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남부선 옛 동래역. 여기서 패총이 발굴됐다. Ⓒ박창희
#사라진 휴산역
동래구 낙민동 낙민초등학교 앞. 한무리의 아이들이 쏟아져 나오자 학교 앞이 장터처럼 시끌벅적하다. 교문에 붙은 슬로건이 인상적이다. ‘달려온 100년, 빛이 날 100년’. 낙민초교는 1912년 문을 열었다. 헌데, 달려온 100년 너머에 달려온 1,000년의 역참 역사가 있었다는 것을 누가 알까.
인근에 동래패총 유적이 있다는 것도 아는 사람만 안다. 동래패총은 동래구 낙민동 옛 동해남부선 동래역 인근 저습지에 형성된 삼한·가야시대 패총 유적이다. 1930년 동해남부선 철도공사 중 독널(甕棺)이 발견되었고 이후 두어 차례 발굴조사에서 대규모 패총(조개무지)과 철 생산 유구가 확인되어 사적 제192호로 지정되었다. 패총뿐만 아니라 토기, 골각기, 동물유체까지 다량으로 나왔다. 1~3세기의 ‘동래 사람들’이 육상동물 및 바다 어류, 조류 등을 잡아 생각보다 맛난 식탁을 꾸렸음을 알 수 있다.
2017년엔 옛 동래역 일대에서 패총 유적이 추가로 드러났다. 기존 동래패총에서 100여m 떨어진 위치다. 이 일대가 2000여년 전부터 사람 살기 좋은 터전이었음을 알 수 있다. 1934년 건축된 동래 역사(驛舍)도 명물이다. 패총 자리에 들어선 데다 건축물 자체도 80여년이란 시간이 응축돼 있다. 이 자리에 사회복지종합센터를 짓기로 한 부산시의 계획 수정이 불가피해졌다.
한 시대의 임무를 끝내고 나직히 엎드려 있는 동래 역사를 보면서 박 선달이 무릎을 딱 친다. “그려, 옛 동래역을 휴산역으로 만들면 되겠군. 흐흠, 역(驛)의 절묘한 유전이야, 휴~” 그가 내뱉은 ‘휴~’ 소리는 한숨이라기보다 안도감의 표시리라.
휴산역(休山驛)은 일찍이 사라진 역참의 이름이다. 이름대로 간다던가. 휴산(休山), 쉬는 산이라 역사 속으로 사라진 건가. 휴산역은 조선시대 동래 도호부에서 출발하는 영남대로(嶺南大路)의 최남단 시·종착점이다. 영남대로는 동래성 남쪽의 휴산역에서 시작하여, 기찰(부곡동), 소산역(하정마을)을 거친 다음 양산 지역을 경유하여 서북 방면으로 나아가 한양에 이른다. 휴산역에는 중마(中馬) 2필, 복마(卜馬) 5필, 역리 166명, 노비 30명이 있었다니, 그 규모가 만만치 않다. 휴산역에서 이섭교(利攝橋)를 건너면 수군 병영이 있던 좌수영이요, 고촌 안평으로 가면 기장이다.
휴산역은 오늘날 동래구 낙민동 낙민초등학교 부근으로 추정된다. 1740년 간행된 『동래부지(東萊府誌)』에 보면, 동래부 읍내면에 휴산동(休山洞)이 있다. 그 뒤의 1915년에 작성된 지적 원도에는 휴산동이 생민동(生民洞)으로, 다시 수안동으로 바뀐다. 바뀐 경위는 알려진 것이 없다. 아마 일제강점기 일본의 문화말살 정책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한다. 지명 단절은 못내 아쉽다. 휴산동은 자연스럽게 휴산역을 부르고, 휴산역은 영남대로의 웅혼한 역사를 부르는 이름이 됐을텐데 말이다.
답답한 마음이 박 선달의 걷기 본능을 자극한다. 오늘은 동래에서 양산 황산진(물금)까지 흠씬 걸을 참이다. 걷다 보면 지워지고 사라진 길의 정령들이 보이리라. 옛 지도와 현대 지도를 펴 놓고 행선을 그려본다. 휴산역(옛 동래역)에서 출발하여 기찰~소산역~사밧재~양산 영대교~황산진(물금)까지 가려면 하루해가 짧을 것이다. 나그네가 해를 탓하랴.
