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는 이동수단이다. 옷은 추위와 더위를 막는 수단이다. 이동의 편의성이 자동차의 존재이유이고, 한서(寒暑)에 몸을 지키는 게 옷의 존재이유이다. 그러나 사람은 ‘근본 목적’만으로 수단을 이용하지 않는다.
점잖은 나이에 어엿한 직위의 사람은 경차를 타지 않는다. 경조사에 점프 차림새로는 축하와 조위(弔慰)의 진정성을 보여주기에 쉽지 않다. 수단으로서의 존재이유는 망각되고, 수단은 위신재(威信材)로서 위력을 더 발휘한다.
위신재란 그것을 소유한 사람이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음을 알려주는 물건을 말한다. 우리가 익히 들은 비파형 동검이나 구리거울은 족장의 지위를 나타내는 위신재이다. 현대사회에서는 비싼 자동차, 고급 골프채, 명품 가방과 의류(에르메스 등) 등이 위신재 역할을 한다.
고대에는 위신재를 돈만으로는 살 수 없었다. 신분의 제약이 있었다. 신라에서는 골품에 따라 집의 크기, 지붕이나 기와나 계단을 꾸미는 장식, 의복과 기물의 소재 등을 제한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위신재가 금이나 은으로 된 식기, 상아, 예술작품, 고급 의상 등이었다.
이런 물품을 선물로 받으면 동등한 물품으로 답례해야 했다. 곧, 위신재를 선물 받는 사람은 이미 다른 위신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이런 방식으로 위신재는 소수 귀족들 사이에서만 유통되었다.
사서삼경(四書三經) 같은 고문서를 읽을 때, 그 시대적 배경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오독하기 십상이다. 동서를 막론하고 고대에서는 철저한 신분사회였다. 특히 춘추시대의 공자와 관중은 고대 사회 붕괴의 원인을 신분질서 문란에서 찾았다.
하여 질서 회복은 신분질서 확립의 문제였다. 따라서 관중은 ‘사민의 분업(分業)과 정거(定居) 정책’을 엄격히 실시할 것을 주장했다. 사민(四民·사농공상)의 직분이 문란해지지 않고 세습되도록 거주지역까지 한정한 것이다.
선비의 아들은 선비만 되어야 하고, 농민의 자식은 농사만 지어야 하고, 공인의 자식은 기물만 만들어야 하고, 상인의 자식은 장사만 해야 한다. 그리고 선비는 선비만 사는 곳에, 농민은 농민만 사는 곳에, 공인은 공인만 사는 곳에, 상인은 상인만 사는 곳에 살아야 한다. 섞여 살면 혹 농민이 장사를 하는 등 직분에 어긋난 일이 생길 수 있으니 거주지역을 직분에 따라 엄격히 한정한 것이다.
고대의 신분·계급사회에서 옷은 신분과 지위를 나타내는 수단으로도 활용되었다. 신분에 따라 복식도 달랐다. 현대와 다른 점이다. 이 사실을 놓치고 해석하면, 오독은 필연이다.
신분은 크게 왕/공경/대부/사농공상/천민으로 나눌 수 있다. 왕/공경/대부는 지배계급이다. 사농공상은 피지배계급이나, 사(士)는 지배계급의 하급관리가 된다. 따라서 사와 농공상의 복식도 달랐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창고에 곡식이 가득 차야 예절을 알고, 입고 먹는 것이 풍족해야 명예와 수치를 알게 된다.’
관중이 주장한 이 문장은 앞 구절과 뒤 구절의 주어가 다르다는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주어의 신분이 다르다. 앞 구절의 주어는 피지배계급이다. 뒤 구절의 주어는 지배계급이다. 이렇게 추정해야 논리적 문장이 된다.
예절, 혹은 예의염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져야 할 윤리적 덕목이다. 피지배계층이든 지배계층이든 가리지 않는다. 그러나 ‘명예와 수치’는 다르다. 어느 정도 신분과 지위가 있어야 명예와 수치를 챙길 수 있다. 엄격한 신분사회에서 농민이든 천민이든 무슨 명예가 있고, 수치가 있겠는가.
피지배계층은 ‘창고가 가득해야’, 곧 생활고에 찌들지 않아야 비로소 예절을 생각하게 된다. 이에 반해, 지배계층은 신분의 징표인 옷이 더 중요하다. 물론 식(食)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여 의식(衣食)이란 순서로 쓴 것은 신분사회에서 자연스런 일이다.
흔히들 중문학자들은 입는 것을 우선하는 언어 습관은 예의·체면을 중시하는 유교문화에서 비롯됐다고 해석한다. 두루뭉술한 일반론일 뿐이다. 예의와 체면을 중시하여 의식(衣食)처럼 ‘의’를 ‘식’ 앞에 두었다면, 굳이 앞 구절 ‘창고가 가득해야…’가 필요 없다. 그리고 예절/영욕(榮辱·명예와 수치)을 구분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현대 중국어에선 ‘식의주’가 ‘의식주’보다 더 자주 쓰인다고 한다. ‘의식주’는 백성들의 질곡이었던 신분사회의 잔재이다. 언어가 현실과 괴리가 생길 때는 말뜻이나 순서가 달라지는 법이다. 그리고 마땅히 달라지게 해야 한다.
한데도 우리는 아직도 ‘의식주’에 대한 반성이 없다. 법적으로는 신분사회가 해체되었지만, 기득권 카르텔에 의한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신분질서는 아직도 강고하다. 이 시대착오적 현실을 어떻게 타파·혁신할 것인가? <계속>
<작가/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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