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텔라(Estella)의 알베르게에서 오전 8시 조금 넘어 출발했다. 좀 어둑했다. 길바닥에 산티아고 길의 상징인 황동 조개껍질 모양이 박혀 있다. 길바닥의 이 문양을 볼 때마다 스페인 정부의 관심과 노력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티아고 길이 유네스코에 등록되어 있다곤 하지만 스페인 사람들이 순례자에게 보이는 애정이 크다는 걸 늘 느낀다. 산골의 서너 집밖에 없는 마을을 지날 때도 어쩌다 마주치는 할아버지나 할머니에게 “올라?”(‘안녕하세요’라는 뜻의 스페인 인사말)라고 하면, 한 분도 예외없이 “부엔 까미노!”라고 화답해 주신다.
천 년 이상 가톨릭 성직자와 교도들이 야고보가 전도한 길을 순례하고 있다고 한다. 가톨릭 종교에 대한 명확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시골은 아직 종교적 신앙심이 깊으나 대도시일수록 종교적 색채가 옅다는 걸 느낀다. 그래도 시골이든 대도시이든 혹여 길을 잘못 들었을 경우 어김없이 지나는 사람들이 “산티아고 길은 그쪽이 아니에요. 저쪽으로 가셔야 해요”라고 지적을 해준다. 아마 자신들은 그렇게 순례를 하지 못하는데 마치 대신 순례를 하고 있어 감사하다는 배려일지도 모르겠다.
에스텔라에도 아파트가 제법 있고 차량이 많다. 앞으로 남은 산티아고 길의 마을도 마찬가지겠지만 에스텔라 사람들의 순례자에 대한 친절은 상당하다. 자신들의 집 벽체에 산티아고 방향 문양과 조개 문양을 박아놓은 집들이 있고, 대문 기둥에 산티아고 문양을 크게 새겨놓은 집도 있다. 바르셀로나에서 생산한 에스텔라 맥주 이름을 알고 있어서 그런지 정감이 더 가고 왠지 포근한 마음이 가는 에스텔라를 떠나니 섭섭한 마음이 일어난다. 사람의 감정은 비슷하여 다른 순례자들도 필자와 같은 심정이리라.
오전 9시. 길가에 한 카페가 있다. 아니나 다를까, 먼저 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스페인 친구들이 일제히 큰 소리로 “조!”라고 반겨준다. 티토·가브리엘·다윗·안드레아·루카·마리나·클라라. 살면서 이렇게 환대를 받아본 적이 몇 번이던가. 그들은 커피와 간단한 빵 등으로 아침을 먹고 있다. 필자도 커피와 빵을 한 조각 먹었다. 그들은 필자에게 “오늘 컨디션은 어떠냐?”라고 염려를 하면서 물어본다. 자기들이 볼 때도 필자의 몸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다는 걸 느끼기 때문이다. 걸음이 빠른 그들은 필자보다 먼저 떠나지 않는다. 늘 필자를 배려해 함께 출발한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걷다 필자가 먼저 “먼저 가시라. 나는 걸음이 느려 천천히 가겠다”라고 하며, 뒤로 빠져준다.
그렇게 한 10분쯤 도로를 따라 걷다 흙길로 들어섰다. 그런데 거기에 대장간이 있다. 웬 대장간인가 싶어 들어가 보니 한 청년이 불에 달군 철을 망치로 두들기고 있다. 입구와 안에는 청년이 만든 듯한 각종 산티아고 문양을 팔고 있다. 목걸이에서부터 다양하다. ‘구경했으니 무엇이라도 하나 사야지’라고 생각했으나 마땅한 게 없었다.
