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교장선생님의 욕심과 의심치매(8)
형님이 돌아가시자 말자 형수가 제일 먼저 자식한테 물려준 것은 재산이 아닌 제사였다. 추석을 쐬고 죽었는데 불과 넉 달이 지난 설 대목에 며느리를 불러 제사상과 제기를 실어 보내면서
“내가 찔뚝없는 시어마시 모시면서 30년이나 제사를 모셨으니 인자 상미에미 니가 해라.”
하고 너무나 흔쾌하게 웃었다. 그래서 기제사에 올라간 열찬씨가 평생처음 제사를 모시는 질부가 차린 상이 너무나 부실하고 언양에서 가장 신경을 쓰는 생선이 조기, 민어, 돔, 전갱이등 구색을 갖추기는커녕 납작한 서대 몇 마리를 올린 것을 보고
“동생하고 내하고 아들이 둘이나 눈이 시퍼런데 우리 아부지 밥상이 왜 이 모양이냐?”
통탄을 했지만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부산과 달리 엄청 비싼 제사고기를 산다고 목돈이 들어가 부담이 늘어난 데다 제사가 끝나자 말자 며느리를 시켜 통닭과 생선을 비롯한 좀 먹을 만한 음식은 죄다 신문지에 사 냉장고에 집어넣고 탕국과 나물반찬으로 상을 차리다 김해댁에게 혼이 나 다시 꺼내온 후부터는 차츰 시동생이나 시누이가 제사에 오는 것을 꺼리는 눈치였다.
“그냥 동생들이 돈만 보내고 아무도 안 오면 좋겠지? 귀신이 뭘 아는 것도 아니고 저거 자식들 좋아하는 음식 쪼깨 차려서 저거끼리 하하호호 먹어치우게.”
큰말이 죽으면 작은말이 큰말 노릇을 한다고 순찬씨가 없으면 꼭 제가 나서서 시시콜콜 따지고 동갑나기 올케에게 시비걸기를 좋아하는 금찬씨가 흉을 보든 말든 그게 손주사랑인지 욕심인지는 몰라도 절만 끝나면 음식을 신문지에 사 냉장고에 넣기가 급해
“아이구 참 새꼴시럽고도 넘새시럽어라! 울아부지, 울어무이구신이 진짜 있다면 기가 차서 벌떡 일어날 것이야. 세상에 아무리 땟거리가 없어도 사람 좋고 경우 바르다던 명촌가손, 명촌때기가 큰 며느리, 큰 손부가 하는 꼴을 보면...”
금찬씨가 혀를 끌끌 차면
“손부가 무슨 죄가 있노? 무능한 신랑 우현이에 욕심 많은 시어마시를 만나 그렇지. 그 사람이야 알고 보면 불쌍한 사람이지.”
듣기 거북한 덕찬씨가 나서자
“맞심더. 나는 상현이엄마가 제사는 둘째 치고라도 도망 안가고 살아주는 것만 해도 고마워서 말입니더.”
영순씨가 나서자
“그래 니 말이 맞다. 나도 그 살 한 점도 없이 눈이 빠끔한 상현이 엄마만 보면 불쌍해서 죽겠다.”
하는데
“둘이 죽이 척척 맞는구나? 암만 그래도 나는 안 그렇다. 물론 상미애미가 서방이 신통찮고 형편이 어렵다고 하지만 인자 지 시어마시를 닮아 야시도 그런 야시가 없더라. 명절이고 기제사가 닥쳐서 미리 동생들이 돈을 안 부치면 안부전화처럼 전화를 해서 은근히 돈을 부치게 하고 시고모들이 제사에 가면 ‘고모님, 고모님!’ 반색을 하면서 은근히 봉투 주기를 바라고 봉투를 안 주면 눈길을 슬슬 피하는 것이 말이야.”
“아이고!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하더니. 언니야 그건 언니가 맨날 돈 한 푼 안주고 그냥 밥만 묵고 오니 그렇지.”
“가시나야, 내가 돈이 어딨노? 돈 많은 니나 많이 주면 되지.”
“언니, 그건 말이 안 되지. 많으면 많은 데로 적으면 적은 데로 형편대로 성의껏 주면 되지.”
“그건 돈 많은 너거가 할 소리고 내사 뭐 쥐뿔이나 있어야 주지.”
“무슨 소리. 넘은 딸 하나뿐인데 자기는 아들딸이 넷이나 된다고 자식자랑이 늘어지는 사람은 누군데?”
