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7시 50분에 알베르게를 나왔다. 산티아고의 모든 알베르게는 아침 8시까지 순례자들을 나가도록 규정하고 있다. 사립 알베르게도 그런 것으로 알고 있다.
아직 바깥은 어두웠다. 성당 앞을 지나 어제 오후에 스페인어를 모국어로 쓰는 새로운 친구들과 앉아 이야기를 나눴던 카페에서 커피를 한잔 마셨다(이탈리아 청년인 안드레아 역시 스페인어를 모국어처럼 자유자재로 사용했다.). 그런 후 푸엔테 라 레이나를 빠져나왔다. 아침 8시 10분, 이제부터 본격적인 순례길답게 흙길이 시작되었다. 아직 미명이다. 순례자 누구도 “왜 걷느냐?”라고 묻지 않는다. 각자 걷는 목적이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오전 8시 37분쯤, 가는 길의 왼쪽에서 누렇고 붉은색이 조금 섞인 주황빛이 서서히 번지며 올라왔다. 동이 트기 시작했다. 오늘 날씨가 추웠다. 입김이 나왔다. 어제 만났던 스페인 벗들은 벌써 먼저 앞서서 갔다. 그들은 걸음이 빨랐고 필자는 걸음이 너무 느렸다. 그렇게 아침 햇빛을 받으며 흙길을 걷고 있는데 뒤에서 자전거 한 대가 오는 소리가 들렸다. 비켜주니 오르막이어서 자전거를 끌고 오르고 있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는 순례자들을 ‘까미노’라고 부른다. ‘까미노’는 ‘순례하는 사람’이라는 뜻이기도 하지만, ‘순례하는 행위’ 자체도 뜻한다. 그리하여 산티아고 순례길의 순례자들이나 주민들은 “부엔 까미노!”라고 한다.
아니나 다를까. 길 주변으로 밭을 많이 갈아놓았다. 밀을 심고 다른 작물도 심기 위해서이다. 이미 밀을 심어놓았을지도 모른다. 밭 한 필지가 말이 좋아 수만 평이지, 실제로 보면 ‘저렇게 큰 밭을 어찌 감당할까?’라는 생각부터 든다. 그런데 자꾸 보다 보면 놀라지도 않는다. 그런데 필자가 트랙터로 밭을 가는 농부들을 자세히 보니 모두가 할아버지였다. 대부분 80대로 보였다. 시골에 젊은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한국보다 더 심각하게 느껴졌다.
오전 9시 15분에 마네루(Maneru)라는 마을에 접어들었다. 마을의 느낌이 좋았다. 마을 입구에 빨간 꽃을 심어 화단을 크게 만들어놓았다. 마을을 찾는 사람 중 대부분이 순례자들이다. 그렇게 순례자들을 반가이 맞기 위해 꽃 화단을 조성해 놓았으니, 이 마을에 들어서는 모든 순례자의 마음이 환해졌을 것이다. 외국인들은 우리나라 사람들보다 꽃을 더 좋아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하루치 순례길을 걸으면 시골 마을을 한두 곳, 많게는 서너 곳을 지난다. 필자가 경남 하동 화개의 지리산 골짜기에 살아서가 아니라 천성적으로 이런 시골 마을을 좋아한다. 특히나 산티아고 길의 마을에는 중세(?) 때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집들이 생각보다 많다. 두꺼운 돌과 흙으로 지은 집이 많고, 벽체라든가 대문은 중세의 양식으로 보이는 장식을 해놓은 곳도 자주 눈에 띈다. 필자도 오래된 집을 좋아하고, 집을 잘 지었든 그다지 볼품이 없든 그걸 막론하고 역사성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늘 하는 사람이다. 그러다 보니 시골 마을을 지나면 더 천천히 집 모양을 둘러보고 담장 넘어 마당도 구경한다. 그러니 항상 맨 마지막에 숙소에 도착한다.
새로 지은 집들도 몇 채 있다. 이런 집들은 시골에 집을 지어 살면서 인근 도시로 출퇴근을 하는 사람들이 거주한다. 일종의 베드타운 역할을 한다. 하지만 이런 집은 마을에서 몇 집 되지 않고 거의 농사를 짓는 농민들이 산다. 필자는 대문에 독특한 문양이 있는 집을 발견했다. 마치 중세의 성문처럼 쇠붙이로 장식을 만들어 파랗게 칠한 나무 대문에 박아놓은 것이다. 그동안 슬프고 어둡던 마음이 어제 유쾌한 스페인 벗들을 만나 많이 웃은 데다 저녁까지 오랜만에 잘 먹은 덕에 마음과 눈이 좀 밝아졌다. 그리하여 이제 이런 특이한 집들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또한 바닥에 자연석을 깔고 그 위에 진흙을 이겨서 얹는 작업을 반복해 쌓은 집의 벽체도 제대로 눈에 들어왔다. 필자의 이러한 심안(心眼)과 개안(開眼)에 스스로 반가워 살짝 눈물이 비쳤다. 피레네산맥을 넘어오면서부터 사람이 느낄 수 있는 슬픔과 좋지 않은 감정의 바닥에 며칠 내내 갇혀 있었다. 아직 다 떨쳐버려지지는 못했다. 시간이 지나면 점차 그런 감정의 색이 바랠 것이라 믿고 있다.
