ‘자각된 열망’과의 치열한 대립의 역사로 본다. 우리는 삶의 구석구석까지 침투해 있어 마치 공기와도 같은 당대의 확립된 사상이나 체제를 당연시 한다. ‘맹목적인 충동’이다. 곧 ‘헬조선’의 현실을 저주하면서도 받아들인다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는 ‘기본소득’이라는 ‘자각된 열망’이 맹목적 충동과 치열하게 싸워 그것을 압도할 때 우리의 현실은 혁명적으로 개선된다. 화이트헤드의 용어로는 문명의 진보이다.
명제가 참일 필요도 없다. 흥미로우면 족하다. 과거 노예제 상태의 인류에게 ‘인간은 자유롭다’라는 명제는 거짓 명제였다. 하지만 이 거짓 명제를 소수의 사상가들이 깊이 고찰하고, 인류가 흥미로움의 대상으로 점차 확대해 가면서 결국 인간의 해방을 불러왔다. 하여 거짓 명제야말로 문명을 기존의 정체 상태에서 벗어나 새로운 전진으로 전환시키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기본소득, 대한민국 국민이면 누구나 월 100만 원을 받을 수 있는 권리! 실현 여부는 한옆으로 밀어두고, 분명 흥미로운 명제인 것만은 부정할 수 없다.
문명은 참이든 거짓이든 이런 명제들에 대한 지적 모험으로 발전해 왔다. 현실적으로 ‘헬조선’의 정체 상태를 밑동까지 갈아엎을 대안은 기본소득이란 ‘관념의 모험’에 달려있다고 감히 주장한다.
다음 글에서는 기본소득의 당위성과 실현가능성에 대해 논의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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