팜플로나의 알베르게에서 일어나 세수하는데 코가 많이 아팠다. 손을 대보니 코가 심하게 헐었다. 필자는 몸살이 심하게 들면 코가 헌다.
1층 사무실에서 어제 주문해 놓은 아침을 먹었다. 아저씨 두 분이 간소하게 마련한 음식이었다. 홍차와 자그마한 토스트 두 쪽 등을 먹었다. 가벼운 음식이어서 속에서 받았다. 아침을 먹은 후 주인아저씨에게 조심스럽게 “혹시 오늘 하루 더 묵을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는 “10분 후 답변드릴게요”라고 했다. 주인아저씨와 키 큰 아저씨 두 분이 아마 의논하는 것 같았다. 주인아저씨는 “원래 안 되는데 해드리겠습니다. 단 규칙을 지키셔야 합니다”라고 했다. 8시에 나갔다가 오후 2시쯤에 들어오라는 것이다. 필자는 “알겠습니다”라고 말하곤 밖으로 나왔다. 배낭은 숙소에 두고 노트북을 갖고 나왔다.
알다시피 팜플로나 도시는 ‘산 페르민 축제’인 ‘소몰이’로 유명한 곳이다. 인구는 20만 명가량 되지만 해마다 7월이 되면 소몰이를 보기 위해 전 세계에서 1백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몰려든다. 특히 헤밍웨이(1899~1961)의 소설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1926년)에 소몰이 이야기가 나와 더욱 유명해졌다. 게다가 헤밍웨이는 1936~1939년 스페인 내전 당시 반군인 프랑코 장군에 대항해 참전했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팜플로나를 자주 찾았다. 그는 또 스페인 내전 참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장편소설 『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나』(1940년)를 썼다. 그리하여 팜플로나에는 헤밍웨이의 기념물이 더러 있다.
숙소에서 나와 가까운 카페에 들어가 커피를 한 잔 주문하고 구석진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켰다. 커피에 설탕을 가득 넣어 마셨다. 아침 출근 시간대여서 아침을 먹지 못한 직장인들이 와서 커피와 빵 한 조각을 빠르게 먹고 갔다. 주인은 “와이파이 안 됩니다”라고 말했다.
커피를 마시면서 패딩의 호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여전히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큰아들 현일이와 작은아들 현진이에게 쓴 엽서를 찾았다. 이제야 정신이 좀 들었다. ‘아이쿠, 큰일났네. 이걸 어떻게 하지?’ 엽서를 꺼내 펴니 엉망이었다. 엽서의 표지 사진과 글이 적힌 내지가 떨어졌고, 글씨가 있는 부분도 손상돼 전체적으로 내용을 파악할 수 없는 상태였다. 피레네산맥을 넘을 때 비옷이 없어 안 호주머니에 든 엽서까지 다 젖어 훼손된 것이었다. 일단 엽서 두 장을 최대한 조심스럽게 펴서 노트북 안에 넣었다. 손님들이 계속 와 일어섰다.
그곳에서 안쪽 길로 들어가 글을 쓸 수 있는 조용한 카페를 찾았다. 할머니가 운영하시는 허름한 카페가 있었다. 들어가니 손님이 두 사람밖에 없었다. 커피를 한 잔 주문하며 “여기서 노트북으로 작업을 좀 해도 됩니까?”라고 물었다. 할머니는 “그렇게 하시라”고 하셨다. 그곳에서 한 시간 정도 노트북으로 글을 쓰니 피곤해 더 있을 수가 없었다. 아직 몸이 회복되지 않았다. 더 이상 글을 쓸 힘이 없었다.
그곳에서 나와 물어서 카스티요 광장(Plaza del Castillo)을 찾았다. 소설가 헤밍웨이의 단골집으로 유명한 ‘카페 이루냐(Cafe Iruna)’에 들러 커피를 한 잔 마시고 갈 생각이었다. 심신 회복을 위해 팜플로나에 하루 더 머무는 게 가장 큰 이유이지만, 또 다른 이유 중 하나는 카페 이루냐에 가 커피를 한 잔 마시려는 까닭도 있었다. 팜플로나는 스페인어이고, 이를 바스크어로 하면 이루냐이다.
카스티요 광장으로 가는 길에 잡화점이 있었다. 입구에 엽서를 팔아 아들들에게 쓸 엽서를 살 요량이었다. 엽서값을 계산하면서 보니 안쪽에 소 모형이 여러 마리 있었다. 주인아저씨에게 물어보니 “‘산 페르민 축제’ 때 ‘소몰이’의 소를 모형으로 만들어놓은 것입니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돈을 내면 소 모형 속으로 들어가 마치 ‘소몰이’ 때 소를 모는 것처럼 사진을 찍어 줍니다”라고 했다.
카스티요 광장은 팜플로나의 중심지였다. 카페 이루냐의 안으로 들어가니 생각보다 넓었다. 안쪽에 헤밍웨이의 동상이 있었다. 헤밍웨이는 이 인근 호텔에 머물며 이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글을 썼다고 한다. 이 카페는 1888년에 문을 열어 현재 136년 동안 운영되고 있다. 이 카페에서 식사를 하면 좋겠는데 아직 몸이 받아들이지 않아 커피만 한 잔 시켜 헤밍웨이 동상 가까운 곳에서 마셨다. 손님들이 계속 들어와 커피 한 잔 마시면서 오래 있을 수가 없어 나왔다. 오래된 이야기이지만 필자는 기자 시절 취재차 파리에 잠시 가 있을 때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이자 문학가인 사르트르가 앉아 원고를 쓰던 카페의 그 자리에 앉아 날마다 글을 쓰기도 했다.
팜플로나는 옛 나바라왕국의 수도이자 바스크 민족의 상징 도시이다. 이베리아반도(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민족으로 분석되고 있는 바스크 민족은 스페인 북부지역에 주로 살고 있다. 스페인왕국의 전신인 아라곤 왕국·카스티야 왕국·나바라 왕국의 왕가들은 모두 바스크 민족의 왕이었던 산초 3세의 후손들이라고 한다. 스페인 제국 출발의 핵심엔 바스크 민족이 있다는 것이다. 스페인은 물론 남미에도 바스크 민족의 후예들이 일부 살고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아르헨티나 출신의 혁명가인 체 게바라이다.
여하튼 팜플로나의 이야기는 이 정도하고 너무 피곤하여 허적거리며 걸어 숙소로 돌아왔다. 컨디션만 괜찮다면 팜플로나의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좀 더 시간을 보내고 싶었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숙소로 돌아오니 오후 2시 조금 넘었다. 주인아저씨가 “내일 아침 식사를 하겠느냐?”고 물어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했다. 침대로 가 바로 누웠다. 잠은 오지 않았지만 춥기도 해 그대로 누워 있었다. 아마 밤 10시 넘어 잠이 든 모양이었다. 사람들이 오가며 내는 삐걱거리는 소리에 수시로 깨어 깊은 잠은 들지 못했다. 오늘은 산티아고 길을 걷지 않고 심신 충전을 위해 팜플로나에서 하루 더 머물렀다.
<역사·고전인문학자,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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