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2024년 11월 4일 아침 8시쯤에 카스트로헤리스(Castrojeriz) 알베르게에서 나왔다. 계단을 내려오면서 돌아보니 알베르게가 가정집처럼 계단 위에 아담하게 있다. 계단 아래서 어제 문이 닫혀있던 카페 쪽을 보니 오픈하지 않았다. 순례객이 적어 장사가 신통찮을 것 같아 열지 않았을 수도 있다.
오늘은 아침에 커피도 한잔 마시지 못하고 빈속에 걸어야만 할 것 같다. 계단 아래서 우회전을 해 걷는다. 어제 올 때는 마을로 접어들어 쭉 걸어와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그러니까 산티아고 순례길은 마을 한 가운데를 통과한다. 어느 집 벽에 파란색의 산티아고 문양이 붙어 있다. 대체로 이 문양은 흰색이거나 바닥에 박혀 있을 경우는 황동색이다. 파란색 문양은 처음 본다. 마을이 구릉 위에 형성돼 있어 아래로 내려간다. 평지에 마을을 돌면서 도로가 있다.
벌써 몇 명의 순례자가 도로를 건너 걷고 있다. 필자도 도로를 건넜다. 길 위로 보이는 아침 하늘이 멋있다. 구름이 사방으로 흩어져 있는데 전투기(?)가 막 지나갔는지 구름 앞에 흰색의 일직선이 그려져 있다. 그 모습을 보며 걷는 사이 본격적인 흙길로 접어들었다. 오전 8시 17분이다. 오전 8시 23분, 경작지 사이로 나 있는 순례길 위로 하늘은 더 멋있게 펼쳐져 있다. ‘오늘은 하늘만 쳐다보고 걸으면 지겹지 않을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길 조금 앞에 큰 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길과 하늘 및 경작지가 유화 작품 느낌이 들어 그걸 배경으로 셀카 사진을 한 장 찍었다. 몇 분 더 걷다 보니 둥치가 아주 굵은 나무 몇 그루가 서 있다. 나무마다 적어도 네댓 사람이 팔을 벌려야 될 만큼 굵고 나이가 많아 보인다.
오전 8시 35분, 하늘이 마치 마술을 부리는 것 같다. 시간이 일러 태양이 낮게 떠 강하게 비치는데 그 주변의 구름이 사방으로 꽃을 피웠다. 어떤 유화의 하늘도 저처럼 아름답지는 않을 것 같았다. 오전 8시 37분, 나무다리를 지난다. 노랗게 물든 나무들이 다리와 늦가을의 분위를 최대한 돋우고 감성을 말랑하게 하였다. ‘아, 걷느라 외롭고 사람들과 이야기를 많이 나누지 못해 다소 감정이 굳어지는 걸 느꼈는데, 이를 물 흐르듯이 씻어버리고 생각을 말랑하게 해주다니…’라는 마음이 들었다.
길은 저 앞의 언덕으로 들어가고 있다. 4, 5분 걷다가 하늘을 보니 꽃을 그리던 구름이 어느새 가로로 길게 모양을 바꾸었다. ‘앞에 걸어간 순례자들도 오늘 아침 구름이 온갖 형상을 그려내는 모습을 보고 걸고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땅만 보고 부지런히 걷는 사람들은 변화무쌍한 구름의 모양을 보지 못하고 걸을 것이다. 필자는 걸음이 느리고 눈 앞에 펼쳐지는 자연을 하나하나 보면서 걷다 보니 여러 가지를 보는 것일 수도 있다. 언덕으로 올라가면서 알베르게가 있는 카스트로헤리스 마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봉긋한 구릉의 형태로 마을이 보였다. 그쪽 역시 하늘이 마술을 부리고 있다. 오늘은 아침부터 구름에 매료되어 걸음이 더 느려질 것 같았다. 오르막이 길게 이어졌다. 우리나라처럼 경사가 급하지 않고 완만하면서 길다.
