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말
이야기할 수 없는 무엇을 마음에 담고 살았다.
'쓸쓸'이라는 단어가 내 뒷모습 같기도 하고, 내가 내민 손을 누군가 그냥 잡아주기를 원했던 것 같기도 하다.
시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
구체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말해야 하는 무엇, 정서.
그렇게 혼자 오래 걸었던 기억.
생각해보면 그것은 타인을 찾아 방황했다기보다는 내 속의 내가 궁금해서 남겼던 흔적이 아닐까. 타인의 연속은 나였음을 부정할 수 없겠다. 어쩌랴, 멀어도 걷는 사람이되어서 기어이 닿고 싶은 그곳, 비록 죽는 날까지 닿지 못한다고 해도 나는 걷는 사람, 멀어도 간다.
손현숙 시인이 네 번째 시집 《멀어도 걷는 사람》(리토피아포에지)을 냈다. 199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한 손 시인은 자신만의 독특한 언어로 인간 존재의 본질, 삶과 죽음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시인으로 통한다. 지난 주말 부산을 찾은 손 시인을 만났다.
Q1. 시집 《멀어도 걷는 사람》 발간을 축하드립니다. 소감이 궁금합니다.
▶손현숙 시인 : 소감이라... 시인이 시를 쓰고, 또 시집을 내고, 여기에는 소감이랄 게 없어요. 그냥 사람이 만나면 밥 먹고 사랑하고 헤어지고 하는 것처럼, 시인이 시집을 내는 것은 그냥 그냥 일상이에요. 그래서 제게는 시집 출판기념회 뭐 이런 거 없어요. 이 골목에서 시집을 내는 것은 자신만의 향연이지 누구에게도 위로가 되지도 않고 큰일도 아니에요. 이번 시집은 그냥 제가 여태까지 살아온 것을 묶은 거예요. 그냥 5년 동안 매일 정말 에브리데이 시를 생각하고 살았잖아요, 그것을 언어화한 것일 뿐 아무것도 아니에요. 굳이 소감이라면, ‘그냥 묶었다’, ‘그냥 집 하나를 새로 지었다’쯤 될까요.
집을 지으면서 매번 똑같은 집을 지으면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다른 집을 짓기 위해서 내 몸을 바꿔야 해요. 부산에 온 이유 중 하나도 몸을 바꾸기 위함입니다. 장소를 바꾸면 몸이 좀 바뀌니까. 사실 맨 처음에 부산에 올 때는 미국 가는 것만큼 멀었는데 지금은 대전쯤으로 가까워졌어요. 어제 아름다운 해운대해변의 노을 보니 되게 슬프더라고요. 너무 아름다우니까 너무 슬프더라고요. 선배 시인이랑 함께 오지 않고 혼자 왔으면 많이 울었을 것 같아요. 왜 슬프지, 나는 왜 이렇게 슬프지? 뭐 이런 생각하면서 다음 시집은 슬픔에 관한 이야기를 좀 할 것 같다는 예감을 했어요. 이번 시집은 패배에 관한 얘기고요.
Q2. 이번 시집은 어떤 시편들을 담았나요?.
▶손현숙 시인 : 저의 네 번째 시집이고 저서로는 열다섯 번째예요. 지난 5년간 삶과 생각, 질문들을 묶은 거죠. 돌아가신 아버지, 투병 중인 엄마 얘기도 있어요. 이번 시집은 나의 패배 선언이예요. 내가 졌지만, 나는 세상으로부터 졌지만 당신들로부터 진 것이 아니고 나한테 진 것이라는 선언. 나는 여러분이나 당신이나 다른 타자가 나를 이렇게 판단하게 두고 싶지는 않아요. 근데 저는 진 것 같아요. 졌고 가지고 있는 게 없는 거예요. 하여간 패배에 관한 이야기, 패배에 관한 기록이에요. 시집을 쭉 보면 지나간 사람들, 죽은 사람들이 생생하게 등장해요. 돌아가신 아버지 얘기도 많거든요. 근데 아버지는 내 속에 살아있는 거잖아요. 그렇지만 아버지를 놓친 거는 나에게는 패배죠. 나에게는 패배예요. 어떤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 사람을 못 만나는 것도 세상의 잣대와는 상관없이 나에게는 패배예요. 만나고 살고 싶은데 갈 수가 없어요. 그것도 패배예요.
