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훈 시인의 산티아고 이야기(14) 13일차 - 아타푸에르카에서 부르고스까지

밀 싹 새파랗게 돋은 걸 보니 희망 느껴져
오전 10시 만난 카페서 순례자들 빈속 채워
오후 2시 25분 부르고스 공립 알베르게 도착
한국식당 문 닫아 중국 식당서 혼자 저녁식사
스페인 벗·한국 청년들과 바 거리서 와인 마셔
오늘 20.2km, 생장에서는 전체 284.0km 걸어

조해훈 승인 2024.12.09 10:18 의견 0

오늘은 2024년 10월 30일이다. 오전 8시 아타푸에르카 공립 알베르게에서 나왔다. 이 알베르게에서는 네덜란드 순례자와 둘이서 오랜만에 편안하게 잤다. 순례자들이 많은 공립 알베르게에선 밤늦게까지 떠드는 소리와 코고는 소리 등으로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아침에 비가 내리는 가운데 순례자들이 길을 나서고 있다. [사진= 조해훈]

밖에 나오니 비가 내렸다. 어제 먹구름이 종일 낮게 끼어 있더니 아니나 다를까 비가 내렸다. 마을이 작아 금방 흙길로 접어들었다. 어제 사립 알베르게에서 숙박했던 순례자들이 앞서 걷고 있었다. 길 양옆으로는 경작지이다. 오전 8시 27분 갈림길이다. 산티아고 표지판이 있다. 길은 질펀하다. 조금 더 가니 돌길이다. 질펀한 길이면 질펀한 대로, 돌길이면 돌길 대로 걷는다. 200km를 넘게 걷고 나니 이제 발이 알아서 가능하면 편한 부분을 골라 내디딘다. 마치 ‘내가 걷는 게 아니라 다리와 발이 알아서 걷는다’라는 생각이 든다. 그냥 무의식적으로 가는 것 같다.

능선 위 십자가 옆에 순례자 몇이 서 있다. [사진= 조해훈]

오늘은 약간 설레는 걸음이다. 산티아고에서 유명한 도시인 부르고스(Burgos)에 도착하기 때문이다. 거리도 좀 짧은 편이다. 다른 순례자들의 발길도 좀 가벼워 보인다. 안개 속에 오르막을 계속 오르니 저 능선 위에 큰 십자가가 서 있다. 헉헉거리며 다가가니 순례자 서너 명이 서 있다. “조!”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다. 포르투갈 여성 아나(Anna) 였다. 며칠 만에 만났다. 산티아고 길을 걷다 보면 일주일 또는 열흘 만에 다시 만나는 사람도 있다. 각자의 컨디션이나 사정에 따라 하루에 걷는 거리가 다른 데다 알베르게가 다를 경우 만나지 못한다. 그러다 어느 길에서 또는 알베르게에서 만나기도 한다. 필자는 늘 공립 알베르게에서 잔다.

십자가 쪽에서 만난 포르투갈 여성 아나가 앞서 걷고 있다. [사진= 조해훈]

여하튼 아나와 다시 만나니 반가웠다. 아나는 넓은 의미의 스페인 벗들이기 때문이다. 순례자들 사이에선 ‘나이는 몇이냐?’, ‘뭐 하는 사람이냐?’는 등의 사적인 질문은 묵시적으로 금기사항이다. 그래서 서로 짐작만 하며 함께 걷기도 하고 알베르게에서 만나면 서로 반긴다. 이탈리아 여성 모니카와 친해 주로 함께 걷던 아나가 며칠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필자가 “오랜만에 뵙습니다.”라고 하자, “다리가 아파 좀 쉬다 괜찮아 다시 걷습니다.”라고 답했다. 키가 작은 사람인데 걸음이 엄청 빠르다. “저는 걸음이 느리니 먼저 가십시오.”라고 하자 축지법을 쓰듯 벌써 저만치 앞서 걸었다.

길가에 있는 버스의 알베르게 광고판에 태극기가 그려져 있다. [사진 = 조해훈]

갈아놓은 밭만 있는 게 아니라 파종한 밀의 싹이 제법 올라온 밭도 있다. 갈아놓기만 한 밭은 대체로 짙은 고동색인데 밀 싹이 올라온 밭은 초록색이다. 밀 싹을 보는 순간 ‘아, 저건 희망이다.’라는 생각이 스쳤다. 오전 9시 49분, 길은 도로를 따라 이어졌다. 9시 55분, 길 왼쪽에 폐버스가 있다. 버스에 사설 알베르게 광고가 그려져 있는데 여러 나라의 국기와 함께 태극기가 가운데 있다. 어딜 가든 여러 나라의 국기가 있으면 대부분 가운데 태극기가 있다. 대한민국의 위상이 높아진 이유도 있겠지만, 우리나라의 순례자들이 그만큼 많은 이유도 작용했을 것이다. 구간마다 나라별 순례자들을 보면 조금씩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나라의 순례자들이 월등하게 많다.