오전 9시 3분, 오르막을 오르면서 또 고개를 왼쪽으로 돌렸다. ‘하늘이 무슨 천지창조를 하려는 걸까?’ 태양이 낮게 떠 있지만 다른 날과 달리 유난히 빛난다. 그러면서 빛을 비추어 마치 구름으로 그림을 그리도록 하는 것 같다. 오전 9시 7분 정상에 다다랐다. 외국인 부부 순례자가 더운지 겉옷을 벗어 가방에 넣고 있다. 이제 구름 저 너머 하늘은 잉크색으로 바뀌고 있다. 그 사람들 옆에 지붕이 있는 독특한 휴게 공간이 있다. 돌벽 위에 긴 나무 의자가 붙어 있고 지붕을 씌워 놓았다. 탁 트인 전망을 보려고 의자 맨 안쪽으로 앉았다. 알베르게가 있는 마을보다 이 언덕이 더 높았다. 앱을 보니 이 언덕의 정상은 해발 912m이다. 마을이 저 멀리 아래로 자그맣게 떠 있는 느낌이다.
10분가량 햇빛 바라기를 하며 앞에 펼쳐진 풍경을 감상하다 일어섰다. 갈 길이 멀다. 지금까지 올라왔으니 이젠 내려가야 한다. 세상일도 다 그렇지 않은가.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고, 내리막이 있으면 오르막이 있다. 길옆으로 트랙터로 갈아놓은 밭 위로 보이는 하늘이 이제 안정을 찾은 것인가? 그리 진하지는 않으나 잉크색이다. 내리막 역시 완만하다. 양옆으론 넓은 경작지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의 마을에 젊은 사람들이 없다고 하지만 이 지역은 놀리는 땅이 한 군데도 없다. 세상이란 이래서 돌아가는 모양이다. 세상 어디든 농부들은 땅을 갈아 곡식을 심고, 어부들은 물고기를 잡고, 도시 사람들은 또 각자의 역할을 한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신비로움, 그리고 사람들이 만드는 인공적인 부분들을 생각하며 걸었다. 이렇게 끝없이 펼쳐진 경작지를 보면서 사람들의 위대성을 생각했다. 순례길 가의 주민들이 너무 부지런한 것 같았다. 이곳 주민들이 생산한 작물을 먹는 사람이 많을 것이란 생각이 드니 감사한 마음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필자 역시 길을 걸으면서 그분들이 피땀 흘려 생산한 작물과 곡식을 먹었을 것이다.
‘식견(識見)’이란 말이 있다. 우리는 무심결에 “저 사람은 식견이 부족해서 말해봐야 잘 모른다.”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식견이란 세상을 두루 다니고, 살면서 얻은 지식(지혜)과 생각을 말한다. 필자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면서 60대 중반까지 살면서 생각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 것들을 많이 생각하고 깨닫고 있다. 예전에 실크로드를 걸으면서(차를 타고, 마차도 타고, 배도 타고, 비행기도 탔음) 생각했던 것들과는 또 달랐다. 마주치는 세상도 다르나 그때보다 지금은 세상을 더 많이 산 부분도 작용했을 것이다.