“그래 니 말 잘 했다. 니는 그 하나 자식 미진이가 명절이나 제사 때 돈 주더나?”
“안 주지. 아이들이 셋이나 되는데. 그리고 저거 아부지가 부자니까 굳이 줄 필요도 없이 무슨 일이 있으면 우리가 도로 주지.”
“그것 봐라? 너거는 하나가 뜯어 가는데 나는 홀어머니 하나에 넷이 뜯어가니 뭐가 남겠노?”
“그런 자식 가지고 자식자랑은 왜 하는데?”
“가시나, 니 시방 뭐라 캤노? 돈 없는 내가 자식자랑 말고 뭐가 또 자랑할 기 있겠노?”
눈길이 험악해지자
“형님, 그건 아닌 것 같은데요. 남이 천 원을 쓰면 나는 백 원이라도 쓴다는 각오, 남이 밥을 사고 고기를 사면 나는 다믄 백 원 짜리 종이컵 커피라도 한 잔 사야 형님 늘 말하는 미나쁜 일, 그러니까 멋쩍은 일이 없지요?”
“뭐, 뭐라꼬?”
그러고 보니 여태 그야말로 쓴 종이컵 커피 한 잔도 산 일이 없는 것이었다. 급소를 찔린 금찬씨가
“그래. 잘 한다. 까재는 기 편이라고 있는 놈은 역시 있는 놈들끼리 노네. 하긴 내가 너거 돈 버는데 보태준 일도 없으니 할 말도 아니고, 그냥 없는 놈만 설븐 거지.”
하며 괜히 싸울 번 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서 말입니더. 형님. 내일은 아아들 데리고 우리도 진장으로 갈 깁니더. 열시에 만납시더.”
“그래 알았다.”
비로소 수화기를 내려놓은 열찬씨가
“아니 요놈들 봐라?”
며느리 상미는 아이를 재운다고 자리를 깔고 눕고 아들 정석이는 저도 피로하다고 누운 서재 방에 가화, 현서 두 놈이 차례로 들랑거리더니 제가끔 책 한권씩을 들어다 거실에 팽개친 것이 여남은 권이나 되는데 이번에는 가화가 <소설이 아닌 임꺽정>을 현서는 말서스의 <인구론>을 들고 나오는 것이었다.
(허허, 이놈들이! 사람은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더니 벌써부터 책을 들고 나오네. 하긴 우리 집에 책 말고 뭐 내세울 것이 있나?“
하면서도 열찬씨의 입이 흐뭇하게 벌어지는데
“아이구, 정신없어라! 우째 지 할애비를 닮아 콩만 한 것들이 책만 가지고 노노?”
거실바닥의 책을 정리하며 영순씨도 빙긋이 웃는데 이번에는 <한국의 민중문학사>와 <라틴아메리카 현대사> 등 영순씨 조차도 감을 잡지 못 할 책 하나씩을 들고 와 쓰윽 중간을 한 번 열어보고 거실에 던진 아이들이
“내꺼야!”
“아니 내꺼야!”
책 한 권을 가운데 두고 서로 잡아당기며 싸우는 것이었다.
“보자아.”
열찬씨가 중간에서 책을 들여다보니 알록달록한 꽃이 많은 컬러표지의 <나무 쉽게 찾기>라는 책이었다.
“봐라. 여기는 새도 많지. 자, 현서 니는 이 책을 해라.”
<자연도감, 동물의 식물의 모든 것>이라는 책을 들고 와 갖가지 새가 많은 페이지를 펴 건네주자
“아니야! 가화가 할 거야!”
<나무 쉽게 찾기>를 내동댕이친 가화가 뺏으려 들자
“내꺼야!”
현서가 버텼지만 두 달 먼저 태어난 놈이 힘이 엄청 세어 상대가 안 되어
“으앙!”
울음을 터뜨리며 거실바닥에 앉아 발을 동동 구르자
“아이구! 서울언니가 우리 현서를 잡네!”
저도 피로해서 안방의 침대에서 잠들었던 현서어미가 나와 아이를 다독거리며
“아이구, 이건 어린이집 정도가 아니라 돗뙈기 시장이네.”
마침 잠이 깨어 칭얼거리기 시작하는 갓난아이 우화의 소리까지 가세하자
“그래 되는 집에 가장 큰 재산이 아이울음소리라고 하더니 우리 집은 완전 아이풍년일세.”