대장간을 나오니 바로 포도밭이다. 5분쯤 걸어가니 와인공장이 있다. 벽에 ‘보데가스 이라체’(BODEGAS IRACHE)라고 적혀 있다. 1891년부터 와인생산을 한 모양이다. 벽에 수도꼭지를 만들어 틀면 와인이 나온다. 가브리엘이 “맛만 보시라”며 컵에 따라줘 입만 댔다. 산미가 느껴졌다. 다들 한 잔씩 마셨다. 이 수도는 와인회사인 보데가스 이라체가 홍보용으로 순례자들에게 무료로 주는 와인이다. 공장은 그 뒤쪽에 있었다. 관광차에서 사람들이 내리고 있었다. 와인공장 구경을 온 사람들이리라. 옆에 와인박물관이 있어 들어가 봤다. 이 와인공장이 예전에 와인을 생산할 때 쓰던 각종 도구가 전시돼 있었다. 의미가 있어 보였다.
필자는 경남 하동 화개버스터미널 옆에서 ‘쉼표하나’ 카페를 운영하는 남동생 조병훈(62)과 함께 바리스타 자격증을 비롯해 로스팅·커피감별사·라떼아트 등 커피 관련 자격증을 따 소지하고 있으며, 와인 소믈리에 자격증까지 갖고 있다. 와인 소믈리에 자격증을 따기 위해 세계의 와인 공부를 할 때 스페인의 와인에 대한 내용도 배웠다.
여러 자료를 참고로 스페인 와인에 대해 간략하면 다음과 같다. 스페인은 프랑스, 이탈리아에 이어 세계 3위의 와인 생산국이다. 생산량은 34억 리터이다. 또한 포도 경작지 면에서는 세계 최대 규모(115만 ha)를 자랑하는 유서 깊은 와인 생산지이다. 고대 로마시대 문헌에서도 스페인의 와인 생산 기록을 찾을 수 있다고 한다. 그만큼 스페인은 포도 재배와 와인 양조에서 수천 년의 역사를 이어왔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스페인은 로마에 와인을 공급하던 주요 산지로 손꼽혔다고도 한다. 스페인 와인을 언급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와인 품종이 산티아고 길에 있는 북부지역의 템프라니요(Tempranillo)이다. 또한 스페인의 중남부에 위치한 라 만차(La Mancha)는 단일 와인 생산지로는유럽 최대의 와인 산지이다. 스페인 문학의 걸작 『돈키호테』(미겔 데 세르반테스 지음)의 배경으로도 유명한 라 만차는 수평선이 끝없이 펼쳐지는 평원과 함게 고유의 자연과 풍미를 품은 와인들을 생산하고 있다. 현재 스페인에서 가장 유명한 와인 생산지는 라 리오하(La Rioja)로 평가받는다. 리오하 지역에서 생산되는 와인은 풍미 깊은 풀바디 레드와인이다. 스페인의 화이트 와인은 루에다·레온·리아스·바이사스 지역이 유명하다.
공장을 지나 벗들은 앞서 걸었다. 오전 10시, 오늘 목적지인 ‘로스 아르코스’(Los Arcos)까지 17.9km 남았다는 표지판이 보였다. 그리곤 흙길의 양옆으로 넓은 농경지가 나타났다. 재미있는 건 농경지마다 색상이 다르다는 것이다. 금방 갈아놓은 밭은 진한 고동색이고, 밀을 베고 아직 갈아엎지 않은 밭은 누런 색이다. 잎을 보면 땅콩 같은데 정확하게 알 수 없는 밭은 초록색이다. 사료용 해바라기를 베어내지 않은 밭은 좀 멀리서 보면 검은색으로 보인다. 필자가 가끔 유럽을 방문할 적에 착륙이 가까워질 때면 낮게 뜬 비행기에서 창으로 보면 밭의 색상이 다 달리 보여 신기했다. 그게 이런 밭이었으리라.
날이 화사하다. 마음도 덩달아 밝아진다. 그런데 아직 체력은 회복이 되지 않았다. 10시 40분 ‘야고보가 갔던 길’(Jacob’s Way)이란 노란색 표지판이 산티아고 문양과 함께 서 있다. 문득 ‘야고보가 걸었던 길을 내가 걸을 자격이 있는 것일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필자가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이유에 종교적인 부분은 없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좀 더 고민을 해보기로 하고, 가톨릭교도이든 그렇지 않든 다 받아주는 산티아고 길이 고마울 따름이다.
