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구리 잡아 미지근한 물이 반쯤 찬 가마솥에 넣고 솥뚜껑을 치운 채로 두면, 개구리는 어떻게 행동할까? 아마 얼마간은 손아귀에서 벗어난 해방감으로 유유히 헤엄을 칠 것이다. 그런데 아궁이에 불을 지펴 서서히 물 온도를 높이면, 뛰쳐나올까? 아니면 조금씩 상승하는 온도에 적응하려고만 애쓰다 끝내는 삶겨 죽고 말까?
‘냄비 속 개구리’, 오랜 기간 축적된 점진적 변화의 결과로 위기가 발생했을 때, 그 위기를 인식하지 못하는 상황에 빗대어 자주 사용하는 비유적 표현이다. 그 변화된 환경에 대처할 수 있도록 혁신해야 위기 상황을 타개할 수 있다는 교훈은 백번 받아들일 만하다.
金樽美酒千人血(금준미주천인혈) 금 술잔의 맛 나는 술은 백성의 피요
玉盤佳肴萬姓膏(옥반가효만성고) 옥쟁반의 맛있는 안주는 백성의 살점이요
燭淚落時民淚落(촉루낙시민루락) 촛농이 떨어질 때 백성의 눈물 떨어지고
歌聲高處怨聲高(가성고처원성고) 노랫소리 높은 곳에 원망 소리 높았더라
시인 작가는 물론 일반인들도 말을 하거나 글을 쓸 때, 비유법을 사용한다. 청자나 독자의 이해를 도와 공감을 얻어내기 위해서다. 이 비유법 사용은 국어 실력이나 능력이 아니라, 인간의 천부적·감각적 언어능력인 것 같다.
국어 시험에서 비유법 문제를 잘 맞혔다고 해서 실제 말이나 글에 비유법을 잘 사용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국어 시험에 젬병이어도 평소 일상 언어생활에서 비유법을 기차게 잘 사용하는 이들도 많이 봤다. 국어교사로서 비유법을 가르쳤지만, 필자는 비유법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다.
이 도령은 <백성의 피>와 <백성의 살점>을 <금 술잔의 맛 나는 술>과 <옥쟁반의 맛있는 안주>에 비유했다. 탐관오리들이 먹고 마시는 ‘술과 안주’가 백성들의 ‘피와 살점’이라는 것이다. 탁 가슴에 와 닿는, 기발한 비유가 아닌가.
이 도령이 백성의 고통을 표현하기 위한 ‘피와 살점’을 ‘탁주와 소채’에 비유했다면, 소채를 안주로 탁주를 마시는 관리가 탐관오리임을 짐작할 수 있겠는가. 내 마음은 너르고 잔잔하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내 마음은 호수요’라고 하지, 시인이 아니라도 ‘내 마음은 둠벙(웅덩이)이요’라고 표현하지 않는다.
따라서 비유법은 선천적 언어 감각이기는 하되, 제대로 사용하지 않으면 효과가 없음을 알 수 있다. ‘냄비 속 개구리’로 돌아가 보자.
우리가 평소 이해하고 있는 ‘냄비 속 개구리’는 과학적 미신이고 낭설이다. 10분에 5⁰C 온도를 올렸을 때 개구리 반응을 살펴본 실험이 있다. 그 실험에서 보면 개구리는 물이 끓기 전에 냄비를 탈출했다.
평생을 파충류를 연구해 온 오클라호마대학교 빅터 허친슨 박사는, “1분에 화씨 2도(섭씨 약 1.1도) 정도의 속도로 온도를 올리면, 개구리는 점점 더 활발하게 움직이며 탈출하려 할 것이며, 냄비의 뚜껑이 열려 있고, 용기의 크기가 적당하다면 탈출할 것이다”고 실험을 통해 밝혔다.