소파에 앉은 열찬씨가 텔레비전을 켜는데
“아이구, 속도 좋다. 그 쑥시기판에 테레비가 다 뭥교? 지금 그 정신이 있능교?”
“아이다. 오늘 중요한 경기다. 여자배구 도로공사 선두다툼이 걸린 경기다.”
하며 집중하는데 슬며시 리모컨을 가로챈 슬비씨가
“아빠, 우화도 깼고 하니 마 저녁이나 먹으러 가지.”
하는데
“외식은 무슨 외식? 집에 밥 준비해놨는데.”
이미 식탁에 상을 차리던 영순씨가 가로막는데
“갈비 잰 건 내일 김서방 오면 먹고 오늘은 외식하지. 명성만두 실세 빵집마누라가 쏜다.”
하며 게임에 123동에 사는 친구 민서와 닌텐도에 몰두한 영서를 독촉했다.
제사도 없는 설날아침 개 보름 쐬듯 평소와 별 다름없는 메뉴, 늘 먹던 김치 두 가지에 달랑 떡국 한 그릇을 얹어 식사를 마치고 열찬씨부자가 언양 산소를 향했다. 날씨가 춥기도 하지만 아직 아이들이 어려서 동행하기가 힘들었던 것이었다. 열찬씨가 40년 같이 가까이 살면서 영순씨에게 가장 고맙게 느끼는 것이 7남매나 되는 시가형제의 일이나 언양 선산을 돌보는 일에 한 번도 짜증을 내는 법이 없이 당연한 일처럼 잘 참여하는 것이었고 그래서 그런지 아들딸 역시 열찬씨가 맨날 ‘너거는 우짜든동 언양을 자주 찾고 신불산만 자주 쳐다보면 별 탈 없이 잘 살 거다. 언젠가 내가 죽고 없고 내 자손들이 한국을 넘어 세계의 어느 곳에 흩어져도 그저 조상이 언양사람, 그래서 신불산을 쳐다보고 살아온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말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좋겠다.’ 고 한 것을 아무런 이의 없이 잘 따르는 점이었다.
“햄인교?”
진장의 순우네 집 앞에서 먼저와 기다리던 백찬씨가 씩 웃자 민우, 성우 두 조카는 고개를 까딱했다. 그 과묵한 가족의 설날인사는 그게 끝이었다.
“민우는 공부 잘 하나? 성우는 제대했다며?”
하는데 아들 정석씨가 눈을 찡긋했다. 영순씨가 신신당부하던 말, 아직 취업을 못한 나이든 조카들에게 제발 부담스런 이야기를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한 가이드라인을 하마터면 넘어설 번 한 것이었다.
“삼촌 오셨어요?”
언양의 홍근씨가 싹싹하게 인사를 건네자 두 아들이 고개를 까딱했다. 이어 집주인 순우가 나오면
“...”
살포시 고개를 숙였다 들며 잇몸을 드러내며 슬쩍 웃는 것이 인사였다. 철우나, 용우, 찬우가 있어도 역시 인사는 그 정도였을 참으로 과묵하기도 하고 간소한 집안이었다.
“울산에 용우랑 찬우는 안 온다카더나?”
“예. 제가 전화는 했는데 확답을 안 했어요.”
“철우는 요새도 연락이 없고.”
“예.”
“그래. 이직 임대주택에 살고.”
“그런 모양입니다.”
“그래 밥은 묵고 댕기는가?”
“모르지요. 우짜다가 집안사람이 비치면 지가 먼저 피하고 맞닥뜨려도 대번에 꽁무니를 빼니 말입니다.”
“그래. 나도 초상집에서 한번 그런 일을 당했지.”
“예. 친구들 따라다니며 잔심부름도 하고 뭐 그래 밥은 안 굶는 모양입니다. 또 산재에서 얼만가 다달이 보상금이 나오고. 말입니다.”
부하에게 묻듯 하는 열찬씨의 몸에 배인 질문에 역시 상관에게 보고하듯 홍근씨가 차근차근 설명하자
“그래, 니 동생은?”
순우씨에게 눈길을 돌리자
“밤새 일하고 새벽에 들어와 제사를 지내고 바로 눈을 좀 붙인다고...”
순우씨가 송구한 듯 말끝을 흐렸다. 집 앞에 세워진 커다란 냉동 탑 차를 보며
“하긴 먹고살기가 바쁘면 어쩔 수 없이 조상들도 귀신같이 그 사정을 알 거야.”