밀을 베어놓은 밭의 크기가 얼마나 될까? 벤 밀의 아랫부분이 남아 있어서 밀밭이라는 걸 짐작했다. 대략 10만 평은 되리라 생각하면서 걷는다. 끝이 보이지 않는 밀밭 저 위로 구름이 뭉실뭉실 떠간다. 어릴 적 시골에서 보던 구름이다. 지금까지 걸었던 길은 1m도 같은 길이 아니었다. 밭의 모양과 크기도 달랐고 길도 모두 달랐다. ‘비슷해 보일망정 세상에 같은 것은 없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전 11시 15분, 한 마을에 접어들었다. 자그마한 카페가 하나 있다. 그냥 지나쳤다. 11시 21분, 아르코스 13.4km 남았다는 표지판이 있다.
또 걷는다. 오르막이 나타났다. 길 상태가 좋지 않다. 이어 넓은 포도밭이 펼쳐졌다. 한 포도밭을 지나면 이웃해 또 다른 포도밭이 ‘나도 좀 봐주세요’라며 얼굴을 내밀었다. 다리가 풀리고 힘겨워 나도 모르게 “아이고!”라는 소리가 절로 났다. 길옆에 앉았다. 지대가 좀 높았다. 햇살이 좋아 그대로 눕고 싶었다. 그렇다고 그렇게는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한 20분 앉아 쉬었다. 웬 젊은 부부가 걸어왔다. 그런데 아빠가 배낭 위에 어린 딸을 올려 앉히고 오는 게 아닌가. 딸은 아빠의 힘듦을 아는지 모르는지 필자를 보자 웃었다. 기쁜 마음의 필자는 아빠에게 “대단하십니다”라고 격려를 하였다. 딸에게도 손을 흔들어 주었다. 필자도 모르게 삶의 의욕 같은 게 생겼다.
일어섰다. 누렇게 잎이 변한 포도밭을 보면서 ‘저 큰 포도밭의 주인은 얼마나 고생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포도 이랑 사이로 거름하려고 소똥을 갖다 놓았다. 세상에 결실이 그냥 얻어지지는 않는다. 흘린 땀만큼 소득이 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가는데 길 오른쪽에 조그만 집 같은 건물이 있다. 그런데 그 앞 벤치에 벗들이 앉아 있다. 티토는 “당신이 걱정돼 친구들이 여기서 기다리자고 해 앉아 있다”라고 했다. 고마웠다. 아무리 친한 벗인들 이러기가 쉽지 않다. 필자는 건물 안을 들여다봤다. 집은 아니고 두 개의 아치형 문 안으로 들어가니 아래에 물이 고여 있었다. 무슨 용도인지는 알 수 없다. 우리나라로 치면 옛날 빨래터 같은 분위기였다. 티토가 “사진 한 장 찍자”라고 했다. 마침 지나가는 미국 여성 두 사람 중 한 명이 사진을 찍어줬다.
다시 걸었다. 몸에 힘이 빠져 친구들을 먼저 앞서게 했다. 낮 12시 23분, 또 한 마을에 도착했다. 카페에 앉아 커피를 한 잔 마셨다. 마을이 조용하다. 순례자들이 다 지나가 야외 테이블에 필자 혼자 앉아 있다. 30분가량 테이블에 앉아 쉬다가 일어나 걸었다. 마을을 벗어나니 또 농경지가 펼쳐졌다. 그리곤 포도밭이 이어졌다. 그러다 끝이 보이지 않는 드넓은 밭이 구릉지로 나타났다. 끝이 보이지 않으니 어느 정도의 면적이 될지 가늠할 수 없었다. 짐작으로는 밀밭 같았다. 밭을 굵게 갈아놓은 게 아니라 잘게 갈아놓은 데다 파종을 한 것으로 보였다. 그러한 농경지를 보면서 흙길을 어기적거리며 계속 걸었다. 특히 왼쪽 어깨가 너무 아파 왼손으로 어깨의 부담을 덜어주려고 왼쪽 배낭의 끈을 당기며 걸었다. 그러다 보니 왼쪽 손목이 또 아팠다. 왼쪽 발바닥이 아픈 것도 문제였다. 왼쪽으로 넘어져서 그런지 왼쪽 어깨부터 발바닥까지 상태가 좋지 않았다. 신체적 문제로 순례를 중단하는 사람들이 이해됐다.