순례길 옆의 집들을 하나하나 보면서 가는데 마을 끝부분에 공동묘지가 있다. 어떤 아저씨가 안에서 꽃을 치우고 있길래 “좀 들여다봐도 됩니까?”라고 물으니, “예. 괜찮습니다”라고 해 조금만 들어가 둘러봤다. 집안의 가족묘가 아니라 마을 주민들의 묘지였다.
묘지에서 나와 길을 다시 걸었다. ‘에스텔라(Estella) 16.1km’라고 적힌 표지판이 서 있었다. 너무 유유자적하게 걸어 이제 겨우 6km 정도 걸었다. 그래도 몸이 한결 낫다. 아직 얼굴과 마음은 어둡지만 그래도 친구들을 따라 함께 웃다 보니 컨디션이 한결 나아졌다. ‘아, 언제 16.1km를 다 걷나?’라고 생각이 들었다. 또 ‘아침 일찍부터 달린(?) 순례자들은 벌써 절반 이상을 가기도 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어차피 그들이나 필자나 같은 숙소에 잠을 잔다.
마을에서 사람 한 명 만나지 못했고, 지금은 앞뒤로 아무도 없다. 혼자 맨 마지막으로 앞선 순례자와 너무 떨어져 걷기 때문이다. 그렇게 또 하염없이 시골 흙길을 걷는다. 좌우로 펼쳐진 농경지는 이제 비슷비슷하게 보인다.
오전 10시쯤, 포도밭이 펼쳐졌다. 포도나무 잎이 물이 빠져 색이 누렇다. 10분쯤 더 가니 치라우퀴이(Cirauqui) 마을이 보인다. 어떤 마을은 가는 길에서 보면 아래로 푹 꺼져 보이는 곳도 있으나 이 마을은 구릉지에 형성돼 있다. 멀리서 봐도 마을에 햇살이 가득하다. 우리나라처럼 굳이 풍수지리를 따지지 않더라도 햇살 잘 드는 곳에 집을 짓고 마을이 들어서는 건 당연한 이치이다. 그렇게 마을 안으로 들어서니 아주 오래된 돌집과 흙집이 있으면서 전체적으로 깔끔한 느낌이다. 마을 어느 골목을 기웃거려도 티끌 하나 없어 보인다. 어느 집 창가엔 굵은 선인장 화분을 세 개 내어놓았다. 선인장이 독특하다.
10시 26분, 약간 비스듬한 골목으로 올라가니 카페 의자가 옆으로 보인다. 그런데 동시다발적으로 “조!”라고 하는 게 아닌가! 어제 만났던 스페인 친구들이 먼저 카페에 도착해 있다가 늦게서야 온 필자를 보고 아주 반가이 맞아준다. 그들은 야외 테이블에서 각자 먹고 일어서려다가 필자를 보고 다시 의자에 앉았다. 그 마음들이 고마웠다. 필자도 카페에 가 커피를 한잔 산 후 들고 와 마셨다. 필자가 다 마실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그리곤 함께 일어섰다. 그들은 걸음이 빨라 앞서갔다.
오전 11시쯤, 마을을 벗어나 다시 산길을 걸었다. 햇살이 따스하니 좋았다. 아이처럼 ‘아, 이 햇살을 가지고 갈 수 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 햇살처럼 강하지 않고 부드러웠다. 흙길은 올랐다, 내려갔다 하면서 계속 이어졌다. 또 포도밭이다. 포도밭을 지나면 올리브나무 밭이었다가 다시 포도밭이 나타났다. ‘이 인근이 포도주 산지인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길가의 올리브나무에 열린 열매를 보니 잎이나 열매나 색이 연초록색으로 비슷했다. 올리브 나무를 쳐다보면서 가는데 또 “조!”라고 단체로 소리를 쳤다. 11시 38분쯤이었다. 역시 스페인 친구들이었다. 길가 올리브밭에 순례자들이 쉬어갈 수 있도록 의자를 몇 개 만들어놓았는데 친구들이 거기에 앉아 있었다. 아마도 필자가 워낙 느리니 기다려준 것 같았다. 필자도 한 10분쯤 앉아 쉬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필자의 쉬는 모습 사진도 찍어주었다. 그러다 함께 일어섰다.