하면서 그래도 종찬씨 네 자식 중에 유일하게 결혼을 한 둘째 관우가 이제 저도 곧 자식을 가질 텐데 아직 새색시인 제 아내에게 과일과 지짐이 든 광주리라도 이고 같이 산소에 가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다
“혹시 아이소식은 없는가?”
“아, 예. 지금 제수씨가 만삭입니다. 아마 올 봄에.”
“그래. 희소식이네 기왕 아들이면 좋겠지.”
비로소 점호를 끝낸 열찬씨가
“동생, 갈까?”
를 신호로 다시 모두 자동차를 타고 배 밭과 소 막이 드문드문한 진장마을을 빙 돌아 평리사람 큰 공동묘지를 향했다. 위계순서대로 할머니 서촌댁의 산소를 보고 다시 큰어머니 산소를 보러 길가로 내려와 절을 하고 다시 할머니산소를 통과해 마지막 어머니 명촌댁이 산소로 가서 조카들이 자리를 펴고 술을 붓는 사이
유인 담양전씨 윤봉지묘
서기 1989. 11. 28 졸
아들 가일찬, 열찬, 백찬.
공동묘지라 나중에 후손들이 헛갈릴까 봐 비석을 세우자며 진짜 국어선생다운 아주 간단한 한글전용의 비석을 쓰다듬으며
(명촌댁이, 잘 지냈능교? 우리 집은 다 편한데 영주 큰 집이 골치가 많이 아프니 좀 살피시고 울산 조카들 취직도 좀 챙기주소.)
하고 절을 하려고 죽 늘어선 사람 숫자를 세더니
“올해는 아홉 명이 다네. 내가 젊을 때 우리 형님들이 다 오고 어린 너거가 하나도 안 빠질 때는 보통 열다섯 정도가 되었는데 인자 열 명 채우기도 힘들구나. 야들아, 추석엔 최소한 열 명은 채워보자.”
하고 홍근씨와 순우씨에게 눈길을 주었다. 용우, 찬우, 철우와 관우를 데려오라는 압력이었다.
절을 하고나서 다시 자동차를 탄 일행은 아버지산소가 있는 순우네 집 앞을 통과해 작은 공동묘지 큰 아버지 선출씨 산소를 향했다. 무덤이 다닥다닥 붙은 데다 왼쪽 편의 무덤을 몇 년 동안 벌초를 안 해 맨 끝에서 절을 하던 열찬씨가
“아이구, 따가워라. 이래서 촌수가 높으면 서러운 거다. 내가 맨 꼬랑지, 무덤 등에 대고 절을 하던 시절이 어제 같은데 맨 위에 서니 마음도 서글픈데 이렇게 망개까시에 찔리기 까지 하다니.”
하고 절을 마치고 다시 아버지산소에 가서 절을 하고나서 산소에 술을 뿌리는 민우에게
“그래 할아버지가 우리 민우, 성우 왔다고 좋아하실 기다. 저 우에 묵 묘에도 한 잔 부어 드려라. 저 분이 우리를 도와주지는 못 할망정 후손도 안 찾아오는 자기는 한 잔 안 주고 저거 조상만 챙기고 간다고 앙심을 품으면 안 되니까 말이다.”
영순씨가 재발 취직이야기는 꺼내지 말라는 가이드라인을 또 살짝 피해갔다는 생각에 슬며시 웃으며
“자, 차례로 음복이나 한 잔씩 하자. 하고 남은 술을 주욱 한 잔씩 부어주니
이제 중학생이 된 홍근씨의 큰 아들도 넙죽 받아 마시는데 4학년짜리 막내는 손사래를 치며 물러났다. 모두들 순우네 집으로 올라가서
“데름 왔능교?”
“형수, 설 잘 씼능교?”
인사를 하는데 막내 해숙이가 술상을 차리고 배가 남산 만 한 관우씨의 처가 뒤뚱거리며 과일바구니를 들고 나와 옆에 앉더니 사과와 배를 깎는 손끝이 야무졌다.
“자, 설술 한잔 할 사람!”
하고 열찬씨가 둘러보아도 모두들 운전을 해야 된다며 피했다. 혼자 두어 잔 마시는 사이 다른 사람들은 커피를 한잔씩 하고 나서
“형수, 이리 오이소. 자, 세배하자.”
