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과 ‘상식’ 이 두 말을 기치로 들고 윤석열은 2년 전에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 ‘공정과 상식’이 2년이 지난 2024년 4월 10일 심판대에 올랐다. 역대 대통령들은 예외없이 기치를 하나씩 들고 있었다. 전두환의 ‘정의로운 사회,’ 김영삼의 ‘성역없는 수사,’ 이회창의 ‘법대로,’가 그 대표적인 예들이다. 그런데 예외없이 자기가 내 세운 말에 자기 자신이 말 몫 잡혔고, 결국 그 기치(돛)가 덫이 되고 말았다. 우리 국민들은 자기 말에 자기의 행동이 상위相違할 때 즉, 자어상위일 때 가장 준엄한 심판을 내려 왔다. 4월 10일, 윤석열 대통령 역시 예외없이 ‘공정과 상식’ 이란 자기 말에 자기가 걸려 넘어졌다. 우리 민중의 의식 수준은 자어상위를 저지르는 그 누구도 용납 하지 않는다이고, 그것이 이 번 총선에서도 적중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에서도 공정이 최고의 덕목이고, 특히 존 롤스 같은 법철학자는 공정 정신의 화신이라 할 정도이다. 밀의 공리주의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론이 불공정을 초래할 것은 명확하다. 최대 다수의 불공정을 전제한 사상이기 때문이다. 이를 반대한 칸트는 동기의 주요성과 공동선을 지향한다. 이에 대하여 존 롤스는 평등 옹호론자로서 공정의 가치를 누구보다 강조한 법철학자이다. 롤스를 이번 대선에 불러와야 할 필요성을 절감한다.
롤스에 의하면 공정의 첫 번째 조건은 언론과 종교의 자유이고, 두 번째 조건은 사회적 그리고 경제적 평등이라고 한다. 윤석열은 2021년 6월 29일 대선 출마 선언에서 문재인 정부가 이 두 가지 조건을 모두 파괴했기 때문에 대선에 나선다고 밝혔다.
그런데 존 롤스는 “자연의 분배 방식은 공정하지도, 불공정하지도 않다. 인간이 태어나면서 특정한 사회적 위치에 놓이는 것 역시 부당하지 않다. 그것은 단지 타고난 요소일 뿐이다. 공정이나 불공정은 제도가 그러한 요소들을 다루는 방식에서 생겨난다.”고 한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231쪽] 중에서)
“공정이나 불공정은 제도다. 그러한 요소들을 다루는 방식에서 생긴다.” 그러면 공정을 다루는 ‘방식’은 어떻게 결정한 것인가? 공정 그 자체보다는 그 공정을 다루는 제도와 방식을 결정하기가 더 어렵고 힘들다. 공정에 관한 어떤 준거 같은 것이란 없기 때문이다. 샌델은 책에서 공정을 다루는 수많은 방식을 다루고 있다.
미국 남북전쟁 당시 ‘300달러냐 당신의 목숨이냐’란 말 그대로 300달러(35만 원 정도)만 지불하면 병역 면제를 받을 수 있었고 면제를 받은 자들 가운데는 앤드루 카네기, J.P. 모건, 시어도어 루즈벨트의 아들,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아버지, 심지어는 미국 대통령이 된 아서와 클리블렌드 등도 있었다. 이러한 불공정 사례 때문에 1863년 7월 폭동까지 일어나 100여 명이 사망까지 했었다. (같은 책 113쪽).
우리 사회에서도 돈 주고 병역면제 받는 것이 제도화 된다면 대폭동이 일어날 것이다. 그런데 차라리 돈 주고 병역 면제 받는 것이 제도화 되는 것이 오히려 공정할지도 모른다. 그 이유는 돈 있고 권력 있는 자들과 자녀들은 모두 거의 면제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 시절 국방부 장관 한 사람 제외하고 대통령까지 모두 병역 면제자들인 것이 드러났다. 차라리 거액의 돈을 내고 병역면제를 제도화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는 ‘불공정의 공정’이 회자될 만하다.
그러면 우리 국민들이 바라보는 ‘공정’이란 잣대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것이 윤석열의 그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그러면 그 기준이 되는 잣대란 무엇인가? 그 잣대란 윤석열의 다른 하나의 구호인 ‘상식’이다.