그러므로 위기 상황임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하는 ‘냄비 속 개구리’ 비유는 적절하지 않다. 백성이 고통을 실감나게 표현하기 위해 ‘피와 살점’을 ‘탁주와 소채’에 비유한 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학적 엄밀성으로 따지면, ‘냄비 속 개구리’는 치사 온도에 이르기 전에 뛰어 나가므로, 위기 상황에서도 아무런 대처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된다. 따라서 자연히 위기를 탈출하겠기에, 일부러 무슨 대책을 세울 필요는 없다. 그러나 아무도 이렇게 ‘냄비 속 개구리’를 해석하지 않는다. 비록 과학적으로는 틀렸다손 치더라도 말이다.
“저는 그때 저녁마다 송정 바닷길을 산책했고, 서면 기타학원에서 기타 배웠고, 사직에서 롯데 야구를 봤습니다.” 한동훈 비대위원장이 올 1월 10일 부산시당 당원간담회에서 한 발언이다.
<오마이뉴스>는 1월 13일 자 기사 ‘사직구장 봉다리 응원 사진에 더 난감해진 한동훈’에서, 2020년에는 ‘코로나 무관중 방침’이 한창이던 때여서 사직구장 관람이 불가능했고, 국민의힘이 공개한 ‘한 위원장 사직구장 봉다리 사진’도 2008년 사진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이에 한 위원장 측은 언론중재위에 중재 신청을 냈다. “한동훈 위원장의 실제 발언은 사직에서 롯데 야구를 봤다는 것으로, 사직구장에서 야구를 봤다고 발언한 바 없어 이를 바로잡고자 한다.”
“사직에서 롯데 야구를 봤다”는 발언을 “사직구장에서 야구 관람했다”고 쓴 기사의 부제를 문제 삼은 것이다. 한 위원장 측은 그러면서 해당 보도를 인해 “심각하게 회복할 수 없는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했다.
당연히 ‘심각하게 회복할 수 없는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언론이 거짓말의 진상을 밝혔기 때문이다. 꼭 못된 의도가 아니라도, 누구에게나 과거의 기억은 현재의 필요에 의해 조작되기도 한다. 잘못된 기억을 인정하고 사과하면 끝날 일이다.
그러나 내공이 얕아 속 좁은 위인은 잘못을 인정하면 죽는 줄 안다. 하여 말꼬투리를 잡아 역공을 펼치는 것이 장땡이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법 기술자 혹은 ‘법꾸라지’의 전형적인 수법을 쓴다.
프랑스 혁명 때 민중이 외쳤다. “빵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 이들을 본 마리 앙투아네트가 중얼거렸다.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 물론 마리 앙투아네트를 ‘오스트리아 암탉’이라고 비하하며 싫어한 민중이 악의적으로 퍼뜨린 소문이다.
“한국이 요르단에 참패했다” 우리가 요르단과 전쟁을 했나? 혹은 배구에서 졌는가? 누가 이런 의문을 갖는가!
일상 언어생활에서도 비유법은 필수적이기도 하다. 말은 부분이 전체를 나타내기도 하고, 전체가 부분을 나타내기도 한다. 이를 뭉뚱그려 환유라 한다. 환유법도 비유법의 일종이다.
필자는 동래 사직동에서 10여 년을 살았다. 야구에 관한 한, 사직은 사직야구장을 지칭한다. 한 위원장 측 주장대로 엄밀하게 말한다면, 부산시 행정구역으로 사직동은 있어도, 사직은 없다. 사직(社稷)은 나라 또는 조정이거나, 천자나 제후가 제사를 지내던 토지신과 곡식신을 뜻하는 단어이다.
한 위원장도 학창 시절 국어 시험에서 비유법 문제를 잘 맞혔을 것이다. ‘사직에서 롯데 야구를 봤다’는 예문에서 ‘사직’이 가리키는 지시대상은? ①사직동에 있는 식당 ②사직 야구장 ③조정(朝廷) ④토지신과 곡식신
모든 일상 언어에 법적 엄밀성을 들이대려면, 자신이 먼저 엄밀하게 말해야 한다. 서글프다. 법의 극치는 불의의 극치이므로.
<작가/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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