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송원 칼럼】‘텅 빈 충만’ ①쓸모 없음과 쓸모 있음

조송원 승인 2025.01.05 12:50 의견 0

텅 빈 충만! 말맛이 참 좋다. 감각만이 아니다. 의미로 따져도 세상과 삶에 너무 적실함에 머리가 지적 자극으로 뜨거워진다. 현실 적실성 모로만 보면, ‘가득 찬 텅 빔’이 더 나을 듯하나, 운율이 안 좋다. 때론 형식이 본질을 압도한다.

이 말은 본디 불경의 ‘진공묘유’(眞空妙有)를 법정 스님이 우리말로 옮긴 것으로 알고 있다. 그 뜻은 무엇일까? 교리적 해석은 다음 기회로 미루고, 법정 스님의 언어로 그 뜻을 미루어 짐작해 보자.

“이제 내 귀는 대숲을 스쳐오는 바람소리 속에서, 맑게 흐르는 산골의 시냇물에서, 혹은 숲에서 우짖는 새소리에서, 비발디나 바하의 가락보다 더 그윽한 음악을 들을 수 있다. 빈 방에 홀로 앉아 있으면 모든 것이 넉넉하고 충만하다. 텅 비어 있기 때문에 오히려 가득 찼을 때보다 더 충만한 것이다.” -법정/『텅 빈 충만』/「텅 빈 충만」(1990)-

눈 밝은 이들은 금방 ‘무소유’ 혹은 ‘무소유의 삶’을 연상할 것이다. 그런데 나는 장자의 ‘쓸모없음과 쓸모있음’을 떠올림은 왤까? 『장자』 원문에는 자연의 도, 무위의 덕, 황제, 용 등이 등장한다. 현대인으로서 현실미가 떨어진다. 하여 그 요지만 보여주는 ‘오강남 풀이’를 통해 ‘쓸모없음과 쓸모있음’을 보자.

「장자가 어느 숲을 가다가 가지와 잎이 무성한 큰 나무를 보았습니다. 나무를 베는 사람이 그 옆에 있었지만, 베지를 않았습니다. 장자가 그 까닭을 물으니까, 그는 “아무짝에도 쓸모없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장자가 말했습니다. “이 나무는 재목감이 아니어서 천수를 누리는구나.”

장자가 산에서 내려와 옛 벗의 집에 머물렀습니다. 그 벗은 반가워하며, 머슴아이에게 거위를 잡아 요리해 오라고 일렀습니다. 머슴이 물었습니다. “한 마리는 울고, 다른 한 마리는 울지 못합니다. 어느 것을 잡을까요?” 주인이 대답했습니다. “울지 못하는 것을 잡아라.”

다음날 제자들이 장자에게 물었습니다. “어제 산 속의 나무는 쓸모가 없어서 천수를 다할 수 있었고, 지금 이 주인 집 거위는 쓸모가 없어서 죽었습니다. 선생님은 어느 쪽을 택하시렵니까?

장자는 웃으면서 …….」 -오강남 풀이/『장자』/쓸모 없음과 쓸모 있음(2002)-

오강남은 장자의 대답을 번역하지 않고, 여기서 끝맺는다. ‘만약 자연의 도와 무위의 덕을 타고 노닌다면 그렇지 않다. 기림도 비난도 없으며, 한 번은 용이 되고 한 번은 뱀이 되어…….’ 따위의 2,300년 전 장자의 언어는 지금 우리에게 설득력이 없기 때문이라는 판단에서 그랬을 것이다.

덧붙이자면 장자 대답의 요점은, 쓸모가 있거나 없거나 어느 한쪽에 매이지 말라는 것이다. 쓸모 있고 없고를 떠나서, 허심하게 집착이 없는 자유로운 경지에서 도달하라는 것이다.

‘텅 빈 충만’이나 ‘쓸모 있음과 없음’은 우리의 지적 상상력 범위 안에 든다. 하여 이해는 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 생활의 지표로 삼을 수 있을까? 너무 관념적이어서 결국 개인의 ‘마음가짐’만 강조하는 게 아닐까?

그러나 ‘텅 빈 충만’은 ‘침묵의 소리’, ‘소리 없는 아우성’, ‘뜨거운 아이스크림’과 같이 형용모순을 통해 뜻을 강조하는 모순어법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지극히 과학적 사실이다. 우주가 그렇게 생겨먹었다. 우리 삶도 그러하다. <계속>

조송원 작가

<작가/본지 편집위원> <ouasaint@injurytime.kr>

저작권자 ⓒ 인저리타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