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역사 기행에 나섰다.
사람 중심의 가치 실현을 기치로 내세운 (사)인본사회연구소(이사장 남송우) 하계워크숍 행사의 하나로 마련된 ‘거창역사 산책’에 동행했다. 8월 31일 토요일, 때마침 이날 따라 기승이던 무더위가 다소 누그러졌다. 하늘도 가을을 재촉하는 듯 맑고 높았다. 여행하기에 더 없이 좋은 날이었다.
오전 7시쯤 부산 부산진구 서면 인본사회연구소 앞에 세워진 전세버스에 올랐다. 참가자 중 최고령인 80대의 최영애 전 YWCA 총장이 먼저 와 계셨다. 인사를 하고 버스 후미 쪽에 자리를 잡았다. 거창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추억이 적지 않다. 고교시절 거창 출신 친구와 가조천에서 천렵을 해 피라미를 안주로 소주를 엄청 마셨던 기억이 새롭다. 가조천과 가조들판을 굽어보는 우두산의 산세는 남성미를 뽐내며 정말 멋있었다. 그 친구는 늘 거창은 산 좋고 물 맑은, ‘산자수명山紫水明’하기로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곳이라며 자랑했다. 그리곤 수승대와 갈계숲, 유안청폭포 등으로 나를 데리고 다니며 자랑처럼 해설을 해주었다.
그런 거창을 간다, 고 생각하니 옛 친구를 만나러 갈 때처럼 설레면서도 이날은 마냥 여수旅愁에만 잠길 수 없었다. 이날 거창역사산책 일정에는 신원면 거창사건 추모공원 참배가 들어있었기 때문이었다. 참혹한 역사를 대면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왠지 마음이 무거워졌다. 이런 생각을 할 즈음 남송우 이사장이 탑승했다. 남 이사장도 이날 따라 왠지 얼굴이 굳은 듯 보였다. 이어 김영춘 이사와 김해창 인본사회연구소장이 탑승했고 출발예정 시각인 7시 30분에는 28명의 참가자 전원이 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부산을 벗어나 남해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창원에서 중부내륙고속도로로 창녕을 지나 고령까지 갔다가 다시 88고속도로로 거창에 도착하니 예정시각을 거의 벗어나지 않은 오전 10시. 일행은 곧바로 거창박물관을 견학했다.
거창박물관은 군단위 박물관 치고는 규모도 크고 소장품도 다양했다. 향토사학자인 최남식(崔南植)·김태순(金泰淳)의 기증으로 1988년 개관했다. 두 분은 일제 강점기와 6·25전쟁 등을 거치면서 지역문화재가 반출되는 것을 애석하게 여겨 사재를 들여 구입하거나 직접 수집해 보존하다 기증한 것이라고 한다.
소장 유물은 1200여 점, 전시유물은 900여 점인데, 시대별, 유형별로 전시되어 있었다. 이들 유물은 대부분 거창 인근에서 출토된 것으로 거창지역 문화를 한눈에 살필 수 있는 좋은 자료들이었다. 특히 대동여지도(경남 유형문화재), 거창 둔마리벽화고분(사적)에 눈길이 많이 갔다.
일행은 거창박물관을 나와 곧바로 인근 양평리 석조여래 입상을 둘러보았다. 대한민국 보물 제377호인 이 석조여래입상은 전체 높이 3.7m로 거대한 석조상이었다. 신체의 굴곡과 옷주름의 세련된 조각 솜씨가 돋보이는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 추정된다고 역사기행팀의 해설을 맡은 박종성(민들레여행사) 대표가 설명해주었다. 석조여래 입상의 법의는 얇게 걸쳐진 옷자락이 U자형으로 흐르며, 두 다리에서 긴 타원형의 옷주름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런데 입상의 머리에 얹힌 모자 모양의 천개(天蓋)는 왠지 어색함을 넘어 우스꽝스럽게 보였다. 이 천개는 후대에 민가에서 발견된 용도미상의 유물을 고증 없이 입상의 머리에 얹은 것 같다고 해설사 박 대표는 설명했다.
어느덧 점심때가 되어 일행은 거창읍의 금호추어탕집에서 향토음식인 어탕국수와 돼지불고기에 거창산 신원막걸리를 곁들여 점심을 먹은 뒤 금원산 가섭암지 마애여래 삼존입상 관람에 나섰다.
가섭암지 마애여래 삼존입상은 거창군 위천면 상천리 금원산 북쪽 골짜기 큰 바위굴에 새겨진 마애삼존불이다. 바위굴까지 가는 길은 험하지는 않았지만 녹록지는 않았다. 일행은 숨을 헐떡이며 몇 차례 다리쉼을 해야 했다. 30여 분을 걸은 뒤 가파른 돌계단을 오르자 아늑한 천연 바위굴에 다다랐다. 남향 바위에 새겨진 삼존불은 중앙의 부처가 좌우로 두 보살을 거느린 모습이었다. 연꽃 수미단 대좌 위의 본존불은 얼굴이 넓적하며, 얼굴에 비해 작은 눈, 세모꼴의 뭉툭한 코, 납작하고 긴 귀 등이 토속적인 느낌을 줬다. 삼존불 오른쪽에 새겨진 글에서 ‘천경 원년 시월’이라는 글자가 확인되었는데, 이로 미루어 삼존불이 고려 예종 6년인 1111년에 제작된 것 같다고 박 대표가 설명해주었다. 삼존불의 제작 주체는 고려왕실이라고 보기에는 솜씨가 다소 조야해 지역 호족일 가능성이 높지 않겠냐는 의견이 일행 중에서 나왔다.
역사기행 일행은 마애여래 삼존상 감상을 마치고 하산하며 골짜기 지재미골의 맑은 물에 발을 담그며 잠시 더위를 식힌 뒤 신원면 대현리 거창사건 추모공원으로 향했다.