오전 10시 34분, 하늘의 색이 더 진해졌다. 오전 10시 40분, 평지 길이 구불구불하다. 곧게 난 길보다 걷는데 시간은 더 걸리지만, 필자는 길이란 이처럼 굽이져야 한다고 늘 생각한다. 길은 사람의 생애와 유사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일생이란 그 사람이 누구이든 간에 절대 직선적이고 곧지 않다. 하루에도 얼마나 많은 일들에 부딪히고, 갈등하고, 순간적 선택을 해야 한다. 그때그때의 선택된 삶에 따라 우리의 생은 이어지고 자신의 운명을 결정짓지 않은가. 그리하여 시쳇말로 “팔자는 자신이 만든다.”라고 한다. 흐르는 강물처럼 여러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오전 10시 43분, 필자 옆으로 트랙터 한 대가 뒤에서 와 앞으로 지나간다. 손을 흔들어주니 트랙터를 모는 아저씨도 손을 흔들어준다. 필자는 마을에서 어르신들을 만나든, 트랙터를 몰고 가는 사람을 만나든 언제나 손을 흔들고 인사를 한다. 이곳 주민들은 친절하다. 그러면 예외없이 답례로 필자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인사를 한다. 트랙터에 손을 흔들어주고 조금 더 걸어가니 길가에 오래돼 보이는 표지석이 있다. 그런데 표지석 위에 등산화 한쪽이 올려져 있다. 뒤축이 닳고 밑창이 신발과 조금 떨어진 걸로 볼 때 어느 순례자가 올려놓은 모양이다. 순간 가슴이 찡하며 아팠다. 아마 동병상련(同病相憐)이리라. 신발이 좀 좋은 게 아니면 며칠만 걸으면 밑창이 떨어진다. 하루에 걷는 길이가 긴 데다 흙길만 있는 게 아니라 자갈길과 더러는 바위도 있기 때문이다.
신발을 보며 그러고 있는데 앞에서 좀 전보다 더 큰 트랙터가 왔다. 역시 손을 흔드니 운전하시는 분도 필자에게 손을 흔든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맨 꼴찌로 혼자서 걸어도 결코 혼자 걷는 게 아니다. 자연과도 조응(照應)하면서 걷지만 이처럼 주민들과도 말로, 때로는 손짓과 몸짓으로 대화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걷는데 오전 10시 54분, 필자의 뒤에서 한 순례자가 “뷰엔 까미노!”라고 인사를 하며 앞서 걷는다. 걸음이 상당히 빨랐다. 어제 필자와 같은 알베르게에 잔 순례자는 아니다. 오전 10시 57분, 455km 남았다는 표지석이 있다.
오전 11시 2분, 순례길 양쪽 밭에 자갈돌이 많다. ‘아, 여기에 웬 자갈돌이 많지? 여기가 옛날 옛적에는 바닷가였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길이 질퍽하여 자갈돌을 깔았다면 주로 길 주변에 많이 있어야 할 텐데, 밭의 안쪽 저 멀리까지도 많다. 혼자 우문우답(愚問愚答)하다 다시 걸었다. 오전 11시 6분, 밭에 탈곡한 밀짚을 크게 쌓아놓은 게 있고, 그 옆 멀리로는 하얀색의 창고와 집이 몇 채 보였다.
오전 11시 13분, 돌로 된 다리 아래로 강이 나타났다. 아주 큰 강은 아니지만 깊어 보였다. 오전 11시 17분, 팔렌시아(Palencia) 지방이라는 표지판이 서 있다. 팔렌시아는 스페인 중북부의 도시로, 12~13세기에 카스티야 왕궁이 있었다고 한다. 조금 더 걸어가니 산티아고 순례길의 전체가 표시된 안내판이 있고 그 앞에서 주민인 듯한 아저씨가 자전거를 세워놓고 서 있었다. 여기서 우회전을 해 걸어야 한다. 우회전을 하니 길 왼쪽으로는 경작지이지만 길가에 나무가 많다. 오른쪽에는 계획적으로 심은 듯한 나무 군락이 있다.
오전 11시 40분, 저 앞에 카페가 있다. 야외의자에 외국인 부부 순례자가 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 커피와 크로와상을 한 개 주문했다. 대부분 순례자는 벌써 이 카페에서 다 먹고 떠난 것 같았다. 카페 안 의자에 앉아 커피를 천천히 마시는데 주비리에서 팜플로냐로 가는 길에 만났던 한국인 젊은 부부가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제주도에 거주한다는 부부로 성격이 좋았다. 오랜만에 만났다. 반가워 서로 인사를 나눈 후 이들은 주문한 맥주와 빵을 받아 야외 테이블로 갔다. 커피 한잔과 크로와상 한 개를 먹고 나니 기운이 좀 났다. 아침부터 여태까지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했다.