걷는 속도 차이가 나 또 필자는 혼자 뒤에 쳐졌다. 낮 12시 45분쯤, 로마 시대에 건설한 형태의 다리를 건넜다. 터널도 통과하였다. 오후 1시 20분, 다른 마을에 접어들었다. 역시 중세의 자그마한 시골 마을에 들어선 것 같았다. 순례길 표식을 보면서 걷는데 한 카페에 우리나라 글자가 보였다. ‘맛집’·‘아이스커피’ 글자가 안내판에 스페인어 및 영어와 함께 섞여 있지 않은가? 입구로 가면서 들여다보니 자그마하게 생긴 동양 여성이 있어 “한국 사람입니까?”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네. 한국 사람 맞습니다”라고 했다. 반가워 무의식중에 입구 의자에 앉았다. 커피를 한잔 주문하곤 “혹시 수프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당연히 있죠”라며, 남편으로 보이는 스페인 남자에게 말했다. 남편은 주방으로 가 수프를 만들었다. 필자가 “어떻게 이런 곳에 살고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이에 그녀는 “벌써 이십 년이 넘었어요”라고 말했다.
그러는 사이 수프가 나왔다. 산티아고 순례길에 와 처음 먹는 수프였다. 수프에 콩이 많았다. 먹기가 편하고 속도 편했다. “맛이 괜찮죠?”라고 그녀가 물었다. “예. 맛이 좋습니다”라고 답하곤 “사진 한 장 찍어도 됩니까?”라고 물었다. 그녀는 “네, 괜찮아요”라면서 남편과 재미있는 포즈를 취해주었다. “이 건물이 원래 남편의 부모님 집입니다. 1층은 카페로, 위층은 알베르게로 리모델링해 사용하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몇 마디 더 주고받다가 다른 손님들이 와 “잘 먹고 갑니다. 오랜만에 한국분 만나 반가웠습니다”라는 인사를 하곤 일어나 또 길을 걸었다.
오후 2시 20분쯤, 마을을 벗어나니 또 포도밭이 눈앞에 광활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다 농경지가 나타났다가 포도밭이 나타났다 반복되었다. 여전히 하늘은 맑고 구름은 마치 순진한 아이들 얼굴처럼 해맑았다. 저 초지 너머 지평선이 하늘과 맞닿아 있다. 저런 풍광을 보면 지구가 둥글다고 생각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표지판이 보였다. ‘에스텔라 6.3km’라고 적혀 있었다. 앞으로 1시간 40분가량은 계속 가야 했다. ‘땅만 보고 걸어야겠구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터덜터덜 걸었다. 물론 필자의 뒤에는 순례자가 아무도 없었다. 오후 3시 20분, 저 멀리 마을이 보였다. 마을을 가로지르며 한참 가다 보니 어느 집 울타리 안 마당에 억새가 멋있게 피어 바람에 하늘거리고 있다. 스페인의 억새는 허연 꽃이 좀 멋있어 보였다.
그렇게 걷다 제법 큰 아치형 다리를 건넜다. 마을에 들어서니 아직 ‘에스텔라 3.2km’ 남았다는 표지판이 보였다. 옛 돌우물 위에 꽃 화분 몇 개가 얹혀 있었다. 아마 순례자들이 보고 위암을 얻고 힘을 내라는 뜻으로 그렇게 해놓은 것 같았다. 순례길의 마을 사람들이 고마웠다. 또 들길을 걸었다. 등 뒤를 포근하게 감싸주는 햇살도 고마웠다. 오후 5시 7분, 마침내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에스텔라에 있는 이 공립 알베르게에도 조리해 먹을 수 있는 식당이 있었다. 먼저 도착한 스페인 친구들이 벌써 마트에 가 식재료를 사와 저녁 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바르셀로나에 사는 아가씨인 마리나가 “오늘은 이탈리아 친구인 안드레아가 파스타를 만듭니다”라고 했다. 늦게 도착한 필자는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고 얻어먹기만 하는 것 같아 미안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요리하던 안드레아는 “천만에요. 전혀 문제없어요”라고 필자를 안심시켜 주었다. 안드레아가 요리한 파스타는 어제 티토가 만든 파스타보다 돼지고기를 잘게 썰어 많이 넣었고, 맛이 좀 맵싸했다. 물론 티토가 만든 파스타도 맛있었고, 오늘 안드레아가 만든 파스타도 맛있었다. 그렇게 밤 9시까지 저녁 식사를 하면서 유쾌한 이야기를 나누곤 각자 잠자리에 들었다.
오늘은 푸엔테 라 레이나에서 에스텔라까지 22.0km를 걸었다. 생장에서 시작하면 총 112.0km를 걸었다.
<역사·고전인문학자,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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