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훈 시인의 산티아고 순례 이야기(18) 17일차 - 오르니요스 델 까미노에서 카스트로헤리스까지

경작지 자라는 밀 보니 신비로워
햇살 밝게 비쳐 마음까지 환해져
마을 카페서 커피·크로와상 먹어
무난히 걸어 일찍 알베르게 도착

조해훈 승인 2024.12.29 11:27 의견 0
밭에 밀 싹이 10cm 이상 올라와 있다. 사진= 조해훈

오늘은 2024년 11월 3일(일요일)이다. 오전 8시 조금 못 돼 오르니요스 델 까미노의 알베르게에서 출발하기 전에 왼쪽 다리 아래와 무릎 위쪽에 연고를 발랐다. 그제 아침에 일어나니 벌레가 물었는지 근지럽고 물린 자국이 벌겋게 표가 났다. 이틀간 참고 걸으면서 긁기만 하다 하도 근지러워 연고를 바른 것이다. 아침 식사는 어제 저녁에 알베르게 주인 아주머니에게서 3유로를 주고 산 빵과 자판기 커피(1유로)를 한잔 마시고 출발했다.

햇살이 경작지 저 너머로 퍼지고 있다. 사진= 조해훈

날씨가 좋았다. 몇 집 되지 않는 마을이어서 5분가량 걸으니 바로 경작지 사이의 흙길로 들어섰다. 흙길로 들어서면 마음이 편하다. 다른 사람의 방해나 시선을 받지 않고 온전히 혼자만이 생각할 수 있어서이다. 뭉게구름이 피어나든, 먹장구름이 온통 하늘을 덮어버리든 그런 건 아무런 문제가 아니다. 천천히 걸으면서 돌과 풀을 보고, 늦가을 작물이 베어진 밭의 흙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갈아놓은 밭에 트랙터의 바퀴 자국을 보면서 ‘주인아저씨가 일부러 저렇게 내었을까, 저 흔적이 무슨 암호일까?’라며 SF영화 같은 황당한 의문도 가진다.

오전 8시 34분, 넓은 밭에 밀 싹이 10cm 이상 올라와 있다. 나중에 저 밀을 수확해 여러 종류의 빵을 만들고 파스타와 피자도 만들 게다. 그런 상상을 하면 밀이란 식물이 신비롭기까지 했다. 한갓 풀잎 같은 저 싹이 먹을거리가 되어 사람의 생명을 이어주니 말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면서 65년간 해보지 못한 새로운 생각을 많이 한다. 어떤 때는 시골서 자라던 대여섯 살 적 아이 때의 마음이었다가, 어떤 때는 결혼해 살고 있는 아들 둘의 아버지 마음이었다가 하루 평균 7, 8시간 걷는 동안 머릿속은 수천수만 번의 생각들이 서로 엉키기도 하고 스쳐 지나간다.

오전 8시 41분, 길의 오른쪽 저 멀리 펼쳐진 경작지 위로 햇살이 쫘악 깔린다. 필자의 마음 어딘가에는 어둠이 있었을 텐데 저 햇살 덕에 환하게 다 펴진다. 마음 주름 뒤에 있을 자그만 그늘까지 햇살이 다 밝혀주는 느낌이다. ‘아, 이역만리까지 와 걷는 이유가 이런 것이구나.’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 보다 필자의 그림자가 더 길어보인다. 사진= 조해훈

10분 정도 더 걸어가니 햇빛이 세상을 완전 다 밝혔다. 필자는 또 키다리 아저씨가 되었다. 그림자가 여태 생긴 것보다 더 길게 드리웠다. 하도 신기해 걷다 서서 필자의 그림자를 보았다. 그러고 있는데 뒤에서 사람 소리가 들려 돌아다보니 여성 4명이 빠른 걸음으로 걸어왔다. 그분들이 지나갈 수 있도록 옆으로 비켜섰다. 걸음이나 스타일로 볼 때 ‘단체 순례객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부터 걸은 사람은 얼굴에 피곤기가 있고, 발걸음이 가볍거나 경쾌하지 않다. 빨리 걷더라도 그 걸음에 하루하루 꾸준하게 걸어온 티가 났다. 필자처럼 등산화와 바지 아랫부분에 흙이 묻고 약간 바랜 느낌이 난다. 필자처럼 자신의 두 다리로 무식하게(?) 걷든, 단체로 와 승합차로 이동하면서 잠시 잠시 걷든 그건 각자의 선택이었다. 여하튼 가벼운 걸음으로 휙 지나는 여성들을 보니 혼자 몽상에 빠진 듯 생각에 잠겨 있다가 화들짝 깨어나는 기분이다.