옛길을 들추자니 동래는 낯설다. 이 도시는 오래전에 길의 원형을 잃어버렸다. 길다운 길은 모조리 뭉개고 지우고 없애버렸다. 그것을 발전이라 자위한다. 길들은 풍경에서 사라지기 전, 먼저 인간의 마음에서 사라져 버렸다. 물신을 앞세운 크고 넓은 길이 대세가 된지도 오래다. 사람들은 바퀴의 신을 떠받든 채 걸으려 하지 않았다. 바퀴는 곧 문명의 척도였다. 콘크리트 더미 속에서 흙길은 천연기념물처럼 귀했다. 그렇게 길은 도로가 되었고, 효율 혹은 경제로 치환됐다. 도로엔 바퀴의 신들이 득실거릴 뿐, 그 어디에도 옛길 한자락 온전히 남은 곳이 없다. 현대인들은 길을 잃어버렸다.
박 선달은 그나마 남은 지명과 유적을 좇아 옛길을 더듬는다. 동래부 동헌과 동래 향교는 역사의 길눈을 틔워주는 이정표다. 동헌의 충신당 앞 마당엔 십자형 형틀이 놓여 있다. 납작한 곤장 방망이가 길손을 노려본다. 매 맞고 싶다. 볼기짝 얻어터지도록 두들겨 맞으면 옛길이 길을 알려줄까. 상념이 어지럽다.
동래 향교를 지나 명륜로로 나선다. 명륜초등학교에서 온천 입구 사거리까지는 ‘대낫들이 길’로 불린다. 동래 부사가 부임 또는 이임할 때 지나가던 길로, 늠름한 행렬이 워낙 장엄해 ‘큰(대) 나들이를 한다’는 뜻에서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조선 초기에 동래는 현이었으나 명종 때 도호부로 승격됐다. 도호부사는 종3품이 임명됐으나 도호부사 중 동래부사만은 정3품 당상관이 맡았다. 대부분의 동래부사는 문과 급제자였으며, 충정과 위엄을 갖추고 휼민(恤民)의 정신으로 선정을 베풀었다. 동래의 행정·사법·외교·국방 업무를 책임졌던 동래부사는 왜관 통제, 왜사 접대 같은 일도 병행해 국왕의 신임이 두터운 인사들이 많이 발탁되었고, 그만큼 업무수행이 힘든 자리였다.
#기찰 지나 소산역으로
온천 입구 사거리를 지나 계속 가면 부곡동의 공수물 소공원, 기찰마을이 나온다. 공수물은 조정으로 들어가는 공물을 모아 운반하는 장소였고, 기찰(譏察)은 일종의 검문소였다. 조선 시대엔 이곳에 기찰 포교(譏察捕校)가 상주하면서 통행자나 물품 등을 검문 검색했다. 옛 지도엔 ‘십휴정(十休亭) 기찰’로 표기되는데, 오늘날 부산시 금정구 부곡동 농협 부곡지점, 부산가톨릭대학 들머리다.
옛 소산역 터로 추정되는 금정구 하정마을 경로당. Ⓒ박창희
박 선달이 주변을 둘러본다. 길 거리에 기찰 맨션, 기찰 목욕탕이라는 간판이 보인다. ‘기찰이 여기 있구나…’. 인근 편의점에 들어가니 ‘기찰 막걸리’란 상표가 붙은 막걸리까지 있다. 입맛을 다시던 박 선달이 막걸리 한 병을 사서 즉석에서 한잔을 부어 마신다. “캬-. 이게 바로 길술이고 길맛이로고!” 박 선달이 마신 것은 한잔의 막걸리가 아니라 ‘기찰’이란 옛길의 흥건함이었다. 불콰해진 박 선달, 기분이 좋아졌다.
옛 황산도는 금정문화회관 옆을 지나 동래여고 앞 체육공원로로 접어든다. 곧이어 소산고개다. 고개가 낮다고 낮춰보면 안 된다. 이곳에서 임진왜란 때 의병 전투가 벌어졌다. 동래성에서 빠져나온 경상좌부사 이각이 도주한 길에서 의병들은 향토 사수를 외치며 싸웠다. 주역은 의병장 김정서(1561~1607)다. 기록이 영세하지만 임란 개전 후 조선의 첫 의병으로 기록될 만한 전투였다.