하고 형수와 열찬씨, 백찬씨가 조카항렬의 절을 받고 열찬씨가 아이 둘에게 만 원짜리 하나씩을 주자 늘 형이 하는 대로 따라 하며 혹시라도 과하거나 실수하지 않으려는 백찬씨가 그대로 따라했다.
“우짤래? 나는 읍내 상찬이형님 들여다볼 낀데.”
하고 백찬씨를 바라보자
“민우, 성우가 친구들 하고 약속이 있다던데요.”
하며 망설이는 백찬씨에게
“명절인데 몸 아픈 형수는 보고가야지. 아아들 약속이야 좀 늦으면 어떻노?”
하고 남부리 상찬씨집에 들러 열찬씨는 술상을 받고 백찬씬는 커피를 마시고 일어서며
“우짤래? 명촌누님 기다릴 낀데.”
하고 백찬씨를 바라보자
“인자 집집이 제사도 없고 묵을 것도 없고 명절기분도 안 나고 거기다 명촌에는 교회 댕긴다고 뭐 특별히 떡 한 쪼가리 하는 것도 없으니...”
“그래도 기다릴 낀데?”
“아아들 약속이 바쁘답니더.”
언제부턴가 백찬씨가 장촌, 명촌 두 누님집에 가기를 꺼리는 걸 영순씨를 통해 열찬씨도 알고 있었다. 먼저 명촌에 가기 싫은 건 평소에 찾아가서 다믄 김장배추라도 한 20포기 얻어가는 날이면 ‘나는 너거 자영 죽고 나서 저 아아들 다섯이 키운다고...’를 시작해서 울먹울먹 하도 죽는 소리를 해서 참다 못해 돈 한 푼을 꺼내주면 그게 배추 값의 몇 배가 되는데다
명절에 집에 찾아가면 변변한 설음식도 없으면서 또 기도를 하자고 하는 바람에 정이 안 붙는데다 또 ‘나는 너거 자영 죽고 나서 저 아아들 다섯이 키운다고...’를 시작하려고 울먹울먹할 때쯤
“누부야, 나는 간다!”
하고 일어서다
“너거 현대자동차는 보나스도 많이 나왔다면서?”
하는 말에 마지 못 해 돈을 한 푼 주고 오면 돈도 돈이지만 형 열찬씨가 명절때 누님을 대하는 원칙, 네 누님 중에서 일단 맏이인 신평의 갑찬씨를 찾아가 세배를 하고 용돈을 주고 갑찬씨가 돌아가고 나자 다음 순서인 김해의 순찬씨를 찾아가 세배를 하고 용돈을 주는 그 원칙에 따라 수원에 가지 못할 때는 자신도 형이 하는 대로 따라 하면 되는데 형 열찬씨는 명촌의 금찬씨가 울먹거리든 말든 한번 정한 대로 칼같이 지키는데 마음이 약한 자신은 그게 잘 안 되는 것이었다.
거기에다 장촌에도 요새 잘 안 가는 이유는 전부터 셋째 금찬씨는 부산의 열찬씨가 동생이 누나를 거꾸로 챙기는 대신 막내 백찬씨는 시골부자인 막내누나 덕찬씨가 쌀, 콩, 양대, 감자, 고구마, 고춧가루에, 마늘, 양파, 참기름과 밤과 감에 김장 무, 배추까지 무엇 하나 빠짐없이 챙겼는데 그게 매형 고차대씨가 산림조합에서 정년퇴직을 하면서 그만 사정이 달라지고 말았다.
워낙 부지런하고 검소한 차대씨는 부지런히 일해서 모으고 절대로 남의 것을 탐내지 않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무엇 하나 남에게 그저 주는 것은 아예 발상부터 해본 일이 없는 사람이었다. 거기다 마음이 여려 성가신 일을 제일 싫어하는 덕찬씨가 남편이 퇴직을 하자말자 농사일은 물론 집안살림까지 모두 넘겨버리고 칠십이 다 되 가면서도 해마다 땅을 더 사려는 남편에게
“나는 인자 장갱이가 아파 논에 못 간다. 논 더 살라면 당신 혼자 지으소!”
무슨 배짱인지 일체 논에 나가지 않자 저 사람이 왜 저러나 하면서도 점잖고 과묵한 차대씨는 더 이상 말을 않고 혼자 끙끙 농사를 지었다. 엎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집 앞의 채전 밭에서 찬거리를 챙기는 일 말고는 밭에도 잘 안 나가기 시작한 덕찬씨는 차츰 마을 경로당에 놀러나가는 날이 많더니 마침내 마을부녀회장까지 맡았다. 그 말을 들은 차대씨가
“살림사는 당신이 뭐 한다고 부녀회장을 다 맡노? 여자 하고 사기그릇하고 내 돌리면 안 된다는 것도 모리나?”
