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비닐하우스에서 며칠 취나물 수확을 하는 육체노동을 했다. 굳이 ‘육체노동’이라 표현한 이유는 노동의 종류를 특정하기 위해서이다. 나는 자신을 노동자로 자리매김한다. 노동하는 공간은 주로 책상 앞이다. 내용은 ‘세상사 해석을 위한 지식 채집’이다. 한가로이 취미생활로서 독서를 한 적은 없다. 내 자신 스스로 의무 지운 순수한 노동으로서의 지식 채집이다.
젊은 시절에는 알아채지 못했는데, 책상 앞에 앉아 활자에 집중한다는 게 무척 에너지가 많이 드는 정신노동임을 절감한다. 평양 감사도 제 하기 싫으면 막설하는 것이고, 도포를 입고 논을 갈아도 제멋이라 했다. 하고 싶어서 몇 십 년 전 애초에 스스로 결행한 일이라 정신줄을 놓을 때까진 그럭저럭 어쨌건 버티어낼 것 같다.
그러나 때때로 헛헛한 빈 가슴에 씁쓸해진다. 내 정신노동에는 감정노동이 필수적으로 동반한다. ‘소년이로학난성’(少年易老學難成)이라고? 그래서 ‘일촌광음불가경’(一寸光陰不可輕)해야 한다고? 소년은 늙기 쉽다, 이건 맞는 말이다. 그러나 ‘학문은 이루기 어렵다’는 말은 과연 의미를 지닌 언어인가? 짧은 시간까지 버리지 않고 몰두하면, 학문이란 이룰 수 있는 성질의 것인가?
학문은 어떤 분야의 지식체계를 말한다. 예술품 감상도 예술행위로 인정하듯, 지식체계를 익히는 행위도 학문에 포함시킬 수 있다. 그러므로 누구나 학문 행위를 수행할 수는 있다. 그렇지만 학문은 과정일 뿐, ‘이룸’이니 ‘완성’이니 하는 단어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우선 학문의 종류가 개인의 지적 능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하다. 역사학, 철학, 정치학, 경제학, 물리학, 생물학, 언어학 등등 수없이 많다. 이뿐 아니라 역사학 한 분야에서도 동양사, 서양사, 동양 고대사, 서양 중세사 따위 수많은 갈래가 있다. 그러므로 ‘학문을 이룬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한 분야의 대가일지언정 다른 분야에서는 철부지의 소견에도 미치지 못함이 사람의 실존적 한계이다. 바닷가 너른 모래밭에서 예쁜 조가비 한두 개 더 주은 사람을 우리는 흔히 대가라 칭한다. 설령 그 대가가 ‘거인의 어깨 위’에 서서 수평선을 응시한다 해도 그 미치는 시선이 고작 얼마리오.
“만약 내가 남들보다 멀리 볼 수 있었다면, 그것은 내가 거인의 어깨에 올라서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과학자라고 불리는 아이작 뉴턴(1642~1727)의 유명한 말이다. 이 말만 보면, 뉴턴은 겸손하게 과학을 대하는 고귀하고 우아한 태도를 지닌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키가 땅딸막한 상대를 향해 빈정거린 것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뉴턴의 광학 실험은 왕립협회의 영향력 있는 실험 책임자 로버트 훅(1635~1703)이 직접 개척한 영역을 침입했기 때문에, 뉴턴과 그의 이론은 훅의 분노를 샀다. 뉴턴과 훅은 대립했다. 그 와중에 뉴턴이 훅에게 보낸 편지에 위의 그 유명한 문구가 나온다.
하지만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유명한 문구 앞에 두 문장을 먼저 보아야 한다. “데카르트는 훌륭한 발판을 닦아놓습니다. 당신은 이것을 훨씬 많은 측면에서 보강했지요. 만약 내가 남들보다 더 멀리 ……”
곧, 훅도 거인에 포함시킨 것이다. 뉴턴 해설자 중에는 거인에 비유하기에는 많이 모자랐던 훅을 일부러 모욕하기 위한 말이라고 해석하는 이가 많다. 광학에 대한 다툼 이후에도 두 사람은 중력과 궤도역학을 두고 다시 충돌했다. 뉴턴은 훅을 싫어했기 때문에 훅이 사망하기 전까지는 왕립협회 일에 관여하는 것을 꺼렸다. 그리고 뉴턴은 자신의 모든 저술에서 혹이 언급된 모든 부분을 삭제해버렸다.
뉴턴과 항성 목록 문제로 대립했던 왕실 천문관 존 플램스티드(1646~1719)도 그의 일기에서 “뉴턴은 성급하고, 이중적이고, 불친절하며, 거만한 사람이다”라고 적었다.
‘여러 난관을 극복하고 발견을 이루어냈으며, 영감이 풍부한 천재들의 공헌에 힘입어 무지라는 암흑에서 지식이라는 광명의 세계로 위엄 있게 걸어나왔다’ 과학의 역사에 대한 전통적인 설명이다.
하지만 이는 꾸며낸 이야기이다. 현실을 검열해서 미화한 전형적인 빅토리아 시대의 수법인 것이다. 과학의 역사는 훨씬 지저분하고 은밀하고 복잡하며 또한 더욱 더 추잡하다.
노벨상 수상자인 물리학자 리언 레이더먼(1922~2018)은 1999년에 “과학자들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성자 같은 인품을 갖추고 있을 거라고들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절대 그렇지 않다. 모든 단계에서, 즉 국제적으로도, 국내에서도, 연구 기관 간에도, 심지어 복도 건너편 동료 연구자 간에도 항상 경쟁이 이루어진다.”고 말한 적이 있다.
더구나 현대 과학에는 연구비 확보 경쟁, 연구 실적에 대한 압박, 학계 내의 정치와 같은 많은 심화 요인이 개입되고 있다. (참고.조엘 레비/최가영/『과학자들의 대결』)
학문을 함은 날로 더하는 것이요(爲學日益)
도를 함은 날로 더는 것이다(爲道日損) -노자/48장-
학문도 삶도 과정일 뿐 목적지는 없다. 끝은 과정의 휴지(休止)일 뿐이다. 고산 준봉(峻峰)도 하늘 아래다. 더하고 더한 학문도 기껏 1/n에 조금 밝을 뿐이다.
어제도 덜어내고 오늘도 덜어내고도, 내일 또 덜어낼 것이 있을까? 본디 쟁여놓은 게 없는데 뭘 구태여 들어내랴!
노자와 장자는 덜어냄에 방점을 찍는 반면에 공자와 주자(주희)는 더함을 강조한다. 주자는 ‘우연히 짓다’(偶成)란 시에서 ‘학문은 이룰 수 없다’(學不成)고 하지 않고, ‘학문은 이루기 어렵다’(學難成)고 한 것이다.
그 주자의 화이론(華夷論)을 그대로 받아들인 조선 사대주의 지식인을 생각하면, 무조건 ‘미국’, ‘미국’하는 미국 사대주의, 숭미주의자들이 바로 연상된다. <계속>
<작가/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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