그러면 상식이란 것의 잣대는 또 무엇인가? 상식이야 말로 관습과 습관이 결정하는 가장 보편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 관습과 습관은 어떻게 결정되는 것인가? 우리 국민들은 ‘그럴 리 없다’, ‘그럴 수 없다’고 ‘리 理’와 ‘수 數’를 일상생활에서 많이 사용한다. 생각키로는 우리 국민들의 상식은 ‘리’와 ‘수’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본다. 가장 쉽게 초등학생들이 학급 반장을 선출할 때에 설령 비밀 투표이기는 하지만 반장 자신이 자기를 투표한다면 그것은 ‘그럴 수 없다’고 할 것이다. 차라리 기권을 하더라도 자기가 자기를 투표해서는 안 되는 것이 상식이다. 만약에 어느 사회에서 상식이 무너졌다면 바로 자기가 자기를 투표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고 본다.
윤석열 대통령이 공정을 말할 때에 동시에 그가 말하는 상식의 잣대로 한 번 보기로 한다. 그가 검사와 검찰총장이란 제도권 안에서 과연 공정했는가를 물을 수밖에 없다. 삼부토건과 윤우중 두 가지 자기 자신에 연루된 사건은 물론, 처와 장모 등 친인척 들의 비리 등을 비교할 때에 그가 조국 전 장관에 대한 기소와 재판에서 과연 공정하고 상식에 맞는 말과 행동을 하고 있는지 의아해 하고 있다. 그럴 수도 없고 도리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상식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적어도 초등학생 정도의 상식은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는가, 이다. 조국 전 장관의 가족을 저 정도로 털 정도로 자기와 자기 자신의 가족에 대해서도 털었어야 하지 않는가? 결국 자기 말에 자기 자신이 걸리는 자어상위自語相違의 덫을 우리 국민들은 쳐 놓고 있었고, 윤석열은 거기에 걸려 넘어졌다.
공정과 상식은 윤석열의 기치인 것만은 아니다. 문재인 대통령 역시 마찬가지로 공정과 상식이 통하는 사회 건설을 통치의 그것으로 삼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 역시 공정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예가 윤석열을 검찰총장에, 최재형을 감사원 원장에 각각 임명한 것이었다. 임명 전에 반역과 배신을 우려하는 것이 있었지만 기우가 아닌 현실이 되어 버렸다. 두 사람은 문재인 정부의 등에 칼을 꽂고 말았다. 큐피드의 화살보다 더 유명해질 역사에 남을 ‘배신의 화살’이 되고 말았다.
다시 돌아가 윤석열의 공정을 생각해 볼 때에 그것은 반대인 ‘제왕무치’의 소산이다. 봉건왕조 시절에 임금은 무슨 짓을 해도 수치가 아니라는 법이 있었다. 윤석열은 검찰 생활 30여 년 동안 제왕적 기질이 체질화되었다. 제왕은 괴델 정리로부터 철저하게 보호를 받는다. 그래서 자신 안에서 잘못을 절대로 보지도 못하고 그래서 인정도 하지 않는다. 이를 제왕무치라고 한다. 봉건 왕조를 지탱하는 데는 이것이 공정이고 상식이다. 지금 윤석열은 대통령도 되기 전에 이런 제왕무치의 법칙에 보호 받는다고 착각하고 있다. 이러한 착각을 끝없이 합리화 시켜주는 것이 언론이다. 그러나 언론에 의해 공정한 심판을 받지 못하고 안주해 온 윤석열 정부가 4월 10일 봄볕 앞에 고스란히 노출된다.
윤석열의 제왕무치 역시 시대감각과 현실감각을 몰지각한 소치이고 이런 몰지각의 원인은 모두 언론 때문이다. 브라질 룰라 대통령이 감옥에서 나온 후 첫 소리가 “재임 기간에 언론을 개혁하지 못한 것, 이것이 가장 후회된다”고 한 말 명심할 때이다. 정치인들이 현실감각을 상실하게 하는 가장 큰 원인이 언론이기 때문이다. 결국 윤대통령의 공정과 상식을 덫에 걸리게 한 것도 다름 아닌 그의 공정과 상식을 비호해 준 언론일 것이다. 결국 4월 10일은 언론과 대통령의 공정과 상식이 동시에 또다른 공정과 상식에 의해 심판 받는 날이 되었다.
<전 한신대학교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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