오전 10시 쯤 들어간 카페에 가브리엘이 손을 들어 필자를 반기고 있다. [사진= 조해훈]

오전 10시, 도롯가에 작은 카페가 하나 있다. 카페 안에 들어가니 어제 만났던 순례자들이 모두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어제 잔 마을엔 카페가 없어 모두 빈속이어서 이 카페에서 커피와 빵 등으로 속을 채웠다. 티토도 여기에 있었다. 그는 필자에게 “커피 마실 거죠?”라며, 먼저 계산을 해버렸다. 가브리엘도 앉아 있었다. 안면 있는 다른 순례자들과도 인사를 나눴다. 오전 10시 30분, 카페에서 나왔다. 5분 정도 걸어가니 도로 왼쪽 건물벽에 재미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무거운 배낭을 짊어진 한 순례자가 너무 힘들어 안락의자에 앉아 편히 쉬는 상상을 하는 그림이었다.

길가 건물 벽에 재미있는 순례자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사진= 조해훈]

오전 11시 3분, 이번에는 도로 오른쪽 건물 벽체 앞에 분홍색 꽃을 피운 장미나무가 예쁘게 서 있다. 나무의 굵기를 보니 오래된 것 같다. 길은 계속 도로를 따라 이어졌다. 오전 11시 20분, 갈림길이다. 도로를 따라 계속 걷는 길이 있고, 왼쪽으로 꺾어 흙길로 접어들어 걷는 양 갈래 길이다. 필자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자 곁에 다가온 아나가 “왼쪽으로 걸읍시다.”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대부분이 왼쪽 길을 택했다. 물론 도로를 따라 걷는 사람도 있다.

길가의 한 집 담에 분홍색 꽃을 피운 장미나무가 아름답게 서 있다. [사진= 조해훈]

오전 11시 49분, 흙길 오른쪽에 철망이 쳐져 있다. 그 안쪽은 아주 너른 들판 같다. 그냥 들판은 아닌 것 같다. 잠시 후 그 안에서 경량비행기가 떴다. ‘아마 비행 훈련장인 모양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낮 12시쯤 되자 비가 그쳤다. 그렇지만 날씨는 여전히 어둑했다. 낮 12시 15분, 한 마을에 도착했다. 도롯가에 재미있는 문양의 순례자 모형이 있다. 모형 안에 성당과 조개 등 다양한 그림이 알록달록하게 그려져 있다. 횡단보도를 건너 도로를 따라 걸었다. 순례자들은 표지판이 잘 보이지 않아 길이 애매할 경우 앱으로 길을 찾는다. 필자 역시 마찬가지이다. 맨 뒤에 걷다 보니 길을 물어볼 다른 순례자가 없다. 길을 찾아 다시 걷는다. 낮 12시 19분, 왼쪽에 어떤 공장 건물이 보였다. 그곳을 지나니 숲길이 나타났다. 낮 12시 25분, 자그마한 개울을 건넜다.

한 마을의 횡단보도 앞에 독특한 순례자의 형상이 서 있다. [사진= 조해훈]

저 앞 건물 앞에서 도로를 따라 직진하는 길과 왼쪽으로 꺾어 흙길로 가는 양 갈래로 길이 나뉜다. 필자는 왼쪽길로 걸었다. [사진= 조해훈]

오후 1시 23분, 오른쪽 저 멀리 부르고스 도시의 건물이 호수 너머로 보였다. 호수가 상당히 크다. 호수 인근으로 길이 이어졌다. 공원길이다. 산책하거나 운동을 하러 나온 주민들이 더러 있었다. 오후 2시 10분, 시내로 들어섰다. 오후 2시 17분, 건물들 뒤로 부르고스 대성당 첨탑이 보였다. 오후 2시 25분, 마침내 부르고스 공립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대성당 바로 옆이다. 알베르게의 규모가 상당히 컸다. 순례자들이 작은 마을을 지나치는 경우가 많지만 부르고스는 필수적으로 머무는 곳이다. 그런 만큼 공립 알베르게의 규모가 클 수밖에 없었다.

