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평리부락 망향비(1)
와중에 평리부락망향비를 제막식을 거행한다고 고추친구 영관씨한테서 전화가 왔다. 어릴 때 서로 담이 붙어 저쪽 집 감나무의 가지가 뒷밭으로 넘어오는 집의 동갑친구에 생일마저 서로 보름간격이라 하루도 빼지 않고 보던 동무였다. 당시 영관이의 아버지 상천엄손과 지금은 치과의사가 된 영호의 부친 이까리장사 수동엄손 두 형제는 버든마을에서 가장 부지런하고 의좋은 형제로서 각각 20마지기 정도의 논밭을 가져 빈촌인 버든마을에서는 밥술께나 뜨는 부자에 속했다.
열찬이나 영관이보다 한 살이 많은 사촌형 영호가 장난끼가 많은 개구장이 골목대장인데 반해 동생 영관이는 매우 조용하고 착하며 만사 제 형이 시키는 대로 하는 순둥이에 심한 부끄럼장이에 속했다. 그리고 이미 작고한 그들의 막내삼촌인 엄수진선생은 열찬씨의 고등학교 담임선생을 2년이나 지낸 분이었고.
당시의 유행대로 울산공고를 나와 아버지를 도와 농사를 짓기도 하고 삼성전관같은 회사에 다니기도 하며 영관씨는 고향을 지키며 마을이장을 거쳐 삼남면주민자치센터 자치위원장을 지낼 정도로 점잖은 지역유지로 곱게 늙어 있었다.
어릴 때의 내성적 성격그대로 매우 과묵하고 신중한 성격의 그는 마을회의나 면사무소의 회의에 시종 조용하게 듣기만 하고 있다 나중에 당신이 의견이 어떠냐고 물으면 아주 조심스럽게 한 마디를 하는데 그게 아주 깊이 생각한 신중한 의견이라 대체로 전체적 여론으로 결정이 되는 식이 되어 아주 조용하고도 점잖은 지역지도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거기에다 열찬씨와 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소를 먹이는 종석씨가 단짝친구가 되어 두 사람이 동네일이나 여론수렴을 거의 도맡아하는데 당시 버든 제일 부자인 기와집 아들 종석씨 역시 늘 싱글싱글 웃기만 하고 자기주장이 거의 없는 사람이라 그 두 사람이 주동이 되어 일을 처리하다보니 원만하기는 하되 시간이 좀 걸리는 편인 것 같았다.
<평리부락망향비>를 세운다는 것이 단지 같은 시기에 <평리도호지구 고속철업무단지조성>이라는 같은 사업명으로 사업을 시행했다고 진장과 각골 두 개의 산을 넘어 질러 가면 2킬로, 돌아서는 3킬로가 넘는 도호마을의 당산자리에 두 마을을 통칭하는 망향비를 세워주겠다는 고속철도회사와 의견을 절충하는데 무려 2년이란 긴 세월이 걸려 이러다가 일이 중단되는 것이 아닌가 싶었는데 불같은 추진력은 없더라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차분하게 밀어붙이는 추진력이 마침내 옛 버든마을자리의 소공원하나를 할애 받아 망향비를 세우기에 이른 것이었다.
그 부끄럼장이 친구가 열찬씨가 아직 현직에 있을 때
“친구, 서툴다고 욕은 말고 한번 읽어나 봐주게.”
5호봉투 안에 컴퓨터로 작성한 시를 스무 남은 편 보내 깜짝 놀란 일이 있었다. 성품대로 좀 밍밍하기는 했지만 도시화과정에서 섬처럼 고립된 농촌생활과 노모를 모시는 이야기, 시골유지로서 여전히 보수적이고 가부장적인 남편과 아비의 모습이 그런대로 잘 우러나고 있어
“친구, 뜻밖이네. 매우 잘 썼다고 하긴 그렇지만 하나하나가 다 의미가 있고 나름대로 개성이 있어. 더 써놓은 것은 없는가?”
해서 또 한 서른 편을 바다 도합 50편을 자기 컴퓨터로 맞춤법과 문맥만 수정해서 다시 작성해 보내면서
“한 20편 더 쓰서 7,80편이 되면 내가 편집에 해설까지 도와줄 테니 시집을 한번 내도록하자. 평리마을이 해체되기 전의 마지막 농부가 쓴 시, 보상협의와 반대시위까지 수록된 산 역사를 자네 환갑날쯤이나 마을철거 무렵에 맞추어서 출판하고 고향사람이 마지막으로 모여 인사를 하고 이별의 잔을 나누는 자리도 만들고.”
해서 그러마고 하더니 더는 3,4년이나 연락이 없었다. 예의 그 너무 신중함과 망설임이 발목을 잡는 모양이었다. 시집출판을 접어두고 망향비건립을 추진하면서
“친구야, 그러면 마지막 거주자의 대표로서, 보상대책위원장과 망향비건립위원장으로서 그간에 겪은 소회나 한번 적어보게. 어쩜 그 솔직하고 현실적인 소감이 내 망향비의 비문보다 더 의미가 심장할지도 몰라.”