일행을 태운 버스가 오후 4시께 추모공원에 도착했다. 월여산 발치에 아담하게 조성된 추모공원은 끝여름의 햇살 아래 적막했다. 일행들도 마음이 무거웠던지 조용했다. 10여 계단을 올라 추모공원에 들어서자 김주희 해설사가 일행을 맞아 안내해주었다.
이 추모공원은 1996년 1월 통과된 ‘거창사건등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에 의해 착공돼 2004년 완공되었다고 한다. 약 5만 평의 부지에 희생자 719위의 위패를 모신 위패봉안각, 묘역, 위령탑, 역사교육관, 추모의광장 등의 시설을 갖췄다.
일행은 추모문을 지나 영혼을 천국에 인도한다는 천유문(天羑門)을 통해 성역에 들어갔다. 오른쪽 위패봉안각을 지나 위령탑 앞에서 참배했다. ‘님들의 억울함을 잊지 않겠습니다. 부디 평안히 쉬소서.’
위령탑은 높이 18m의 조형물로 거창사건으로 희생된 남자, 여자, 어린이의 무덤을 상징하는 3단의 돔 사이로 영혼이 부활하여 어둠을 뚫고 하늘로 오름을 형상화했다. 위령탑 좌우에는 환조(丸彫)군상이 세워져 있었다. 좌측군상은 고인들에게 심대한 피해를 끼친 국군들이 진심으로 영령과 유족에게 진심으로 참회하는 모습이며, 우측군상은 후손들의 정성어린 위로 속에 한을 풀고 승천의 기쁨을 만끽하는 영령과 유족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해설자는 설명해주었다.
일행은 이어 역사교육관에 들어갔다. 이곳은 거창사건 관련 자료를 보존·전시하고, 왜곡된 진실을 바로잡아 알리는 교육의 장이다. 교육관은 거창사건의 전모 외에도 사건 이후 감춰진 진실, 은폐와 폭로, 유족탄압의 실상, 피해자와 유족에 대한 명예회복의 염원을 표현하는 공간으로 구성됐다. 먼저 영상실에서 거창사건 다큐 영상을 관람했다. 제주4·3사건과 함께 우리 현대사의 비극인 거창양민학살사건의 참혹함이 피부로 전해지는 듯했다.
거창양민학살사건 하면 한국전쟁 중 무고한 양민들이 국군에게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사건으로 알고 있다. 좀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1951년 2월 9일에서 11일까지 3일간 국군 제11사단 9연대가 거창군 신원면 일대에서 어린이를 포함한 민간인 719명을 학살했다. 아무리 전쟁 중이라고 하지만 대한민국 국군이 공비를 소탕한다는 명분으로 죄 없는 민간인을 무차별 사살했다는 사실 자체가 믿기 힘든 일이다. 희생자와 유족으로서는 억울함에 원한을 품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70년도 지난 일이지만 듣기만 해도 저도 모르게 몸서리가 쳐졌다.
그런데 교육관에서 새롭게 느낀 것은 유족의 억울함과 분노를 배가시킨 것은 정작 사건 이후에 자행됐다는 사실이다. 거창사건은 1951년 3월 29일 거창군 국회의원 신중목에 의해 세상에 폭로되었고, 그해 12월 16일 대구고등군법회의에서 사건의 당사자 3인에게 무기징역 등 유죄를 판결했음에도 이들은 이후 사면복권을 받아 오히려 승진하는 등 승승장구하며 살았다니 기가 막힌다.
게다가 1961년 들어선 군사정권은 유족회를 반국가단체로 규정, 유족회를 빨갱이로 몰고, 유족회 간부들을 구속시켰다. 또 희생자들을 안치한 「박산합동묘역」이 묘소설치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개장명령을 내리고 유족으로 하여금 위령비를 정으로 쪼게 강제해 이를 땅속에 묻어버렸다. 추악하고 비인간적인 국가폭력이 아닐 수 없다.
이러니 거창사건 유족들은 “천번 만번 생각해도 억울하다.”는 게 아닌가. 유족의 억울함이 풀리지 않는 건 ‘희생자에 대한 진정한 명예회복’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희생자 유족이기도 한 해설자 김주희 씨는 “1996년 거창사건등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공포되었음에도 추모공원 조성 외에 실질적인 명예회복 조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며 “희생자 배·보상법이 통과돼 국가가 억울한 희생자에게 배·보상해야 실질적인 명예회복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역사교육관의 방을 돌며 거창사건을 체험한 일행은 마직막 코너인 ‘거창의 봄’에 다다랐다. 이 방은 봄을 채 맞기도 전에 국군에게 죽임을 당한 희생자들에게 추모의 메시지를 전해 봄을 찾아주자는 뜻에서 마련된 공간이다. 남송우 (사)인본사회연구소 이사장이 거창역사기행팀을 대표해 추모 메시지를 전자방명록에 적었다.
‘누가 이 한을 풀어주랴!’
‘누가 그 역사를 다시 세우랴!’
거창역사기행팀은 역사교육관을 나와 천유교를 건너 박산합동묘역을 향해 합장한 뒤 이날 역사산책 일정을 마무리하고 버스에 올랐다. 자리에 앉으니 저도 모르게 추모 메시지 ‘누가 이 한을 풀어주랴’ ‘누가 그 역사를 다시 세우랴’가 입속에서 맴돌았다. 한을 푸는 일도, 역사를 다시 세우는 일도 피해자에 대한 배보상법 제정이 선결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차창 넘어 추모공원의 위령탑이 가깝게 다가왔다.
‘영령이시여, 부디 한을 풀고 승천하여 평안을 누리시기를 ...’
<대표기자 /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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