하늘은 맑고 구름은 여전히 멋졌다. ‘로스 아르코스 9km’ 표지판이 나타났다. 사실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몇 번이나 일어났다. 몸이 빨리 회복되지 않고 신체에 이상이 계속 나타났다. 엊그제는 자는데 벌레가 물은 모양이다. 하필이면 그것도 왼쪽 다리였다. 왼쪽 안 복숭뼈에서 한 뼘 정도 위에 벌겋게 두 군데 물린 데다, 왼쪽 허벅지에 여섯 군데나 물려 너무 간지러웠다. 걸을 때마다 필자도 모르게 긁었다.
‘이러한 장애가 없으면 걸을 만 하리라’는 생각을 하며 또 땅에 앉았다. ‘하늘은 더 푸르고 구름은 어쩌면 저렇게도 맑고 아름답게 뭉게뭉게 피어있을까’라는 생각이 들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 구름을 이토록 가만히 바라본 지 얼마 만이던가. 우리나라에서 산을 많이 탔지만 이처럼 구름을 오랫동안 바라본 기억은 없었다. 하늘을 보기도 하고, 땅을 보기도 하고, 농경지를 보기도 하면서 걸었다. 지겨워도 할 수 없다. 그런데 길옆에 노랗게 무더기로 꽃이 피어있는 게 아닌가. 들국화 비슷하게 생겼는데 처음 보는 꽃이었다.
한참을 걸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5.7km 남았다. 필자의 걸음으로 쉬지 않고 걸어도 1시간 반 거리다. 오후 4시쯤 오른쪽 밭에 농부가 트랙터로 일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이제 2.8km 남았다. 오후 4시 반쯤, 내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보였다. 오후 4시 47분, 마을에 들어섰다. 오후 5시 5분, 드디어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접수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2층 침대가 양쪽으로 쭉 늘어서 있었다.
오늘은 티토의 제안으로 동네 식당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알베르게에 저녁 식사를 해 먹을 수 있는 시설이 없었다. 알베르게마다 부엌 사정은 다 다르다. 취사도구가 갖춰져 있는 곳이 있기도 하고, 겨우 음식을 데워먹을 수 있는 전자레인지 하나만 달랑 있는 곳도 있다. 오늘 저녁은 원하는 순례자들은 모두 참석해 저녁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자리이다. 오후 7시 30분에 모이라고 했다. 스물대여섯 명의 순례자들이 모여 저녁을 함께 먹었다. 대부분 처음 보는 얼굴들이었다. 돌아가면서 간단한 자기소개를 한 후 각자의 잔에 와인을 따랐다. 티토가 “건배”라고 한국식으로 하자 모두 따라서 외쳤다. 그것도 티토가 필자를 배려한 것이었다. 그렇게 늦게까지 저녁 식사를 했다. 식사 비용은 사람 수대로 나눠 나오면서 각자 계산했다. 오늘 하루를 이렇게 마무리했다. 숙소에 와 너무 피곤해 그대로 누워 잤다.
오늘은 에스텔라에서 로스 아르코스(Los Arcos)까지 21.5km를 걸었다. 생장에서 오늘까지 걸은 전체 거리는 133.4km이다.
<역사·고전인문학자,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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