하면서 소감을 받았다. 행사를 추진하다 보니 부지를 확보하고 망향비를 세울 돌을 구입하고 부지를 정리해 비를 세우는 현장의 일은 추진위원장 영관씨와 부위원장 종석씨가 맡고 비문작성을 비롯한 망향비건립 소회, 최후거주민명단 등 비문에 새길 일체의 문장과 행사기획을 열찬씨가 맡고 행사진행은 옛날 방앗간 집 대택씨의 큰아들로 울산에서 이벤트사를 경영하는 유락씨가 맡기로 했다.
그래서 망향비의 정면에는 망향비 타이틀과 열찬씨의 비문이, 좌우에는 이주 일시와 망향비건립 일시, 당시 이주민의 반별명단을 기록하고 뒷면에는 영관씨의 망향소회를 새겼는데 그 점잖은 사람은 기어이 자기이름을 넣는 것을 거부해 작자가 명시되지 않았다.
열찬씨가 기왕 손에 일을 잡은 이상 옛날 송도에서 그 많은 축제를 열고 행사를 진행하던 솜씨를 발휘, 식순과 사회자가 읽을 시나리오에 내빈소개까지 작성하여 팩스로 추진위원장에게 보내고 이벤트사 유락씨에게는 <고향의 봄>태이프를 가져와 아침부터 행사장에 반복해서 틀도록 했다.
그런데 행사사흘 전 깜짝 놀란 영관씨의 전화가 왔다. 노야형님, 김영만시인이자 향토사학자가 망향제도 어디까지나 제사인 만큼 향교에서 제를 지내듯 축문을 짓고 초헌관, 아헌관을 정하여 한복을 입고 법도대로 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노야 김영만씨는 버든마을에서 같이 자란 형뻘로 열찬씨보다는 아홉 살이 많아 형 일찬씨와 어울리는 사이로 꽤나 공부를 잘하던 수재였는데 역시 가난한 형편 때문에 제대로 진학을 못 하고 어릴 적에 객지로 나가 성인이 되어 돌아왔는데 그 동안 여러 사찰을 전전하며 불도에 깊이 심취하였고 자연히 한문에 능통해 결혼 후 이불집을 하는 아내덕분에 여유롭게 지내면서 노야농장이라는 사색의 공간을 열고 향교에 출입하며 유림이 되고 <고풀이굿>, <언양읍성>등 언양의 문화유적을 개발하는 향토사학자가 되어 삼남면향토지, 언양읍향토지와 <언양초등학교 100년사>의 편집 실무를 관장하는 등 언양에서는 누구도 무시 못 하고 어디에도 빼놓지 못할 절대적 인물로 버든마을을 상징하는 또 한 명의 유지가 되어 있었다. 거기에다 시인으로 문단에 데뷔, <노야시집, 흙에 하늘이 있어>를 발간해 언양의 제일 큰 연회장 63뷔페에서 성대한 출판기념회를 연 마을의 형뻘이자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존재였다.
“우짜면 좋겠노? 지금 와서 몽땅 유교식 제(祭)로 바꾸기도 힘들고 자기 집 제사나 시사의 제문이나 축문도 그게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읽고 듣는 그 고리타분한 제문을 누가 들을 것도 아니고...”
걱정이 태산인데
“그래도 버든에 제일 어른이라 할 유지에 인텔리인데 뜻을 존중해야지. 그런데...”
열찬씨도 차마 무어라고 말을 못 하고 한참이나 망설이는 것이 사실 버든 출신으로 열찬씨 말고도 노야 김영만씨는 물로 직동댁 막내아들 그러니까 동갑이자 나무꾼친구인 봉당골의 배밭 서석주의 동생 서동주란 시인-버든 마을에서 공부께나 한다는 명촌댁의 일찬씨, 열찬씨 처럼 또 한 집 공부를 잘하는 직동댁의 두 아들 홍주씨, 종주씨의 막내로 공부를 좀 한다거나 문학적 소질이 있어 시인으로 등단해 시집을 낸 것 -까지 열찬씨와 판박이에다 하필이면 직업도 울주군청에 다니는 행정직 공무원이라 서로가 대하기가 반가우면서도 뭔가 서먹한 아우가 또 있었다. 무려 세 명의 시인이 나온 작은 마을 버든이 철거되고 망향비를 세움에 있어 가장 먼저 문단에 등단하고 시집은 여러 권 낸 열찬씨, 언양초등학교 총동창회날 동창회주관의 <꿈꾸는 율도국>출판기념회를 열고 기수별로 시집을 20권씩 나눠준 것을 비롯하여 시집 네 권, 수필집 한 권이 언양토박이들의 가정에 흔히 돌아다니고 각종 행사 팸플릿이나 출판물에 그 시가 한두 편씩 인용되는 판에 망향비의 비문을 열찬씨가 쓴다는 것은 행사주최 측이나 보통사람들이 봐서는 지극히 당연할 것이었다. 그렇다고 열찬씨가 아닌 두 사람의 다른 시인, 노야 김영만시인이나 서종주시인이 비문을 쓴다고 해서 안 될 것도 아니고 두 사람 역시 쓰고도 싶을 거였다.