Q3. 표제시 〈멀어도 걷는 사람〉 해설을 부탁합니다.
멀어도 걷는 사람
당신의 왼손은 나의 오른손이다. 우리는 손을 잡고 반대쪽으로 걷는다 가끔은 당신을 잃어버리기도 하는데, 들판을 가로지르는 나무들 하얗게 손사래 친다 생각난 듯, 이름을 부르면 모르는 얼굴이 뒤돌아다 본다
당신은 어깨를 찢어서 부글거리는 흰피, 휘파람을 불면 꽃들은 만발한다 가을 개 짖는 소리는 달의 뒷면에서 들려오고 눈을 뜨지 못한 강아지는 꿈 밖으로 나가서야 젖꼭지를 물 수 있는데
담장밖에 둘러쳐진 오죽의 둘레는 그림자가 없다 대나무 숲으로 돌아가야 이름이 돌아오는데, 당신은 멀어도 걷는 사람 도무지 말을 모르겠는 여기, 눈빛으로 기록된 말들 속에서 없는 당신은 다정하다
▶손현숙 시인 : 그냥 계속 간다는 거죠.
Q4. 시를 보니까, 화자는 물론 시인일 텐데, 화자의 대상인 ‘당신’도 시인 같네요.
▶손현숙 시인 : 맞아요. 제가 주목받는 시인은 아닌데 굉장히 많이 회자가 되는 이유가 있어요. 시 속의 화자가 나의 화자도 되고 ‘당신’의 화자도 되는데 그 둘이 함께 이렇게 합의를 해요. 나는 당신을 놓쳐 없는 당신이지만 당신을 향해서 간다고, 근데 당신은 그걸 몰라도 괜찮다고 하죠. 그거는 내 속에서 내가 어떤 것을 이루고자 하는 것은 아니에요.
세상의 잣대하고는 너무 다르고 그냥 여기서는 없는 당신이에요. 그래서 없는 당신이고 왼손과 오른손은 헤어지는 방향으로만 있어요. 그래서 만나지지가 않는 얘기를 하는데, 사람이 만나지지 않는 사람을 그리워하거나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을 생각할 때는 슬프죠. 그죠? 그거는 안 되는 거잖아요. 근데 여기 있는 화자나 시인은, 나는, 그러니까 손현숙이라고 그래도 좋고, 살고 싶은 나일 수도 있고, 그 화자는 그럼에도 합의점이 없고 소실점이 없는데도 간다, 라고 얘기하면 그게 뭐예요? 지는 거잖아요. 안 되는 거잖아요. 근데도 간다고 얘기하는 거잖아요. 그냥 안 되는 거 절대로 못 만나져요. 그리고 만나면 피가 나고 근데 그거는 세상에 없는 흰 피, 좀 슬프잖아요.
이게요, 멀어도 걷는다는 게 되게 공허한 얘기예요. 이게 닿지 못한다는 얘기인데 과연 가능할까 가능하지 않다는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근데 가능하지 않아도 가겠다는 얘기예요. 나는 간다 그냥 그리고 당신하곤 상관없다는 얘기예요.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건 난 상관없다. 나는 당신을 사랑해도 당신은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된다. 상관없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겠다. 근데 그 당신은 신도 되고 세상도 되고 선생님도 되고 그런 얘기예요.
Q5. 시인 손현숙에게 이번 시집의 의미는 뭔가요?