호수 너머 부르고스 시가지 모습이 보인다. [사진= 조해훈]
저 멀리 부르고스 대성당의 첨탑이 보인다. [사진= 조해훈]

알베르게에 접수한 후 배정받은 침대에 배낭을 두고 밖으로 나왔다. 한국인 청년인 성·이 모씨와 부르고스에 있는 한국식당에 가기로 했었다. 그런데 그 친구들은 양 갈래 길에서 직진해 도로를 따라 걸어 필자와 어긋났다. 성 모씨가 서로 연락을 하자며 필자의 카톡에 먼저 문자를 보낸 게 있었다. 그리하여 카톡에 문자를 보냈다. 그리곤 구글에서 한국식당인 ‘소풍2’를 검색하니 오늘 오후 4시까지만 영업한다고 되어 있었다. 대성당 앞에서 어정거리며 연락을 기다렸으나 오지 않았다. 젊은 사람들이라 필자보다 늘 바쁘다. 그리하여 ‘한국식당이 오후 4시까지만 영업한다고 돼 있어 일단 그 곳에 가보겠습니다.’라는 문자를 보냈다. 그리곤 식당에 도착하니 오후 4시가 조금 넘었다. 한국인 주인 여성이 “오늘 영업이 끝났습니다. 내일 오세요.”라고 했다.

부르고스 공립 알베르게 입구. [사진= 조해훈]
부르고스 대성당 전경. [사진 = 조해훈]

성 모씨에게 그런 내용의 문자를 보낸 후 식당에서 큰 도로로 걸어 나왔다. 그런데 도로변에 홍콩반점이라는 중국 식당이 있었다. 배가 고파 반가워 홍콩반점에 들어갔다. 가장 간단한 코스요리를 시켰다. 우리가 중국 식당에 가면 먹는 계란을 푼 국과 볶음밥이 나왔다. 그리곤 오리를 고추 등을 넣어 볶은 요리가 나왔다. 중국 식당에 가면 종종 먹는 음식이어서 거부감이 없었다. 맛있게 다 먹은 후 중국차를 추가로 한 잔 주문해 마셨다. 배가 불렀다. 성 모씨로부터 ‘맛있게 드세요.’라는 카톡이 왔다. 이리저리 구경하면서 카페에 들러 커피도 한 잔 마신 후 오후 7시 조금 넘어 알베르게로 갔다. 티토와 가브리엘을 만났다. 티토가 “저녁 식사를 했습니까?”라고 물어 “예. 먹었습니다.”라고 답했다. 그러자 “밖으로 나갑시다.”라고 해 따라나섰다.

알베르게에서 술을 못 마시게 해 인근 부르고스 대성당 옆에서 티토(가운데)와 가브리엘 (오른쪽), 필자가 와인을 마시는 모습. [사진= 한국 청년 성모 씨]

바로 옆 대성당으로 내려가 뒤쪽 마당에 앉았다. 가브리엘이 큰 종이봉투에서 와인 한 병과 바게트를 꺼냈다. 티토가 “알베르게는 음주 금지가 돼 있어서요.”라고 했다. 두 사람이 와인가게에서 비싼 와인을 한 병 사 필자가 알베르게로 돌아오면 함께 마시려고 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알베르게는 담배 피우는 것은 금하고 있으나 부르고스 공립 알베르게는 주인 할머니께서 음주도 금지시킨 것이다. 셋이서 함께 와인을 마시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한국인 청년 성·이 모씨가 왔다. 가브리엘이 연락을 했다고 했다. 이들은 한국식당에서 음식을 먹고 도시락을 하나 주문해 갖고 왔다고 했다. 필자는 낮에 티토에게 커피를 한 잔 얻어 마신 데다 비싼 와인까지 얻어 마셔 “제가 와인을 한잔 대접해 드릴 테니 모두 함께 갑시다.”라고 했다. 그리하여 인근에 있는 바(Bar)에 들어갔다.

밤 9시 반쯤 부르고스 대성당 인근 술집 거리. [사진= 조해훈]

바 거리였다. 그런데 모니카와 아나가 그곳에서 와인과 음식을 먹고 있었다. 그녀들과 합류했다. 티토가 “안주는 제가 사겠습니다.”라며, 문어 요리를 주문했다. 산티아고 길의 문어 요리는 유명하다. 그런데 필자는 산티아고에서 한 번도 문어 요리를 먹어보지 못했다. 티토는 성격이 좋아 누구와도 이야기를 잘했다. 옆자리의 손님들과도 재미있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렇게 와인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다 오후 9시 30분쯤 일어섰다. 알베르게 할머니가 무서워보여 밤 10시가 되면 어김없이 문을 잠글 것으로 모두가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아나는 다른 사립 알베르게에서 숙박한다고 했다. 나머지 일행은 공립 알베르게에 돌아와 각자의 침대로 가 고단한 몸을 뉘었다.

오늘은 아타푸에르카에서 부르고스(Burgos)까지 20.2km를 걸었다. 생장에서부터는 총 284.0km를 걸었다.

<역사·고전인문학자,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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