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밖에 모르는 사람은 말하기를 좋아한다. 많이 아는 사람은 침묵을 지킨다. 조금밖에 모르는 사람은, 자기가 아는 전부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모든 사람에게 말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많이 아는 사람은, 자기가 모르고 있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를 알고 있다. 그래서 필요할 때만 말을 하고, 질문을 받지 않으면, 침묵을 지키는 것이다. -장자크 루소(1712~1778)-
이 잠언(箴言)은 톨스토이의 『인생론』의 140가지 짧은 이야기 중 하나이다. 이 책에는 톨스토이가 직접 쓴 글과 동서양을 막론한 수많은 작품과 선집에서 톨스토이가 직접 선별한 내용을 금언 형식의 짧은 이야기를 싣고 있다. 루소, 아우렐리우수, 파스칼, 부처, 노자 등의 글이 발췌 대상이었다.
조금밖에 모르는 사람이 말이 많은 이유와 많이 아는 사람이 말이 적은 이유를 간명히 보여주는 통찰적인 글이다. 루소의 이 글을 보면서 당연히 노자가 연상되지 않을 수 없다.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知者不言),
말하는 사람은 아는 사람이 아니다(言者不知).
- 노자/제56장 -
두 번째 구절 言者不知를, 대부분의 번역서들은 축자역(逐字譯)으로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고 번역한다. 묵점 기세춘 선생만이 ‘말하는 사람은 지자(知者)가 아니다’라고 풀이했다. 知를 知者의 줄임말로 본 것이다. 묵점 선생의 번역을 취한다.
묵점 선생이 굳이 설명하고 있지는 않지만, 선생의 번역을 취한 내 소견은 다음과 같다. 이 문장은 ‘말을 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知者(아는 사람)과 言者(말하는 사람)을 대비시켜, ‘알거나 말하는’ 목적어의 뜻을 분명히 하기 위해 써졌기 때문이다.
그 목적어는 물론 ‘도’(道)이다. 그러므로 ‘도를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도를 말하는 사람은 도를 아는 사람이 아니다.’고 풀어 쓸 수 있다. 그렇다면 왜?
그 답은 『노자』(도덕경)의 제1장에 있다.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이 초보적인 한자 5개로 이루어진 간단한 문장의 해석도 역시 구구하다. 그러나 이 문장의 해석력이 노자철학 이해의 내공을 말해주는 표지(標識)가 된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도는 가르쳐 말할 수는 있지만,
그 가르쳐 말한 도는 ‘상자연(常自然)의 도(道)’가 아니다.
이름(名)을 불러 분별(分別)할 수는 있으나,
그것은 상자연의 명분(名分)은 아니다. (기세춘)
‘도’라고 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닙니다.
이름 지을 수 있는 이름은 영원한 이름이 아닙니다. (오강남)
두 가지 번역 다 이해하는 데 만족스럽지 못하다. 기세춘의 것이 정확하지만, 상자연과 분별과 명분에 대한 선행 이해가 없으면, 이해할 수 없다. 오강남의 것은 ‘말할 수 없는 것’ 혹은 ‘이름할 수 없는 것’을 말하거나 이름하여, 오해를 불러일으켜, 본뜻을 곡해하게 할 위험이 있다.
‘道可道’의 두 번째의 도는 ‘길 도’가 아니라, 동사로서 ①말하다 ②이끌다 ③가르치다 ④무지를 깨우치다, 등의 뜻을 지닌다. 그리고 한문에서는 같은 글자가 문장 위치에 따라 체언(주어, 목적어 등)으로도, 용언(서술어)으로도 쓰인다. 곧, 名은 이름으로도, 혹은 이름나다, 지칭하다로도 쓰인다.
언어의 뜻은 사회적 약속이다. 책, 연필, 강, 하늘, 천둥 등 오감으로 알 수 있는 구체적인 지시물에 대해서는 서로의 오해 여지는 없다. 화자(話者)의 머릿속에 떠올린 지시대상과 청자(聽者)의 지시대상과 별반 차이가 없다.
