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가라사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所有)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寶貨)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 청년은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마태복음 19:21~24-

필자는 무신론자나 불가지론자라기보다는, 과학적 회의론자이다. 무신론자(無神論者)는 간단히 신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믿지 않는다. 불가지론(不可知論者)는 신의 존재 여부를 확실히 알 수 없다고 주장한다. 신의 존재를 증명하거나 반증할 수 없는 과학적 증거가 부족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회의주의자(懷疑主義者.회의론자)는 신(神)뿐 아니라 모든 주장을 비판적으로 평가하며, 어떤 주장에 충분한 증거가 없을 때는 그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들은 경험적 증거와 과학적 방법론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려 한다.

따라서 과학적 회의론자들은 신의 존재를 확증하는 증거가 부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종교적 믿음에 대해 신중하게 접근하나, 결과적으로 그 종교적 믿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경향이 강하다.

필자는 ‘바이블’을 자주 꺼내보는 편이다.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유신론자는 아니나, ‘종교적 심성’은 강하다. 인간의 힘만으로는 이룩하기 어려운, 더 조화로운 사회를 희구하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스피노자(Benedictus de Spinoza)의 입장과 궤를 같이한다.

스피노자는 예수를 ‘신의 아들’이라기보다는 ‘인류의 제1인자’로 묘사했다. 예수는 인류의 최고 지도자이며, 그의 가르침과 행동이 인류의 진정한 행복과 자유를 위한 길을 제시했다고 본 것이다.

‘바이블’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대문자로 시작하는 ‘Bible’은 구약과 신약으로 구성된 기독교의 ‘성경’(聖經)을 지칭한다. 소문자로 시작하는 ‘bible’은 특정 종교 경전을 의미하지 않고, 어떤 주제에 대한 권위 있는 책이나 정보를 가리킬 때 사용한다. 필자의 바이블은 ‘bible’이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쪽을 미워하며 저쪽을 사랑하거나 혹 이쪽을 중히 여기며 저쪽을 가볍게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마태복음 6:24-

사람은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할 수 없다. 독서와 TV 시청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 이건 시간적 제약이지만, 가치문제도 마찬가지이다. 부의 축적에 제1의 가치를 두게 되면, ‘인간적인 더불어 삶’에 대한 가치는 소홀히 할 수밖에 없다. 대부분의 기업가가 ‘00가족’하고 요란히 광고하지만, 기실은 최대 이윤을 위해 노동자의 임금 착취 혹은 임금 상승 억제를 선택한다.

예수가 인류의 제1인자라는 평가는 서양적인 사고이고 스피노자의 한계이지만. 예수가 인류의 스승인 것은 객관적으로 인정할 수 있다. 그 스승이 왜 ‘하느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했을까? 두 가지 가치(하나님과 재물)를 동시에 추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선택을 해야 한다. 재물을 선택하면? 하나님은 당연시 가볍게 여기거나, 무시할 수밖에 없는 일 아니겠는가. 기회비용(opportunity cost) 개념을 이해한다면 쉽게 알 수 있다.

세속적으로 ‘천국’, ‘하느님 혹은 하느님 나라’를 인간으로서 ‘가치 있는 삶’이라고 번역하자. 그러면 부자가 ‘가치 있는 삶’을 추구하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 재물과 ‘가치 있는 삶’을 겸하여 추구할 수 없다고 예수는 설파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가 빈말을 할 리가 없지 않은가!

더구나 필자는 위 예수의 가르침(마태복음 19:21~24)에서 일반적으로 얘기 되지 않는 중요한 사실에 관심한다. 부자인 청년에게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라고 했다. 한데 그래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부자와 빈자에 대한 가치판단은 빠져있다. 무조건 부자인 청년이 빈자를 도와주어야한 나(예수)를 따를(제자가 될) 자격이 있다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이는 주기도문 중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赦)하여 준 것과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마태복은 6:12)와 그 뜻이 통한다. 예수는 자기 제자가 되거나 천국에 갈 수 있는 자격 혹은 조건을 제시한 것이다.

가난한 자를 돕고, 자신에게 죄를 지은 사람을 용서할 때, 비로소 예수에게 자신의 죄를 용서해 주십사,고 간청할 자격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명쾌한 논리가 아닌가. 자기는 자기에게 죄 지은 이웃을 용서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예수에게 자기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하고 간청할 수 있단 말인가.

예수는 왜 부자와 빈자에 대한 가치판단을 하고 있지 않을까? 왜 부자가 빈자를 도우라고만 할까? 이는 예수보다 500여 년 전의 또 다른 인류의 스승인 석가모니(고타마 싯다르타. 기원전 560년경~기원전 480년경)나 공자(공구. 기원전 551~기원전 479)의 가르침에도 부자와 빈자에 대한 가치판단은 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계속>

<작가/본지 편집위원> <ouasaint@injurytim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