1592년 4월 15일(음력). 동래성을 함락시키고 황산도(영남대로)를 따라 북진하던 왜군은 땅거미가 내려앉자 ‘소산역’에 진을 친다. 그 시각 인근 상현마을 출신 의병들이 소산고개에 올라 왜적의 동태를 살핀다. 이날 밤 몰래 투석기가 설치되고, 승전에 취해 곤히 잠든 왜군 진영으로 커다란 바윗돌이 날아든다. 왜군의 비명과 함께 전투가 벌어진다. 이곳의 의병들은 이후에도 게릴라전을 통해 왜군을 괴롭혔다.
임란 초기에 의병 활동을 펼친 이들은 동래지역 문중들이었다. 참전한 문중은 의병장 김정서를 배출한 강릉 김씨를 포함해 모두 14개 문중, 36명에 이른다.¹ 임란 후 공을 세운 사람들을 기록한 ‘선무원종공신녹권(宣武原從功臣錄券)’에는 부산지역 인물 66명이 실리지만, 소산전투의 내막은 알기 어려웠다. 그런데 3년 뒤인 1608년(선조 41년) 동래부사 이안눌이 이들 중 공적이 특히 뛰어난 24명의 별전공신(別典功臣)을 선정하면서 소산전투의 내막이 드러난다.
소산고개를 넘으며 박 선달은 짓밟힌 나라를 구하기 위해 분연히 일어난 의병들의 넋을 생각하며 잠시 묵념을 올린다. 이곳의 의병들은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또는 문중이나 친인척의 부름을 받아 기꺼이 의병 대열에 합류했다. 황산도는 그 ‘의로운 싸움’을 기억한다.
소산고개를 넘어 상현마을 입구 4거리에서 경부고속도로 굴다리를 지나면 곧장 소산역이다. 중요한 역참이 자리한 금정구 선두구동 하정마을은 한갓진 변두리로 옛길의 쇠락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1970년대 경부고속도로가 뚫리면서 영남대로의 역참마을은 도로에 포위된 형국이다. 역(驛)의 웃지못할 변화다. 일제가 경부선 철도를 놓으면서 짓뭉갠 영남대로를 고속도로가 또다시 짓밟은 격이다.
하정마을의 경로당이 옛 소산역의 자리라고 한다. 마을 촌로들은 “경로당에서 200m 쯤 떨어진 하정길 개천 건너편에 마방(馬房:말을 두는 장소)이 있었고, 거기서 마당제(馬堂祭)를 지냈다”고 했다. 촌로들의 부친이나 조부 중에는 역리나 역졸도 있었을 법하나 묻기가 조심스러웠다. 조선시대 역촌 사람들이 천대받은 건 세상이 다 안다. 역촌의 후예든 아니든, 하정마을 촌노들의 얼굴엔 시대 변화가 야기한 어떤 쓸쓸함과 피로감이 묻어난 모습이다.
역사에 떠밀려 쓸쓸한 것이 어디 역촌뿐일까. 황성 옛터도 쓸쓸하고, 왕후장상도 때가 지나면 쓸쓸해지는 법. 그런데 한 시절의 소임을 끝낸 역촌임에랴. 박 선달도 덩달아 쓸쓸해지려 한다. 나그네가 감당해야할 상념이 기실 만리다. 하정마을을 돌아나온 박 선달은 마을 동쪽 당산길 입구에 세워진 두 개의 비석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오호라, 네들이 황산도 지킴이, 이정표렸다!’
#황산 이방을 기억하다
비석의 사연은 비석이 스스로 밝히고 있다. 왼쪽은 ‘수의상국이만직영세불망비’(繡衣相國李萬稙永世不忘碑)로서, 조선 고종때 암행어사 이만직이 소산역의 어려움을 파악하고 세금 탕감과 역원 복지를 위해 힘 쓴 은혜를 칭송한 내용이다. 이만직은 1887년(고종 15)에 활동한 경상좌도 암행어사로, 황산도의 소산역과 휴산역을 거쳐 끝자락인 부산포를 시찰하면서 관세 시행을 주장했다. 1878년 7월 19일 ‘승정원 일기’에도 이만직이 “화물을 뽑아 각 물품에 세액을 정해야 한다”고 건의한 내용과 받아들인 사실이 기록돼 있다.