점잖은 체면에 심한 말은 못 하고 덜렁한 코끝에 불만이 가득한데
“무슨 소리. 내가 밥을 못 묵나, 돈이 없나? 어데 한글을 모르나? 내 동생 열찬이는 나이 마흔네 살에 면장보다 높은 동장을 하고 뭐 서기관에 국장도 한 판인데...”
하면서 열찬씨가 사무관이 되던 날
“야, 우리 처남이 옛날 언양현감 택이나 되는구나!”
하며 감탄하던 남편의 기를 죽였다. 그리고 얼마 뒤 장날 난전을 둘러 마트에 이르기까지 하도 미주알고주알 따지며 잔소리를 하는 남편에게
“인자 장도 당신이 보소. 운전하는 당신이 당신 묵고 싶은 거 사오면 내가 묵도록은 해주께.”
당일로 시장 보는 일은 물론 현금관리도 포기하고 무슨 일만 있으면
“당신, 부녀회서 관광가는데 돈 좀 주소!”
해서 5만원을 주면
“내가 50년 살아준 가치가 이것 밖에 안 되나? 그라고 우리 집에 돈이 없나? 죽어서 돈 사 짊어지고 갈 끼가?”
덕찬이라는 이름대신 순하다고 <순덕이>로 불리던 순둥이가 한 번 변하기 시작하자 차돌에 바람이 들면 썩돌보다 못 하다는 말이 딱 맞는 것이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자기 자신은 단돈 한 푼 못쓰더라도 외동딸 미진이나 세 외손자에게는 저녁마다 끙끙 앓으면서도 한 번도 타박 않고 돈을 주던 그 습관대로 덕찬씨에게도 입술이 한발이나 나와서도 매번 일단 주기는 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집안관리와 살림살이가 몽땅 넘어가면서 가장 타격을 받는 것이 백찬씨였다. 그전 같으면 미처 떨어질 새도 없이 주던 쌀을 자린고비 남편이 늘 집을 지키게 되자 가을걷이가 끝날 때
“불쌍한 우리 막내이 쌀 한 자루 주자!”
통사정을 하면
“현대자동차 댕기는 사람이 와 불쌍하노? 농사짓는 내가 불쌍하지.”
볼멘소리를 하는 남편이 무서워 남편이 들에 나갔을 때 슬쩍 40킬로 한 포대를 실어주고 혹시 남편이 창고에 남은 쌀자루를 셀까 봐 전전긍긍하는 것이었다. 백찬씨 역시 매형이 집에 없을 때는 제 것처럼 걷어가던 마늘, 양파나 밭의 무, 배추나 감자고구마도 이제 함부로 손을 댈 수가 없어 명촌에 가자니 또 신경이 쓰이고 해서 울산의 시장에서 사다 쓰면 명촌은 명촌대로, 장촌은 장촌대로 자기 집에 무, 배추가 한 밭 가득인데 그걸 안 가져갔다고 또 섭섭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다 가끔 장촌에서 무얼 가져가라고 전화가 와서 주말에 가면 갓 수확을 했을 때 진작 줄 일이지, 이제 이미 한 절이 지나 곧 못 먹게 될 무나, 감자, 고구마, 밤 따위를 주는 지라 무심결에 받아가서 요리를 하면 맛이나 냄새가 거슬려 먹지도 못하고 버린다며 음식물쓰레기 값만 잔뜩 나간다며 아내에게 잔소리나 듣기 일쑤였다. 그래도 기왕이면 농사짓는 누님네에게서 사준다고 쌀이나 고춧가루를 사가도 시장에서 사는 것 보다 값도 비싸고 또 품질도 더 나을 것도 없는데 더더욱 그 양이 절대 모자라지는 않지만 야박해도 너무 야박할 정도로 정확해 이럴 바엔 비싼 기름 값 들여 왜 장촌걸음을 하느냐고 또 욕을 먹는 것이었다.
이래저래 맘이 안 편해 아이를 핑계로 돌아간 동생을 뒤로 하고 열찬씨부자는 다시 명촌으로 향했다.
※ 이 글은 고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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