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을 챙겨 입고 서재 문을 열고 나와서 슬리퍼가 아니라 운동화를 신으면, 맨돌이(개)는 안다. ‘외출할 모양이구나’. 따라오고 싶어 컹컹 짖으며 깡쭝거린다. 머리 한 번 쓰다듬어 주고, 안 된다는 표시로 힘을 준 눈맞춤을 하고, 자전거에 오른다.
마당을 거쳐 삽짝을 나와 돌면, 맨돌이는 보이지 않으나 한층 더 높은 톤의 ‘컹컹’을 듣는다. 안쓰럽고 마음이 불편해 페달을 더 힘을 주어 밟는다. 이윽고 짖는 소리는 사라진다. 맨돌이가 체념해 짖기를 그만둔 때문일까? 단순히 내가 가청범위를 넘어선 때문일까?
총알이 무한히 직진하는 가상의 총을 머리 위로 쏠 경우, 총알이 물질에 부딪칠 확률은 얼마나 될까? 우주 공간은 대부분이 텅 비어 있다. 부딪칠 확률은 0에 가깝다. 달도 있고 태양도 있고 별도 있고 은하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들은 드넓은 우주 공간에서 하나의 점에도 미치지 못한다.
우리는 전체를 볼 능력이 없다. 자기와 주변이 전체라고 착각한다. 하지만 인간은 우주 공간에서 태평양의 일엽편주가 아니라, 하나의 티끌만도 못하다. 태평양에 물 한 방울 보태든 빼든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런 인간이 우주에 대해 텅 비었다고 할 것인가, 꽉 찼다고 할 것인가.
지구의 진화가 고도로 지능적인 유인원들의 문명을 낳기까지 40억 년이 걸렸다. 쉽게 말해, ‘나’라는 인간이 존재하기 위해 40억 년이 걸린 것이다. 그 장구한 세월 동안 ‘나’가 들인 노력은 하나도 없다. ‘나’란 존재는 필연이 아니라, 우연의 또 우연의 또 다시 우연의 산물일 뿐이다.
그 존재도 끽해야 100년 동안 유기체로서 존재한다. 40억 년에 비하면 ‘눈 깜짝 할 새’도 못 된다. 그런 존재에게 무슨 의미라는 것이 있을까? 그러니 ‘삶의 의미’란 애당초 성립불가능한 말이 아닐까?
그렇지만, 정녕 그렇지만, 우주가 인정하지 않더라도 ‘나’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인간이 만물의 척도이다’, 더 중요한 건 ‘인간 중에서는 내 자신이 척도이다’. 우주는 나를 위해, 나를 중심으로 도는 것이다.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는 일이다.
왜냐하면, 어떤 만물도 내 눈 감으면 보이지 않고, 귀 막으면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내가 사라지면 우주는 사라지는 것이다. 우주의 존재 여부와 상관없이 ‘나’가 죽으면 우주는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텅 빈 충만’, 인간으로서는 형용모순이 아니다. 텅 비었기도 하고, 충만-가득 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빔’과 ‘참’ 중 어디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일까? 졸견으로는 사람은 ‘텅 빈 충만’ 그 자체인 것 같다. 텅 비었기도 하고, 가득 찼기도 하다.
허욕은 비우고, 만족은 채웠으면 하 좋으랴. 마는, 만족은 비어있고, 허욕으로 꽉 찬 투쟁의 기록이 우리의 역사가 아닐까? 육십갑자를 한 순회하고도 남음이 있는 세월을 살아낸 경험에서 보면, 경제가 ‘좋니 궂니’를 떠나 물질적 풍요는 단군 이래 최고 수준이다. 그러나 만족 수준은 제 때 제 끼니에 만족해하던 어릴 때와 별반 다름이 없는 것 같다. 심지어는 연구자들에 따르면, 인류사적으로 고대 수렵·채집인이나 중세 농노보다 현대 자유인이 더 행복하다는 증거가 없다고 한다.
‘가득 참’에 대한 고마움은 잊고, ‘텅 빔’에만 관심하니, ‘구성의 오류’는 자연스럽다. 구성의 오류란 합성의 오류(fallacy of composition)라고도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가장 합리적인 의사결정이지만, 전체로 보면 합리적이지 않은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일을 가리키는 경제학 용어이다.
한 사람이 빨리 가기 위해 자동차를 몰고 나오면, 목적지에 빠르게 도착할 수 있다.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차를 몰고 나오면 교통 정체로 걷는 것보다 느려질 수도 있다. 경기장에서 경기를 더 잘 보기 위해 한 사람만 일어서면 그는 남보다 더 잘 관람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일어서면 아무런 효과도 없고 다리만 아프게 된다.
구성의 오류의 예로서 가장 잘 알려진 사례가 ‘공유지의 비극’(公有地의 悲劇·The Tragedy of the Commons)이다. 이는 지하자원, 초원, 공기, 호수에 있는 물고기와 같은 개방적인 자원에 개인이 이익에 따라 행동할 때 자원 고갈을 일으키는 경제 과학적 상황을 설명한다.
공동체 소유의 초원이 있다. 공동체에 속하는 모든 개인이 초원을 이용할 권리가 있다. 그러면 개인은 최대한으로 자신의 동물들(소, 염소 등)을 초원에 풀어 놓아 풀을 뜯어먹게 할 것이다. 이건 합리적인 행위이다. 그러나 전체로 보면, 초원을 얼마지 않아 황무지로 변해 더 이상 동물을 위한 초원의 기능을 잃을 것이다.
개인의 이기적 행동이 특히 자본주의에서 ‘경제적 합리성’으로 정당화된다. 그렇지만 경제적 합리성과 행복과는 상관관계가 그리 크지 않다. 경제적 합리성 추구가 ‘빔’을 채우려는 동기에서 출발한 것일까? 행복의 필요조건인 필요를 뛰어넘는 오로지 축적에만 관심한 연유는 아닐까? 아니면, ‘가득 참’에 대한 감각이 무디고, 끝없이 ‘텅 빔’에의 허기를 채우려는 몸부림이 아닐까?
행복은 빔과 참이 균형 잡힌 그 어느 지점에 존재하는 것 같다. <계속>
<작가/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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