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선생님은 왜 이 나라에 살고 계신가요?”
지배계층이 꽁꽁 숨겨온 조국의 어두운 역사를 드러내고 비판을 가할 때, 현 체제의 양지쪽에서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현실에 자족하는 이들이 흔히 쉽게 내뱉는 힐난이다. 절이 싫으면 절 탓하지 말고 절을 떠나면 되지, 왜 왈가왈부하느냐는 속내의 표현이다.
하워드 진은 이 물음에 대해 어떻게 답했을까? 그의 사고체계를 자전적 역사 에세이인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에서 그대로 옮긴다.
「(이 질문을 받고) 가슴이 뾰족한 것에 찔리듯 아팠다. 직접적으로 말을 하든 안 하든 그것이 사람들이 흔히 갖는 의문임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것은 누군가 대외정책을 비판하거나 병역을 기피하거나 국기에 대한 맹세를 거부할 때면, 거듭해서 등장하곤 하는 애국심의 문제, 조국에 대한 충성의 문제였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건 조국, 국민이지, 어쩌다 권력을 잡게 된 정부가 아니라고 설명하려 애썼다. 민주주의를 신봉한다는 것은 독립선언서의 원칙들-정부는 인위적인 창조물로서, 모든 사람이 삶과 자유,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동등한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다. 나는 ‘모든 사람’에 전 세계의 남성과 여성, 어린이가 포함되는 것으로 해석했다. 그들 자신의 정부나 우리의 정부에 의해 빼앗길 수 없는 삶의 권리를 가진 사람들 말이다-을 신봉하는 것이다.
어떤 정부가 이런 민주주의의 원칙을 저버린다면, 그 정부는 비애국적이다. 그렇다면 민주주의에 대한 사랑은 당신으로 하여금 당신의 정부에 반대할 것을 요구한다. ‘질서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게 되는 것이다.」
조국에 대한 충성과 애국심에 대한 논리가 간명하고 명쾌하지 않은가! 민주주의 원칙을 저버린 비애국적인 정부가 부과한 질서에 순응하는 게 애국인가? 그런 비애국적 정부의 질서에 저항하는 게 애국이지 않은가!
우리 헌법도 ‘저항권’을 인정한다. 권영성(1934~2009)의 『헌법학원론』(1991)에서 다음과 같이 저항권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현행헌법에는 저항권을 직접 규정한 명문규정은 없다. 개헌협상과정에서 저항권의 명시 여부가 여·야 간에 쟁점이 된 바 있으나, 결국 저항권을 직접 명시하지 아니하고, 헌법전문에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는 문구를 삽입함으로써 그것을 대신하기로 합의하였다. 동문언의 객관적인 의미는 저항권에 관한 규정이라 보기 어려우나, 한국헌정사의 특수성에 비추어 4·19의거는 민주이념을 구현하기 위한 저항권 행사였다는 점에 국민적 합의가 이룩되어 있고, 개헌안작성자들의 의도가 그 문구를 저항권에 대한 완곡한 표현이라는 점에 양해하였음을 상기할 때, 헌법전문의 동문구는 저항권에 관한 근거규정인 것으로 해석하여도 무방할 것이다.」
따라서 모름지기 민주시민, 특히 지식인은 전체 국민의 안녕보다는 소수 기득권자와 그 추종자들의 이익을 앞세우는 정권에 대해서는 가차 없는 비판(‘비난’이 아님)를 가해야 한다. 그리고 비판이 먹혀들지 않으면 어떤 방식으로든 ‘저항’을 해야 한다. 저항권은 민주시민과 지식인의 책무임과 동시에 권리이다.
“교수님, 더 이상 추해지지 마십시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대자보가 연세대 대도서관에 붙었다. 왜? 지난해 12월 23일 전·현직 대학교수 123명으로 구성된 ‘자유와 정의를 실천하는 교수 모임’은 “윤 대통령은 비상계엄 선포를 통해 반국가세력의 존재를 국민에게 알리고 부정 선거 증거를 확보하려 했다”, “비상계엄 조치는 헌법적 권한 내에서 합법적으로 행사됐다” 등 12·3 내란사태를 옹호하는 내용의 이른바 ‘시국선언문’을 발표했다. 이들은 윤 대통령 탄핵에 대해 “거대 야권의 선동”이라고 규정하며, “대한민국의 국권을 흔드는 반대한민국적 행위”라고까지 주장했다.
인구가 줄어들고, 학생수가 감소하니 ‘자리보전 경쟁’이 치열하고, ‘자리 욕심’에 이성이 마비된 것일까? 욕심 탓에 ‘뇌 썩음’(brain rot) 때문일까? 이들도 ‘자유’, ‘정의’, ‘실천’이 무엇인지 안다. 심지어 윤의 비상계엄 선포가 ‘대한민국 국권을 흔드는 반대한민국적 행위’임도 알 것이다.
인간성의 스펙트럼은 넓다. 앎과 삶이 따로 노는 지식인도 많다. 한 인간의 안에서도 양질의 인간성과 저질의 인간성이 공존한다. 물론 사람마다 그 비율이 조금 다르겠지만, 같은 인간이니 그 차이는 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식이 저질 인간성을 덮을 수는 없다. 지식은 도구에 불과하므로, 지식 자체는 가치중립적이다. 문제는 저질 인간성이 보상을 받으면, 양질의 인간성은 발현이 저만치 밀리고, 저질 인간성이 강화된다는 사실이다.
윤석열의 저질 인간성이 윤석열류의 저질 인간성 소유자들에게 보상을 하고, 그들과 함께 사적 욕망만 추구하다, 민주시민의 저항에 부딪히자, 돌파구로 ‘제 죽을 꾀’를 낸 게 비상계엄 선포이다. <계속>
<작가/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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