원래 집성촌도 아니고 언양장에 반쯤 기대어 사는 갱빈가의 가난한 마을이라 옛날 덕천역이나 부로산봉수대이 봉화지기를 중심으로 한 교동일대에서도 가장 가난하고 미천한 사람들이 반 장돌뱅이로 살던 마을이라 특별히 글을 읽거나 벼슬을 한 사람이 없다가 구한말에서 한일합방이 된 후 어둡던 시절에 열찬씨 친구 석찬씨, 용찬씨 증조부가 되는 석암 신혁식이란 분이 삼동의 영산 신(辛)씨 집안에서 이주해 오면서 학문이 깊고 시를 잘 지어 언양일대의 최고 선비로 꼽히며 언양향교를 출입하며 서당을 열어 제법 뜨르르하게 이름을 떨친 인물이 나왔고 그의 손자인 석찬씨의 큰 아버지 신근수란 분이 우국충정과 민족독립의 큰 뜻을 품고 언양청년회를 조직하고 젊은 사람들에게 민족의 혼을 불어넣는 동시에 생활개선사업을 벌인 유지로서 열찬씨가 학교에 다니던 시절 졸업식이나 국경일행사때마다 단상에서 만세삼창을 선도하던 버든마을의 유지이자 알려진 인물정도였다.
그 후 앞의 두 신씨네 조손(祖孫)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전국적인 유명인사가 한 사람 나왔는데 바로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목사였다. 부친 조두천씨가 일제시대에 부산에서 해운업을 하며 가업인 진장의 복숭아밭에서 노모를 모시고 살며 나중 국회의원에 출마할 정도의 인물로 해방직전 잠깐 이장을 맡아 아무것도 모르고 선동에 빠져 보도연맹에 가입하여 몰사직전에 몰린 마을사람들을 구하려고 보도연맹의 명단을 불태우고 함구령을 내려 평리부락을 구한 사람일 정도로 깨인 집안이었기도 했지만 전대부터 내려오던 기독교신앙이 독실해 미국의 유학에서 돌아온 후 세계적인 기독교지도자 빌리 그래함목사의 방한 시 동시통역을 맡을 정도의 능력자로 마침내 한국은 물론 세계적으로도 단위 교회로서는 성전(聖殿)의 크기나 신도수가 으뜸이라는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소유주이자 전국적인 기독교의 지도자로서 이름을 떨친 인물이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조용기목사는 목회에 바빠서인지 고향 평리에 통 걸음을 하지 않아 지금은 과수원도 명의만 교회의 부속토지로 넘어가고 전에 커다란 기와집에 거주하던 무서운 할머니와 베루라는 개도, 부친 조용기씨도 모두 죽고 집사노릇, 머슴노릇을 하던 사람들도 다 흩어져 언양바닥에선 아주 오래전 문단을 풍미했던 소설가 난계 오영수처럼 그저 언양초등학교에 문학비가 서고 문학관이 있는 정도로 아득히 먼 사람이 되어 있어 평리마을이 없어지는 마당에 더 더욱 존재의 의미가 없었다. 그렇게 된다면 그나마 평리부락이 완전히 사라지고 대신 망향비가 서는 날 그 망향비의 비문을 쓴 시인으로 이름이 남는 열찬씨가 흥감하게도 평리부락의 마지막 인물로 남게 되는데 그게 나머지 두 시인을 대하기에 어쩐지 거북한 것이었다.
“보자아, 엄위원장. 그럼 이렇게 하면 안 될까? 지금까지 사회에서 통용되는 일반 행사처럼 경과보고와 대회사를 하고 비문을 읽고 제막식을 하는 신식행사는 원래 계획대로 진행하고 노야형님이 한문으로 축문을 지어 제물을 진설하고 별도의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
“그게 어데 쉽겠나? 갑자기 음식을 하고 제문을 짓고 하는 일이?”
“음식이사 자네집이 종가이니 종부인 친구부인이 한 사나흘 고생하면 잘 차릴 것이고 축문이사 노야형님이 지어올 것이고.”
“그럴까?”
하고 종석씨와 함께 노야형님을 찾아간 두 사람이
“베테랑 행정관인 가열찬시인의 생각이라면 그렇게 하여도 좋지.”
쉽사리 승낙을 받아온 것이었다.
※ 이 글은 고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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