▶손현숙 시인 : 시를 오래 썼죠. 오래 썼는데 이번 시집이 첫 시집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사실, 언어로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언어는 모두 다 언어를 배반하고 언어를 버리고... 그런데도 언어를 가져와야 하기 때문에 언어로 무엇을 한다는 것은 불능해요. 그래서 이 시집은 어떻게 보면 제 패배의 선언, 뭐 이런 거예요. 나는 어차피 패배한 사람이고.
Q6. 그래도 계속 걸어가겠죠? 시집 제목 ‘멀어도 걷는 사람’처럼.
▶손현숙 시인 : 그렇죠. 그러니까 이길 수 없는 사람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 마지막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번 가보는 거죠. 그러니까 언어를 찾아내고 언어를 쓰고 또 언어에게 배반당하고 또 언어를 놓치는 거죠. 하지만 또 끝까지 가보는 것, 그리고 언어가 할 수 있는 일을 한번 끝까지 해보고 싶은 거예요.
언어가 할 수 있는, 시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여기에는 이미지가 많고 거의 다 이미지로 인간을 얘기하고 있는데요, 관계 이야기, 사랑 이야기도 많죠. 근데 그거는 실패한 이야기 그리고 미래에 실패할 이야기들이 많아요.
Q7. 시란 무엇입니까?
▶손현숙 시인 : 모르겠어요. 저는 모르겠어요. 그러니까 그냥 만약에 제가 시가 뭐라는 걸 알면 시를 안 쓰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이게 끊임없는 질문이에요. 이제 요거 하나는 알겠어요. 신은 언어로 뭔가를 한다는 건 알겠어요. 언어가 있어서 언어로 뭐를 한다는 건 알겠는데 시가 뭐냐고 하니까 말문이 막혀요. 어쩌면 고해성사하듯 내가 나에게 하는 고백 같은 것이라고 할까요? 고해성사로 위로받듯이 저 자신의 고백에서 위로를 받아요.
Q8. 시는 대상한테 ‘말 걸기’라고 하는 말도 있던데요.
▶손현숙 시인 : 시는 ‘사물에게 걸어가기’라고도 하죠. 볼품 없고 하잘 것 없는 사물들, 그들과 시선을 맞추고, 다가가 말을 걸고, 껴안고 하죠. 그 사물이 나 자신일 때도 많죠. 우리 시인들은 다 물활론자예요. 나는 사물들 자체가 다 변한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멀어도 가겠지만 답을 들을 수는 없을지 몰라요. 시인은 질문하는 자예요. 사물에게 걸어가고 질문하지만 답은 없죠. 제가 문학사상에서 첫 시집이 나왔을 때 신문사 인터뷰를 많이 했어요. 그때마다 되게 자신 있게 얘기했어요. 시는 뭐다 뭐다, 라고. 되게 부끄럽네요. 그게 치기였다고 생각해요. 지금은 정말 시가 뭔지 모르겠어요.
Q9. 시인이 되겠다고 마음 먹은 건 언제인가요?
▶손현숙 시인 : 저는 감히 시를 쓸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어요. 집안에 시를 쓰는 사람들이 있는 것도 아니고 대단하게 문학적으로 뭐가 있는 사람도 아니었어요. 여고생 때 대학생을 사귄 적이 있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게 첫사랑이 아니었나 싶어요. 하루는 그 친구가 연필로 쓴 시를 묶은 ‘석정(石井)’이라는 시집을 나에게 선물했어요. 그건 제게 충격이었어요. 인간이 어쩌면 이렇게 아름다운 언어로 자신을 표현할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요. 그게 제가 시를 생각하게 된 시작이었어요. 그날 이후 시인 소리를 듣기까지의 얘기는 연말 페이스북에 올린 글로 대신할게요.
