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현숙 시인의 '詩의 아고라'(115) 숫돌, 장옥관
손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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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27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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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돌
장옥관
핏물 번진 살점 헤집으며
날뛰던 칼을
몇 방울 물로 고요히 잠재우는 숫돌
쭈그려 칼날 벼리다보면
이제껏 온전히 날 내어준 적 없었구나
사랑이든 혁명이든
마땅히 밀어붙여야 할 뜨거운 순간에
슬며시 몸 빼 혼자 쏟은 일
어디 한두 번인가
계류의 모난 돌멩이 오래 씹어
모래알로 게워내는
하류의 강물은 아닐지라도
내 속의 숫돌 너무 거칠어 불꽃만 일으키고
이순(耳順)이 되도록 시를 써도
숫돌은 다듬어지지 않네
이 거친 숫돌로 무엇을 벼릴까
틈만 나면 피어오르는 검은 구름 끝내
주저앉힐 수도 없으면서
장옥관 시집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을 읽었다. ‘문학동네’ 2023.
누구나 가슴속에 늙지 않는 짐승 한 마리씩 키우고 산다. 그 짐승 세상 밖으로 꺼내 놓으면 손가락질받을 수도 있겠고. 더러는 제 속의 짐승을 저조차 눈치채지 못할 수도 있겠다. 어쩌다 저가 저를 다스리지 못하는 날, 그 짐승 시뻘건 혀 빼물고 제 갈 길에서 또 멀어지는 걸음 재촉할 수도 있겠지만. 시인은 이순(耳順)이 넘도록 시를 써도 자신이 벼리고 벼리던 제 속의 숫돌은 도무지 다듬어지지 않는다고 고백한다. 아니 오히려 “이 거친 숫돌로 무엇을 벼릴까/틈만 나면 피어오르는 검은 구름“ 주저앉힐 수도 없다고는 말하지만 시인이여, 사랑이든 혁명이든 그 뜨거운 순간에 다시 한 번 찬란하게 일어서도 좋겠다.
◇손현숙 시인
▷199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너를 훔친다》 《손》 《일부의 사생활》《경계의 도시》(공저) 《언어의 모색》(공저)
▷사진산문집 『시인박물관』 『나는 사랑입니다』 『댕댕아, 꽃길만 걷자』
▷연구서『발화의 힘』, 대학교재『마음 치유와 시』▷고려대 일반대학원 문학박사(고려대, 한서대 출강)
▷현 조병화문학관 상주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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