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훈 시인의 산티아고 이야기(9) 8일차 - 로스 아르코스에서 로그로뇨까지

종교보다 걷기나 여행 목적 순례자 많아
걷는 내내 비 내려 작은 우의 꺼내 입어
오늘 27.9km, 생장서 총 161.3km 걸어

조해훈 승인 2024.11.20 11:44 의견 0
로스 아르코스의 알베르게 벽에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성직자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사진= 조해훈]

오늘은 로스 아르코스(Los Arcos)에서 로그로뇨(Logrono)까지 걷는다. 아침 8시까지는 어느 알베르게를 막론하고 순례자들은 짐을 싸서 나와야 해 필자도 스페인 벗들과 함께 나섰다. 아직 어둑해 가로등이 불을 밝히고 있다. 알베르게 벽면에 순례하는 성직자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지금은 가톨릭 성직자나 교도들보다 걷기를 즐기거나 여행 목적으로 산티아고를 순례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고 한다. 물론 그에 대한 정확한 수치나 통계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순례하면서 만나는 순례자들을 보면 대부분 종교 목적이 아님은 분명했다.

성당의 종탑에 불이 밝혀져 있다. 조금 걸어 나오니 카페가 문을 열었다. 공립 알베르게 인근의 카페는 아침에 출발하는 순례자들을 위해 문을 연다. 벗들과 필자는 카페에서 커피와 빵 한 조각을 먹었다. 먹고 나와 도로로 걷는데 한 조각 석상이 서 있다. 늘씬하고 키 큰 여성의 나신이다.

로스 아르코스 도로 변에 서 있는 키 큰 여자 나신 석상 [사진= 조해훈]

오전 8시 48분, 로스 아르코스를 벗어났다. 그다지 큰 도시가 아니므로 금방 흙길로 접어들었다. 늘 그렇지만 흙길의 양옆은 농경지이다. 30분쯤 걷는데 갑자기 비가 내렸다. 다들 배낭을 벗어 비옷을 꺼내 입었다. 필자도 작아 얼굴이 잘 들어가지 않는 비옷을 억지로 입었다. 비옷 없이 피레네산맥을 넘은 탓에 론세스바예스의 알베르게에서 구입한 것이다.

벗들은 “조, 나중에 봅시다”라며, 먼저 걸어갔다. 스페인 벗들은 자기들끼리는 스페인어로 대화를 하지만 필자에게는 항상 영어로 말한다. 그러니까 그들과 영어로 소통한다. 벗들은 자신들의 걸음대로 앞서 걷기 시작하였다. 오전 10시 10분쯤, 순례길은 포장도로로 연결되었다. 도로 옆에 둥치 굵은 올리브 나무의 밭이 있다. ‘저 올리브 나무는 수령이 얼마나 될까?’ 가늠해 보았다. 한국의 나무는 대충 가늠이 가능한데, 올리브 나무는 알 수 없었다. ‘한 50년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라는 생각을 하며 걸었다.

20분쯤 포장도로를 따라서 가니 마을이 나타났다. 토레스 델 리오(Torres del Rio) 마을이었다. 필자는 순례길에서 만나는 마을의 이름을 일일이 거론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대부분 평범하고 비슷비슷한 마을에다 이름이 어려워 독자들에게 거부감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순례자가 밝히길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만나는 마을은 대략 1백수십 개가 된다”고 했다.

순례길을 걷는 필자 [사진= 티토]

오래된 돌다리가 비에 젖어 더 묵직한 느낌이 났다. 마을의 오르막길로 오르니 돌로 쌓은 집들이 쭉 이어졌다. 벗들이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필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 빨리 오세요. 사진 한 장 찍읍시다”라고 해 필자는 우의도 벗지 않고 앉아 함께 사진을 찍었다. 참 고마운 벗들이다. 필자가 커피를 다 마실 때까지 벗들은 기다렸다가 함께 일어섰다. 바르셀로나에 집이 있는 루카(27)는 오늘 이 마을에서 머문다며 인사를 했다. 또 바르셀로나 아가씨인 클라라도 “여기서 헤어져야겠어요”라며 일일이 인사를 했다.

앞서 걷던 스페인 벗들이 카페에서 필자를 기다려 함께 촬영했다. [사진= 루카]

두 사람을 보내고 벗들과 오래된 건축물들을 구경하다가 마을을 벗어났다. 필자는 “저는 천천히 갈 테니 먼저 가세요”라며, 벗들을 먼저 걷게 했다. 정말 걸음이 빠른 친구들이었다. 비가 더 많이 내린다.