필자를 추월해 빠르게 앞서 걸어가는 여성 네 사람. 사진= 조해훈

오전 9시 8분, 길의 왼쪽 돌무더기에 선글라스를 낀 아저씨가 앉아 있다. 아침에 필자를 추월해 간 분이다. 혼자 터덕터덕 걷는 필자가 안 됐는지 “사진 찍어드릴까요?” 물어 왔다. 필자는 “네, 감사합니다.”라고 답하곤 핸드폰을 드렸다. 그렇게 길 가운데서 필자의 독사진이 하나 생겼다. 어느새 하늘이 잉크색처럼 파랗게 변해 있었다. 오른쪽 지평선 너머는 바다였다. 이곳 스페인 북부지역과 남프랑스 사이에 있는 바다로 대서양과 연결되어 있다. 하늘빛이 드물게 좋고 햇살도 좋았다. 이런 날은 더 느리게 걷는다. 이러한 자연의 축복을 가능하면 많이 받으려는 생각에서다.

날씨가 좋아 하늘이 잉크색이다. 사진= 조해훈

앞서 걷던 한 순례자가 쉬고 있다. 이 순례자는 필자의 사진을 찍어주었다. 사진= 조해훈
순례자가 찍어준 필자의 사진. 왼손에는 노트북이 들려있다.

오전 9시 30분, 오른쪽 저 앞 멀리 풍력발전기가 바람개비처럼 돌아가고 있다. 이보다 더 좋은 풍광은 다시 만나보기 어려울 것 같았다. 오전 9시 35분, 돌무더기 위에 십자가가 서 있다. 오전 9시 50분, 산티아고 콤포스텔라 성당이 471.7km 남았다는 표지석이 있다. 오전 10시 9분, 고동색의 갈아놓은 밭이 넓게 있다. 파란 하늘과 색상이 대비된다. 오전 10시 18분 오른쪽 밭 안쪽 멀리서 공기총 소리가 난다. 사냥꾼이 새를 잡는지, 토끼를 잡는지 총을 쏜다. 조금 더 걸어가니 사냥꾼이 타고 온 차가 길 가까운 곳에 주차돼 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우리나라의 기아(KIA)차이다.

사냥꾼의 차가 순례길 가에 주차돼 있다. 우리나라의 기아차이다. 사진= 조해훈

순례길에 서 있는 십자가. 사진= 조해훈

오전 10시 40분, 한 알베르게 홍보판이 서 있다. 오전 10시 57분, 순례길의 저 아래에 마을이 푹 꺼져 보인다. 마을 못미쳐 길가에서 아저씨가 곡괭이로 작업을 하고 있다. 오전 11시 마을로 내려갔다. 어르신 두 분이 길에서 이야기를 하시다 한 분이 먼저 걸어가신다. 마을 길 오른쪽에 돌을 쌓아 지은 자그마한 카페가 있다. 들어가 커피와 크로와상 한 개를 주문했다. 11월인 지금은 순례길이 비수기에 접어들어 걷는 사람이 적다. 카페엔 손님이 한 사람밖에 없다. 차림으로 보니 단체로 온 순례자였다. 천천히 커피와 빵을 먹었다. 오전 11시 25분에 카페에서 나왔다.

오전 11시쯤 온타나스(Hontanas) 마을 입구에 한 아저씨가 곡괭이로 작업을 하고 있다. 마을이 푹 꺼져 형성돼 있다. 사진= 조해훈
마을 길 오른쪽에 돌을 쌓아 만든 카페가 있다. 필자는 여기서 점심으로 커피와 크로와상을 먹었다. 사진= 조해훈

카페에서 2분 정도 가니 돌로 쌓은 집을 보수를 하는지 모래가 쌓여있고 모래와 시멘트를 섞는 기계가 있었다. 일종의 미니 레미콘이었다. 우리나라는 대개 공사를 할 때 한두 사람이 서서 모래와 시멘트를 적절히 섞어 삽으로 섞는다. 그런데 여기는 미니 레미콘으로 섞는 모양이었다. 기계로 하는 게 더 잘 섞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 공사 등을 할 때 모래와 시멘트를 섞는 미니 레미콘 기계. 사진= 조해훈

마을을 천천히 구경하다가 벗어나니 오전 11시 34분이었다. 산골 마을이어서 규모가 작았다. 마을이 꺼져 있었으므로 순례길은 약간 오르막이었다. 오늘 코스도 평균 고도가 800m 정도 되었다. 그래서 생각하니 마을이 움푹하게 형성돼 있어도 홍수 날 염려가 없을 것 같았다. 산맥 지대여서 비가 많이 내려도 물 빠짐이 원활할 것이다. 오히려 마을이 주변의 지형보다 낮으면 겨울에 덜 추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낮 12시 13분, 오른쪽 언덕 중턱에 부서진 건물의 벽체만 하나 남아 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옛 교회 건물이다.

