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인간의 가치는 무엇으로, 어떤 기준으로 평가할 수 있을까? 화엄사상에서는 인간의 가치는, 출가자나 재가자를 막론하고, 사회적 신분이나 명예 등 외형적인 것에 두지 않고, 보리심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린 것이라고 설파한다.
종교적 색채를 걷어내고, 인류 공통의 지적 유산으로서의 ‘보리심’은 누구나에게 자신이 추구하거나 목적하는 바의 일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를 준다.
보리심이란 무엇인가? 보리(菩提)란 ‘깨달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보리심(菩提心)은 ‘깨달음을 얻겠다는 마음’이다. 쉽게 말해, ‘내 자신이 부처가 되겠다’, 곧 ‘성불하겠다’는 마음을 먹는 것이 바로 보리심이다. 이런 마음을 먹는(일으킨) 것을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하고, 줄여서 ‘발심’(發心)이라 부른다.
한 인간의 가치는 보리심의 유무에 달렸다고 했다. 한데 좀 이상하지 않은가? 사람은 누구나 한 분야의 일에 종사하게 되어 있다. 그 분야에서 최고가 되는 것, 종교인 비종교인을 떠나 누구나의 바람이 아니던가.
입사하여 과장 부장 이사 대표이사가 되고 싶지. 공직에 들어가 과장 국장 장관이 되고 싶지. 정치에 투신해 지방의원에서 출발해 국회의원 대통령이 되고 싶지. 대치동 학원가에 자식을 보내는 엄마들의 마음 혹은 욕심이 정녕 그 ‘보리심’이란 말인가?
그럴 리야! 일반적으로 가장 중요한 이유나 목적은 생략하는 경우가 많다. ‘부자 되세요’, ‘건강 하세요’,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할 때, 그 말을 들은 상대방이 ‘왜?’, ‘무슨 목적으로?’ 라고 되묻지 않는다.
부와 건강과 복이 행복과 직결된다는 일반적 믿음 때문이겠지. 그러나 필자는 이 믿음을 신뢰하지 않는다. 세상사 만사 인생사,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행복은 부분들의 총합이다. 부와 건강과 복은 부분일 뿐이다.
부를 위해서 수전노란 불명예 안는다면 행복할까? 그 건강한 몸을 어디에 쓰는가? 복도 자주 받다 보면 복이 아니다. 또 무슨 더 많은 요행을 바라게 될까? 적은 부로 약자의 배고픔을 헤아리고, 한 군데쯤 고장 난 몸이어서 장애인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고, 어쩌다 행운에 즐거워할 수 있는 사람이 더 행복할 수 있지 않을까?
보리심을 일으키는 목적은 일체 중생을 제도(濟度)하기 위함이다. 곧, 사회적 약자를 고통에서 건져주기 위함이다. 남을 돕기 위해서는 먼저 내가 ‘알아야’(깨달아야) 한다. 그래야 오류 없이 제대로 약자를 도울 수 있기 때문이다.
대승불교의 이상적인 수행자들은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을 지향한다. 위로는 깨달음을 얻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한다는 것이다. 이 또한 보리심의 다른 표현이다.
보리심, 상구보리 하화중생에 대해 생각해 볼 문제가 있다. 과거, 혹은 중세까지는 일반 백성들은 전 생애를 오로지 의식주 해결에 써야 했다. 하여 거개가 문맹이었다. 인생의 의미 등등은 개나 물고 가라, 였다. 추위에 떨지 않고 배고프지 않는, 일차원적인 생존 본능으로 살아냈다.
그러한 때에 의식주 문제에서 얼마간 비껴나 있던 승려들은 삶의 의미 등 ‘철학’을 공부할 수 있었다. 하여 민중의 스승이 될 수 있었다. 스님은 스승님의 준말로 유추된다. 그러나 근대 이후 ‘산속의 공부’는 현실 해석에 한계를 갖게 됐다. 올바른 처신으로 사표는 될 수 있을지언정, 민중을 가르칠 수 있는 스승은 될 수 없었다.
‘깨달음’, ‘중생’, ‘제도’, ‘교화’ 등은 현실적합성이 있는 용어가 아니다. 앞의 용어들은 ‘위에서 아래로의 시혜’란 왕조시대의 냄새가 물씬 난다. 현대는 민주공화국 시대다. 시대의 흐름에 맞춰 재해석이 필요하다.
‘깨달음’은 삶의 의미에 한정해야 한다. 산속 공부로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세상에 대한 이해까지 왕왕 포함하는 경우가 있다. 언어도단이다. 산속에서 어찌 트럼피즘(Trumpism)을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중생은 민주시민으로, 제도와 교화는 사회적 약자를 돕는 일로 재해석함이 맞지 않을까?
필자는 불교를 보는 관점은 실존철학을 창시한 독일의 카를 야스퍼스(1883~1969)와 같이한다. 야스퍼스는 불교를 종교로 보지 않았다. 이유는 불교가 “위대한 포기”(The Great Renunciation)라는 개념이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붓다의 출가는 단순한 “집을 떠남”으로 보지 않고, “위대한 포기”로 이해했다. 결국 야스퍼스는 불교는 신에게 구원을 바라는 종교가 아니라, 개인 각자의 의지와 노력에 의해 획득되는 지혜를 강조하는 철학으로 이해한 것이다.
필자 역시 야스퍼스를 알기 전부터 불교를 지혜의 철학으로 받아들여 왔다. 불자의 표지(標識)는 선명하다. 윤회와 연기론을 인정해야 한다. 모든 현상과 존재는 상호의존적이며, 원인과 조건에 의해 생겨나고 번화하며 소멸한다는 연기론은 세상만사의 철리이다. 받아들인다.
마는, 윤회는 인정하지 않는다. 윤회의 주체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여 필자는 불자가 아니며, 불교는 지혜의 철학이라는 입장은 확고하다.
불교가 지혜의 철학이라는 입장에 서면, 보리심(혹은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현실적합성이 뚜렷해진다. 진실로 인간의 가치는 이 보리심의 존재 유무로 판별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조국과 윤석열을 들 수 있다. <계속>
<작가/본지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