오전 11시 10분, 흙길로 들어섰다. 내리는 비 탓에 길이 질척거린다. 25분 뒤 좁은 오르막인 산길이 시작된다. 길가에 또 수령이 오래된 올리브 나무 한 그루가 비를 맞고 서있다. 오전 11시 47분, 돌무덤이 하나 있다. 죽은 순례자의 사진까지 있다. 삼가 명복을 빌며 지난다. 그 인근의 나무에 울긋불긋 온갖 천 조각이 주렁주렁 달려 있다. 마치 티베트에서 길을 걷는 사람의 행운을 빌며 천을 걸어놓은 모습과 유사하다. 우리나라 사람이 순례자 중에 가장 많아 당연히 우리나라 사람이 걸어놓은 것도 있다. ‘대구 상팔자’라는 노란 리본이 눈에 띄었다. 좀 더 가니 ‘로그로뇨 16.7km’라는 표지판이 서 있다. 필자의 현재 컨디션으로 볼 때 혼자서는 하루에 장거리를 걷지 못한다. 그런데 벗들이 함께 해주며 중간중간 기다려 응원을 해주며 힘을 주기 때문에 걱정 없이 걷는다.

나무에 순례자들의 안녕을 비는 각종 소지품 및 헝겊 등이 걸려있다. [사진= 조해훈]

낮 12시 42분, 길가에 돌을 쌓아 만든 자그마한 대피소 같은 게 있다. 비가 많이 내릴 때 우산이나 우의가 없을 때 이곳에 들어가 비를 피할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노숙해야 할 처지라면 이 안에 들어가 하루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마 오래전 숙소가 마땅찮을 때 순례자들이 이용했는지도 모른다. 낮 12시 50분 또 포도밭이 펼쳐졌다. 여전히 비는 내리고 있다.

앞에도 뒤에도 사람 한 명 보이지 않는 가운데 ‘로그로뇨 13.3km’라고 적힌 표지판을 만났다. 길이 움푹 파여 순례자들이 걷기에 아주 불편한 구간은 돌이나 자갈을 깔아 놓았다. 그렇지만 가능하면 자연 그대로의 길을 걷도록 하고 있어 그 점이 좋았다. ‘만약에 우리나라에 이런 유네스코에 등록된 순례길이 있다면 자연적인 길이 많이 훼손됐을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가 이렇게 생각하는 데는 지리산의 길들에 들인 인공적인 것들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기처럼 인공적인 부분은 최소화하는 게 좋을 것이다. 물론 필자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찔레 처럼 생긴 나무에 빨간 열매가 많이 열려있다. [사진= 조해훈]

그런데 산티아고 길을 걸으면서 길옆에 빨간 열매가 달린 나무를 자주 본다. 우리나라의 찔레나무 비슷하게 생겼다. 무슨 나무인지는 모르겠다. 유난히 빨간 열매가 많이 달려 있다.

오후 1시 37분, ‘로그로뇨 11.5km’ 남았다는 표지판을 만났다. 포도밭과 경작지가 번갈아 가면서 눈앞에 나타났다. 비가 내리고 땅이 젖어 앉아 쉴 곳이 없다. 특히 왼쪽 어깨가 내려앉는 것처럼 아프다.

오후 2시 27분, 마을이 보인다. 카페가 있다. 들어가니 주민들이 커피와 술을 마시고 있다. 커피를 한 잔 주문해 배낭을 벗고 앉아 숨을 돌렸다. 커피를 마시고 다시 길로 나섰다. 비는 계속 내린다. 오래 되고 큰 건축물이 보인다. 중세 때 지은 것으로 보이는 건축물들이 연이어 보인다. 길바닥에 황동으로 된 조개문양이 박혀 있어 길이 헷갈리지 않는다.

오후 3시 15분, 마을 벗어나 다시 흙길로 발길을 향했다. 길가의 밭에 키우는 사과나무에 사과가 주렁주렁 달렸다. 산티아고 길의 사과는 사람들이 바로 껍질째 먹는다. 약을 치지 않아서 일 게다. 대신 사과는 작다. 우리나라처럼 아이 머리통 같은 크기의 사과는 말할 것도 없이 주먹만 한 것도 보기 어렵다.

포도밭을 연이어 거쳐 오후 3시 30분, 도로 아래를 지난다. 도로 아래 굴에 여러 글자와 그림이 그려져 있다. 그런데 여기는 조개 문양이 파랗게 그려져 있고 ‘BUEN CAMIO’라는 글자까지 적혀 있다. 이런 걸 보면 힘이 난다. 굴을 지나니 또 포도밭이 마치 한 필지의 경작지처럼 계속 연결돼 있다.