파괴된 교회의 의자에 스페인 벗인 루카가 일행과 앉아 있다 필자를 보곤 반겨주었다. 사진= 조해훈

오후 1시 8분, 파괴된 큰 교회 건물이 있다. 루카가 다른 일행과 의자에 앉아 있다가 필자를 보곤 “조!”라고 반겼다. 필자도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우리나라 아가씨 두 명이 함께 있었다. 건물을 둘러보곤 루카에게 “먼저 갑니다.”라고 인사를 하곤 그 자리를 벗어났다. 이 교회가 번성할 땐 부근에 마을이 있었을 것이다. 좀전의 언덕 중턱의 폐교회 건물도 그렇지만 사람들이 하나둘 떠나고 마을이 없어짐으로 인해 교회도 기능을 잃어 무너졌으리라.

오늘 하늘은 드물게 파랬다. 사진= 조해훈

폐교회를 벗어나니 자동차 전용도로는 아니지만 포장된 길이었다. 일직선으로 조성된 이 길을 따라 걸었다. 오후 1시 43분, 오늘 목적지 마을인 카스트로헤리스(Castrojeriz) 입간판이 서 있었다. 마을로 들어가니 마을의 역사가 오래된 느낌이었다. 곳곳에 마을의 길을 보수하고 있었다.

오늘 목적지인 카스트로여ㅣ리츠 알베르게에서 바라본 마을 풍경. 사진= 조해훈

오후 2시 11분, 마침내 카스트로헤리스의 공립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다. 무리 없이 잘 걸은 편이었다. 어제 같은 알베르게에 함께 하루 묵었던 이탈리아 여성 두 분이 먼저 도착해 현관 입구의 의자에 앉아 계셨다. 안으로 들어가니 주인이 없었다. 어제 함께 잤던 독일 청년도 있었다. 이탈리아 여성 한 분이 “30분가량 기다리면 주인아주머니가 오실 것입니다. 우리도 30분 기다렸어요.”라고 했다. 안에서 30분가량 기다리니 주인아주머니가 오셨다. 접수한 후 배정된 침대로 가 배낭을 풀었다.

이탈리아 젊은 부부가 “조!”라며, 인사를 했다. 남편인 지오바니(Giovanni·28)와 아내인 바레리나(Valeria·23)이었다. 이 부부는 필자와 가끔 숙소에서 만났다. 키가 큰 남편과 키가 작고 머리를 짧게 깎은 아내는 무척 착했다. 필자의 침대 옆 침대 1층이 배정받은 자리인 아내는 발바닥이 아픈지 침대에 앉아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았다. 필자가 “많이 아픈 모양이죠?”라고 물으니, “물집이 생겨 약을 발랐어요.”라고 답했다. 수염을 기르고 상투처럼 머리 위를 묶은 남편이 어디서 이발했는지 옆 머리를 깎은 게 표가 났다. 필자가 “머리 깎으니 더 멋집니다.”라고 말하니, 남편은 웃으며 “감사합니다.”라고 답했다.

오면서 보니 알베르게 못미쳐 작은 카페가 오픈해 있었다. 커피라도 한잔 마시려고 내려갔다. 그런데 그새 문이 닫혀 있었다. 카페 주인이 더 이상 도착할 순례자가 없으니 문을 닫은 모양이었다. 할 수 없이 알베르게에 돌아와 씻고 앉았다. 침대가 있는 방과 현관 사이에 자그마한 테이블이 두 개 있었다. 먼저 도착한 순례자들이 앉아서 떠들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 필자는 달리 할 게 없어 침대에 와 잠시 누웠다가 노트북을 꺼내 글을 썼다. 그러다 목과 어깨가 아파 누워 가져간 책을 읽었다. 목적지에 와 커피도 한잔 마시지 못하고 저녁이 되어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오늘은 오르니요스 델 까미노에서 카스트로헤리스까지 19.5km를 걸었다. 생장에서는 총 323.9km를 걸었다.

<역사·고전인문학자,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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