그러나 지시대상이 구체물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떠올린 대상이 화자와 청자가 같은 것은 아니다. ‘술 한 잔 하자’고 할 때, 사는 처지나 형편에 혹은 취향에 따라, 막걸리, 소주, 맥주, 양주 등 그 술을 각기 달리 받아들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오감으로 알 수 없는 형이상(形而上)의 개념어에 대해서는 오해의 여지가 많다. 공부도 수험생들의 공부와 승려들의 공부는 그 뜻이 다르다. 하물며 고도의 추상적 개념어에 대해서는 선행학습이 있어야 이해할 수 있다.
무학의 할머니들에게 민주의의와 삼권분립과 외교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들에게 독재자와 대통령을 구분하게 할 수 없다. 왕이란 단어 하나로 족할 뿐이다.
따라서 언어도단(言語道斷)이란 말이 생긴 것이다. ‘말길이 끊어진다’는 것이다. 말은 그 자체로 고유한 의미를 지니지 않는 소리일 뿐이다. 사회적 약속으로 그 소리에 의미를 부여했을 때, 말이 된다. 하여 ‘개소리 한다’고 하지 ‘개말하고 있네’라고 말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지극하고 미묘한 정신적 경험 혹은 독각(獨覺)을 했다고 하자. 그걸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그에 맞는 낱말이 없기 때문이다. 언어가 사회적 약속이라는 의미는 곧 사회구성원 대부분이 같이 알고 있는 내용이라는 사실을 전제한다. 한데 그것을 뛰어넘은 그 무엇이라면? 말로 표현할 수 없다.
하여 ‘도를 도라고 말하면 도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아주 좋은 예화를 장자한테서 들을 수 있다.
세상이 귀하다고 말하는 것은 책이다.
그러나 책은 말에 불과할 뿐이니, 말이 귀한 것이다.
그런데 정작 말이 귀하게 여기는 것은 뜻이다.
그러나 뜻은 따르는 것에 있다.
그런데 문제는 뜻이 따르는 것은 말로 전할 수 없다는 것이다.
(……)
환공이 마루 위에서 독서를 하는데, 마루 아래서는 윤편(輪扁·바퀴 기술자)이 바퀴를 만들고 있었다.
윤편은 망치와 끌을 놓고 올라가 환공에게 물었다.
“감히 묻습니다. 공께서 읽는 책을 무엇이라 합니까?”
환공이 답했다. “성인의 말씀이다.”
윤편이 물었다. “성인이 있습니까?”
환공이 답했다. “이미 돌아가셨다.”
윤편이 말했다.
“그러면 군주께서 읽은 책들은 죽은 사람의 시체일 뿐입니다.”
환공이 말했다.
“과인이 독서를 하는데, 공인(工人) 따위가 어찌 용훼(容喙·간섭하여 말참견함)하는가? 나를 설득하면 좋지만, 설득하지 못하면 죽일 것이다.”
윤편이 말했다.
“신복합니다. 신이 하는 일로 본다면, 바퀴를 깎는데 느슨하게 하면 헐거워 견고하지 못하고, 단단히 조이면 빡빡하여 들어가지 않습니다. 느슨하지도 않고 빡빡하지도 않게 하는 것은 손으로 얻어지고 마음으로 감응할 수 있을 뿐, 입으로는 말할 수 없습니다.
이치란 그런 사이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신도 신의 아들놈에게 가르쳐줄 수 없고, 신의 아들 역시 신에게서 물려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칠십 년을 일하며 늙었으나, 아직도 수레를 깎고 있는 것입니다.
옛사람도 전하지 못하고 모두 죽었습니다. 그런즉 군주께서 읽는 책들은 죽은 사람의 시체일 뿐입니다.” -장자/천도(天道)-
<작가/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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