등단 증빙을 꾸리느라 등단지를 뒤졌다. 12월 신춘시절이 돌아오면 혼자 비밀결사대처럼 꾸렸던 시 원고뭉치들. 스무살 조금 넘어 무렵부터 맨날 그랬다. 12월이 되면 어김없이 잠수를 타는 나를 보고 친구들은 걱정이 태산이었다. 내가 남자랑 살림이라도 차렸을까 봐 경계가 삼엄했다. 시를 쓴다는 것은 그렇게 내게도 남에게도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감히 나는 시인을 꿈꾸면 안 되는 사람 같기도 했다. 넘보면 안 되는 꿈을 꾸는 불온한 사람인 것 같아서 난 내가 시를 쓰고 읽는다는 사실을 꽁꽁 숨겼다. 시를 배운 적도 없고 집안에 시를 쓰는 사람도 없었다. 다만 고3 어느 겨울 날, 아주 높고 맑고 못 되고 아름다웠던 그 아이에게서 '석정'이라는 자전 시집을 선물 받기 전까지는 꿈도 꿔보지 못했던 시인. 그렇게 비밀스럽게 쓰고 읽었던 시들은 사실 시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도 내게는 엄청났던 재산이고 비밀이었다. 생각해보면 쓸쓸하고 외롭고 두렵고 무서운 시간에 나는 시 비슷한 것들을 끄적였던 것 같다. 무지막지 신춘문예는 보나 마나 떨어지고. 시간은 제멋대로 굴러 굴러 나는 시인을 잊었다. 시도 잊었다. 그리고 또 어찌어찌 혼자 시라소니처럼 덜컥 시인이 되었다. 선생도 친구도 뭣도 없는 이 나라에 알몸으로 입성을 했다. 아직도 시가 무섭고 시인이 두려운 이유이기도 하다. 줄창 내 친구들이랑만 놀고 시인이랑 노는 일은 심호흡을 해야 하는 근원적 쓸쓸함이 아마도 이 덜컹, 에 있지 싶다. 그러거나 말거나 12월, 신춘의 시간이 지나갔다. 올해도 난 병신처럼, 물론 혼자 12월을 앓았다. 투고해야 할 것 같은 주책이 내 몸속을 지랄병처럼 돌아다녔다. 아직도 꿈속에서는 신춘을 기다리는 내가 나를 안쓰럽게 바라보는 꿈을 꾼다. 시가 좋았던 걸까, 시인이 되고 싶었던 것일까. 여전히 시는 잘 못 쓰는 시인이고. 그럼에도 허접하게 나는 손 시인으로 불리는 것에 이제는 익숙하다. 문득 왜 부끄러운 것인지. 이제는 정말 시를 쓰고 싶다. 내가 부르지 않아도 저절로 내 몸속으로 들어오는 걔들을 곱게 받아쓰는 정말 시다운 시인이 되고 싶다. 이것도 꿈이겠지만, 꿈이라도 깨끗하게 꾸고 싶다. 그때처럼.
Q10. 시인으로서 소망이 있다면?
▶손현숙 시인 : 쓰는 것 자체가 꿈이었기에 더 큰 욕심은 없어요. 그래도 만약 꿈이 허락된다면 더 좋은 세상, 약자와 소수자들이 조금은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나의 언어가 역할을 했으면 해요. 아무것도 아닌 내가 시를 쓰면서 살 듯이 여러분들도 나처럼 비록 비루하고 구차하더라고 살아 있어서 괜찮다는 생각을 하면 좋겠어요.
◇손현숙 시인 약력
▷199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너를 훔친다》 《손》 《일부의 사생활》《경계의 도시》(공저) 《언어의 모색》(공저) 《멀어도 걷는 사람》
▷사진산문집 『시인박물관』 『나는 사랑입니다』 『댕댕아, 꽃길만 걷자』
▷연구서『발화의 힘』, 대학교재『마음 치유와 시』▷고려대 일반대학원 문학박사(고려대, 한서대 출강)
▷현 조병화문학관 상주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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