낮 12시 33분, 카페에서 나왔다. 카페에서 50여 분 앉아 있었다. 이만하면 엉덩이가 상당히 무거운 편이다. 마을 길 한복판에 있는 건물에 산티아고 문양이 크게 붙어 있다. 낮 12시 38분, 마을 길에 승용차 한 대가 서 있다. 길을 가면서 보니 진녹색의 우리나라 기아차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동안 이처럼 우리나라에서 생산된 승용차를 많이 볼 수 있다. 카페와 바(Bar) 등에 있는 텔레비전은 대부분 우리나라에서 생산된 LG 제품이었다. 그러다 보니 산티아고 주민들이 한국을 모를 수가 없는 것이다. 낮 12시 43분, 마을을 지났다.
길은 새로 닦은 신작로처럼 폭이 제법 넓은 데다 마사토(磨沙土)가 깔려 있다. 좌우로는 경작지이다. 마치 봄처럼 녹색이 많다. 갈지 않는 경작지에 풀이 돋아나 있다. 저 멀리 낮은 산들이 보이고 구름이 낮게 퍼져 있는 하늘은 진한 잉크색이다. 이런 길을 혼자 걸으며 생각에 잠기지 않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걷는다면 좀 허무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살면서 어디 가서 늦가을 햇살을 듬뿍 받으며 이런 풍광 속을 걸을 것인가. 혼자만 누리는 이런 호사가 가족은 물론 여러 사람에게 미안한 마음도 들지만 어쩌겠는가.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을 수 있는 기회는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으니 말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더 느릿느릿 걸었다.
오후 1시 4분, 오른쪽 밭에 무를 뽑아 쌓아 놓았다. 그걸 보곤 ‘아, 여기도 무를 심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곡식과 작물의 수확시기가 지난 때여서 다양한 농산물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후 1시 17분, 가느다란 하천을 지났다. 아마 경작지에 물을 댈 목적으로 인위적으로 만든 수로(水路)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로의 양 벽면은 정비가 돼 있지만 바닥은 자연 상태 그대로였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바닥까지 시멘트로 깔아놓아 물살이 빠를뿐더러 다른 생명체가 서식할 수 없도록 해놓았다. 필자의 집 옆 작은 개울이 그렇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선친을 따라 쌍계사에서 불일폭포에 갔다가 내려올 때는 국사암을 거쳐 필자가 현재 살고 있는 목압마을로 내려왔다. 국사암에서 필자의 집 옆으로 흘러내리는 개울을 따라 내려온 것이다. 지금처럼 시멘트로 떡칠(?)을 해놓지 않은 자연 상태 그대로였다. 필자는 지금도 그때의 개울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이 개울 바로 옆에 사는 이완근(70) 씨는 “예전에 시멘트로 개울을 칠갑(?)하기 전에는 은어는 말할 것도 없고 가재와 뱀장어까지 잡았다.”고 필자에게 말한 적이 있다.
한참 도랑 위 다리에 서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다시 걸어갔다. 오늘따라 하늘이 너무 아름답다. 그야말로 파아란 가을 하늘이다. 우리나라의 가을 하늘도 예쁜데 필자가 사는 지리산은 산에 가려 하늘을 자주 보지 못하고 먼 이국땅에 와서 감동받고 있다. 구름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다시 모여 어떤 형상을 만들기도 하였다. 오후 1시 38분, 필자가 알지 못하는 작물이 큰 밭에 자라고 있다. 녹색이다. 하늘도 녹색이 좋아서일까, 구름을 모아 무슨 마술을 부리고 있다. 한 순례자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아마 필자가 묵었던 마을보다 더 앞의 마을에서 묵고 먼 거리를 걷는 사람으로 보였다. 인사를 했다. 앞쪽의 하늘이 너무 멋있다고 필자의 뒷모습 사진을 찍어주었다. 그리곤 후딱 앞서 걸어갔다. 필자의 짐작으로는 ‘저 정도 걸음이면 순례길을 완주하는데 다른 사람들보다 오래 걸리지 않을 것 같다.’라는 생각이 스쳤다.