금정구 하정마을의 황산도 비석걸.
비명 양쪽에는 ‘우리의 폐단을 누가 구원하랴 때를 기다려 개혁하였네/ 메마른 구덩이에 혜택을 고루 미치고 또렷하게 병의 맥을 진단하였네/ 오래갈 규범을 조금 보존하여 점차 소생함이 있도록 기약하였네/ 은혜와 덕을 몸에 새겨 길이길이 잊지 않기로 맹세하네’라는 뜻의 4언시 4구가 새겨져 있다.
비명의 뒷면에는 ‘황산(黃山) 무흘(渭川·밀양시 삼랑진읍 미전리) 휴산(休山·동래 낙민동)’이라는 역명이 뚜렷하다. ‘광서 4년(光緖四年) 무인정월일(戊寅正月日) 입(立)’이라는 건립 일자와 비를 세운 ‘소산(蘇山) 감관(監官)과 색리(色吏)’의 이름도 보인다. 이만직 공이 무흘에서 휴산을 거쳐 소산역에 와서 민생복지를 위해 기금을 조성한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해 소산역의 감독관과 관리책임자가 1878(고종 15)년 비를 세웠다는 내용이다.
해외 무역이나 관세에 대한 개념조차 정립되지 않았던 시기에 관세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관철시켰으니, ‘통상 무역의 선구자’라 할만하다. 부산세관에서 이만직을 각별히 챙기는 이유다.
바로 옆에 있는 ‘황산이방최연수애휼역졸비(黃山吏房崔延壽愛恤驛卒碑)’는 상관이 부하를 위해 세운 이색 송덕비다. 이방 최연수(崔延壽)가 역졸을 아끼고 보살피는 인격과 덕망이 높아 이방으로 있기에 아깝다는 뜻에서, 소산역과 휴산역의 도장·수리 상관이 1697년(숙종 23)에 세웠다는 것이다.
앞면에는 ‘공무를 받들어 정성을 다해 어루만져 돌보는 뜻이 간절하였다/차가운 연못과 같이 청렴하였으니 이방으로 머문 것이 애석하도다’라는 4언 시가 적혀 있고, 뒷면에는 휴산(休山) 소산(蘇山)이라는 역명은 물론 수리(首吏·역리의 우두머리)와 도장(都長·감관의 상관)의 이름과 ‘강희 36년 정축 2월 1일’이라는 건립 일자가 새겨져 있다.
이 2기의 비석은 황산도의 행로와 소산역의 위치를 정확히 일러준다. 이 비석은 한동안 하정마을의 밭 언덕과 당산길 앞 언덕에 좌대 없이 누운 채로 나뒹굴고 있었다고 한다. 그것을 향토사를 연구해온 가마골향토역사연구원 주영택 원장이 발견했고, 2007년 말 금정구가 수습해 하정마을 비석걸에 복원해 놓았다.
황산도는 잠시 경부고속도로와 동행하다 노포동 고분군을 끼고 팔송 검문초소를 만나고, 1077 지방도를 따라 작장·대룡·녹동마을을 지나 지경고개(일명 사배고개)를 넘어 양산으로 들어간다. 지경고개 마루에는 3기의 비석이 있어 오고 가는 길손들의 휴식처가 되곤 했다. ‘부사민영훈공거사비’(府使悶永勳公去思碑)는 이곳 도로 확장시 부산 부곡동 공수물 소공원으로 옮겨졌고, ‘양유하이혜불망비’(梁有夏貽惠不忘碑)만 자리를 지키고 있다. 기근 때 사재를 털어 백성을 먹여 살린 은공을 칭송하는 비석들이다. 길에서 만난 지역사의 숨겨진 사연들이 길손을 흐뭇하게 한다.
양산에선 동면 사송리, 외송리를 지나 동면사무소, 양산읍성터를 거쳐 영대교를 건너 황산진, 그러니까 물금으로 들어간다.(계속)
#1. 임진왜란 소산전투에 관한 내용은 가마골향토역사연구원 주영택 원장의 연구를 인용했다.
<이 원고는 부산문인협회 주관의 월간 ‘문학도시’ 1월호에도 게재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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