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본세상 23-들어가는 글】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경계에서 - 김영춘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경계에서 / 김영춘 편집주간

인저리타임 승인 2024.01.04 02:38 | 최종 수정 2024.01.09 14:40 의견 0


#1. ‘묻지마 살인’이 유행하는 세상

2023년 7월 21일 오후 2시경 신림역 인근 상가골목에서 33세 조선이 흉기로 길 가던 20~30대 남자들을 공격해 1명이 사망하고 3명은 부상을 입었다. 그 얼마 후인 8월 3일 오후 6시경 분당 서현역에서는 22세 최원종이 승용차를 몰고 인도로 돌진하여 5명을 친 후 인접 백화점에서 무차별 흉기를 휘둘러 9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결국 차에 치인 여성 2명이 사망하였다.

이들 범행의 공통점은 대낮에 아무런 은원 관계가 없는, 거리의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끔찍한 범행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국민들은 언제 어디서라도 자신이 똑같은 일을 당할 수 있다는 불안감에 몸을 떨었다. 언론은 범행 동기에 대한 전문가 진단을 보도하지만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전하지 못한다. 문제가 있는 극소수의 어쩔 수 없는 일탈로 치부하고 마는 것인가? 일상의 삶 속에서 그냥 길을 오가는 평범한 시민들이 그런 횡액을 단지 운에 맡겨야 하는가? 그러한 일탈자들을 잉태한 우리 사회 내부의 문제는 어떤 것인가? 정신적, 사회적 소외와 일탈을 최소화하는 근원적 처방은 불가능한 것인가? 등등의 질문이 생겼다.

그래서 이번 23호의 기획특집을 ‘묻지마살인’으로 잡았다. 먼저 범인은 어떤 사람들인가, 왜 길가는 행인을 향해 살인의 흉기를 휘두르는가 등의 의문을 범죄심리학자들인 동의대 박철현 교수와 부경대 함혜현 교수를 통해 풀어보고 대책을 들어본다. 그리고 사회학자인 고려대 김윤태 교수의 진단을 통해 보다 폭넓은 해답을 찾아보고 여수 금오도에 사는 문화심리학자 김정운 박사가 제시하는 처방을 들어보기로 했다. 사회적 병리 현상은 집단적 치유 노력 없이 방치되면 그 정도가 점점 더 심각해질 것이다. 우리 주변에서 또다시 재현될 수 있고 우리 자신이 그 희생자가 될 수도 있겠다는 위기감과 해법을 독자들과 공유해 보고자 한다.

#2. 팔레스타인의 살육

먼 나라 이야기지만 이스라엘과 가자 지구에서 들려오는 뉴스들 역시 인간과 인간사회에 대한 짙은 회의감이 들게 만든다. 지난 10월 7일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는 이스라엘 지역에 침투해 집단농장과 음악축제장 등의 민간인들을 공격하여 1,400여 명을 살해하고 200명이 넘는 인질을 납치해갔다. 그중 어린이가 20명이다. 이스라엘은 그 보복으로 가자지구를 폭격하여 1만 명 이상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사망했고(하마스 주장) 이어지는 지상군 투입으로 가자지구에서는 실로 지옥도의 참상이 빚어지고 있다 한다.

국가, 민족, 종교의 이름으로 치러진 대량 살육의 역사가 잦아드는가 싶어 인간의 정신문명과 국제적 협력의 승리를 조심스럽게 전망하던 시대에 인류는 다시 스스로의 야만성을 드러내는 행동을 서슴지 않고 있다. 푸틴의 러시아가 일으킨 우크라이나 전쟁 역시 그러하다. 지금의 동북아와 한반도 정세로 보면 북한 혹은 중국발 무력충돌, 나아가 전쟁 발발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우리가 휴전 이후 70년 넘게 누려온 평화의 복지가 하루아침에 무너져버릴 수 있다는 이야기다. 어떤 일이 있어도 그런 일만은 막아야겠다.

#3. 모두 함께 하는 정신문명운동

사단법인 인본사회연구소는 이 물신주의, 경쟁 지상의 사회에서 그래도 사람의 향기가 넘치는 세상을 만들어보자는 모임이다. 그래서 묻지마살인이 유행처럼 번지는 지금 세상이 더 아프다. 우리는 이런 현상이 가정과 학교 안팎의 숱한 폭력과 그에 대한 눈감기, 교사와 청소년들의 자살, 증오의 정치 등과 같은 뿌리에서 나온 일들이라 생각한다. 가정, 학교, 종교, 언론 등 거의 모든 사회적 공간의 물신화가 그 뿌리이다. 그래서 이번 호의 특집은 우리가 ‘사람의 문제’에 더 집중해야 되겠다 하는 다짐이기도 하다.

이번 호 현장 이슈로서는 기초학문에 대한 국가연구개발 예산 삭감의 문제점을 집중적으로 파헤친 류지석 대표의 글이 실렸다. 나여경 소설가의 재미있는 콩트가 새로이 선을 보였고, 연극 연출가 출신 손태민이 처음 글을 올린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관람기도 재밌다. 역시 《인본세상》에 처음 글을 쓴 부산출판문화협회 정진리 국장의 《분노의 포도》 읽기는 우리가 미처 생각지 못했던 한국의 수도권 집중 현상과 그 가운데 소외되는 청년 실업자들의 문제를 20세기 초반 캘리포니아의 노동 상황과 잘 연결시켜 파헤쳐 주었다. 부산의 청년 자영업자 장백산의 커피 이야기는 우리가 늘 마시면서도 잘 몰랐던 커피세계 엿보기와 함께 지역축제의 현황 및 방향성에 대한 좋은 문제 제기이다. 탈북민 출신(북향민) 조경일 작가의 공개처형 참관 경험담도 폭력에 대한 세뇌를 비롯해 많은 것을 생각게 만드는 글이다.

인본사회연구소는 인본주의에 기초한 일종의 정신문명운동을 벌이고 있는 중이다. 이 운동은 다른 많은 풀뿌리 조직들과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이루어질 때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비슷한 지향을 갖고 각 지역, 각 부문에서 지속적으로 구성원들의 정신적 텃밭을 가꾸고 주변을 윤택하게 만들어갈 때 좋은 사회의 기초가 마련될 것이다. 심지어 부박(浮薄)한 정치를 바로잡는 시민의 힘도 이런 정신의 토양이 풍성해질 때 더욱 굳건한 지속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김영춘 전 장관

◇ 김영춘

▷제 16·17·20대 국회의원, 제20대 해양수산부 장관, 제34대 국회사무총장

▷현 (사)인본사회연구소의 정기간행물 『인본세상』 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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