그렇게 하늘의 멋진 조화를 계속 보면서 걸었다. 오후 3시 3분, 길가에 집이 몇 채 있다. 작은 마을이다. 오후 3시 37분, 왼쪽 밭의 밀이 제법 자라 초록색이다. ‘밭이 몇 평이나 될까? 수확량은 얼마나 될까?’ 궁금했다. 짐작이 안 되었다. 필자가 하늘의 조화에 관심갖고 보아서인지 오늘 해지기 전에 멋진 풍광을 다 보여주려는 듯 하늘이 계속 변신하고 있다. 오후 3시 42분, 강이라고 해도 괜찮을 제법 큰 도랑이 있다. 길에 나무 벤치와 안내판이 서 있다. 벤치에 앉아 좀 쉬었다. 우리나라의 모내기 철이면 도랑에 물을 흘려보내듯 물이 제법 빠른 속도로 흐르고 있었다. 길은 도랑을 따라 이어져 있다. 도랑 가에는 큰 나무들이 진노란 잎을 달고 있다. 수채화로 그리면 아름다울 풍광이다. 하늘은 여전히 조화를 부리고 있다. 오로지 필자를 위한 묘기(?)라고 느껴졌다. 오후 4시 10분쯤, 관광객 몇 사람을 실은 작은 보트가 앞에서 천천히 다가오고 있다. ‘아, 이 풍광을 배로 구경하는 관광객들이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기하였다.
그곳을 좀 지나 프로미스타(Fromista) 마을의 도로로 내려섰다. 다리 위다. 우회전을 해 걸었다. 한 10분쯤 걸으니, 마을의 중간쯤으로 짐작되는 사거리가 있다. 여기서 우회전을 해 200m쯤 가니 알베르게가 있다. 오후 4시 20분 알베르게에 들어가 접수했다. 알베르게는 크지 않다. 침대가 있는 2층으로 올라가니 우리 한국인 순례자가 대부분이다. 젊은 사람들이 많다. 우리나라 젊은 순례자들은 공립 알베르게에서는 숙박을 잘 하지 않는다. 공립 알베르게는 상대적으로 시설이 좋지 않기 때문이다. 젊은 사람들은 SNS 등에 시설이 좋고 식사도 할 수 있는 등 조건이 좋은 사립 알베르게를 주로 이용했다. 이 알베르게는 자그마하나 식사를 해 먹을 수 있는 식당이 있고 깔끔한 편이다. ‘아마 그래서 우리나라의 순례자들이 많은 것 같다.’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여기서 낮에 카페에서 잠시 만났던 제주도에 거주하는 젊은 부부를 또 만났다. 식료품 가게가 있어 식재료를 사러 간다고 했다. 필자는 침대 위에 짐을 풀어놓고 씻은 후 알베르게 인근에 있는 카페에 가 커피와 빵 하나를 먹었다. 알베르게로 돌아오니 제주도 부부가 “라면 같이 드실래요?”라고 물었다. “아, 지금 카페에서 커피와 빵을 먹고 오는 길인데요.”라고 답했다. 그러자 “그래도 같이 라면을 조금 드세요.”라고 했다. ‘이 부부가 참 착한 사람들 같다.’라는 생각을 해온 터였다. 그리하여 같이 이야기도 조금 나눌 겸 “그러면 조금만 먹을게요.”라고 했다. 덕분에 오랜만에 라면을 먹었다. 옆 테이블에는 우리나라 젊은 사람들이 와인 파티를 하고 있었다. 그렇게 라면을 좀 얻어먹은 후 좀 쉬다가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오늘 하루는 하늘과 자연의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서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오늘은 카스트로헤리스에서 프로미스타까지 25.3km를 걸었다. 오늘 8시간 20분가량 걸었다. 프랑스 생장에서 여기까지는 총 349.0km를 걸었다. 아직 산티아고 순례길의 절반도 걷지 못했다.
<역사·고전인문학자,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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