오후 3시 50분, 오른 편에 큰 벽체 같은 게 있는데 거기에 순례자와 피리를 부는 사람, 거북이와 고양이를 태우고 자전거를 타는 소녀 등의 그림이 동화적으로 그려져 있다. 오후 3시 53분, ‘로그로뇨 6km’라는 표지판이 나타났다. 이미 몸과 마음은 많이 지쳐 있다. 지금부터는 아무 생각 없이 악착같이 가야 한다. 스페인 벗들이 기다리기 때문에 어떻게든 알베르게에 도착해야 한다. 조금 더 가니 흙바닥에 하트 모양의 자연석이 바닥에 있다. 순례길에서는 이런 문양을 만나면 ‘운이 좋다’는 말이 있다. ‘나에게도 행운이 올까?’라는 기대감으로 기분이 좋았다.

오후 4시 14분, 소나무 숲이 비에 젖은 채 나타났다. 소나무 숲 가운데로 길이 나 있다. 경남 하동의 송림에 비할 바는 아니나 늘 경작지를 보다가 소나무 숲을 만나니 기분이 또 전환되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육교를 건너 도로를 건넌다. 고속도로인 것 같다. 육교를 건너 길을 걷는데 철로 만든 독특한 문양의 조개껍질 문양이 돌기둥에 붙어 있다. 또 도로 아래 짧은 굴을 지났다. 다시 포도밭이다.

길에 하트 모양의 자연석이 있다. [사진= 조해훈]

그런데 뒤에서 순례자들이 오는 소리가 들린다. ‘웬 순례자들이지?’라는 생각을 하면서 돌아보니 스페인 벗들이 아닌가? 여전히 우의를 입고 있다. 마리나가 “조, 우리가 카페에서 기다렸어요.”라고 했다. 아마 필자가 카페를 보지 못하고 걸었던 모양이다. 아니면 카페가 길에서 약간 안쪽으로 골목에 있었을 수도 있다. 여하튼 그들 위로 먹장구름이 휘몰아치는 형국이다. 마치 고흐의 그림에 나오는 풍경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또 앞서 걸었다. 저기 아래로 로그로뇨가 보이는데 작은 집 몇 채가 먼저 나타났다. 크지 않은 한 집의 입구에 넝쿨이 벽을 타고 오르고 있고, 창가에는 빨간 꽃이 심긴 화분이 놓여있다. 주인의 마음이 아름다울 것 같다. 한 집의 담에는 부처와 동자승이 앉아 있다.

스페인 벗들의 머리 위로 먹장구름이 고흐의 한 그림처럼 휘몰아치고 있다. [사진= 조해훈]

오후 6시 30분 드디어 로그로뇨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접수하고 실내로 들어가니 일흔은 되어 보이는 포르투갈 여성인 아나가 필자를 보고 “조!”라고 반겨주었다. 2층 방으로 올라가는데 1층과 2층 중간에 누군지 모르지만 사람 모양의 황동상(像)이 의자에 앉아 있다. 순간적으로 놀랐다. 방으로 들어가 배정받은 침대에 가 쓰러지듯 누웠다. 벗들이 “나가서 저녁을 먹자”라고 했으나, 너무 피곤해 두 시간가량 누워있다 바깥에 나갔다. 알베르게 인근의 광장에는 여러 곳의 바(Bar)에서 펼쳐놓은 테이블과 의자가 쭉 늘어서 있다. 그 인근의 자그마한 카페에 들어가 커피 한잔을 마신 후 다시 알베르게에 돌아와 잠을 잤다.

로그로뇨 입구의 한 집 담에 부처와 동자승 올려져 있다. [사진= 조해훈]

로그로뇨는 에스파냐(스페인) 중북부 라 리오하 지방에 있다. 라 리오하주의 주도이다. 에브로강(江) 유역에 있는 항구로 로마시대에 건설된 주도이다. 중세 때는 양모 생산지였고,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가는 길목에 있어 발전하였다고 한다.

비까지 걷는 내내 종일 내린 데다 무척 힘든 하루였다. 그래도 스페인 벗들이 있어 웃을 수 있었다. 오늘 로스 아르코스에서 로그로뇨까지 27.9km를 걸었다. 생장에서 로그로뇨까지는 총 161.3km 걸었다.

<역사·고전인문학자,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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