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문서없는 노예가 되어(5)
이윽고 회식이 시작되었는데 그늘 막 밑의 방수탁자에 어른인 순란씨를 중심으로 열찬씨와 황서방, 갑린씨, 김 서방이 앉고 고기를 굽는 바비큐 통에는 영서아비와 황 서방의 처남남매간이 붙자 이제 열다섯의 주형이도 저도 사내라고 거기에 붙었다. 고기만 먹으면 느끼하다고 영순씨가 미리 아나고 구잇감을 사오면서 넉넉하게 사온 채소에다 열찬씨가 심어 겨우 손톱만큼 자란 상추를 뽑고 민들레를 뿌리째 뽑아 한 쟁반 올려놓고 먼저 아나고구이를 먹는데
“아, 갈방상추!”
장모 순란씨가 신이 나서 손바닥에 한 움큼 올려놓고 고기를 올리며
“얼마만이고? 소야에서 열네 살에 나오고 60년도 더 지나서 갈방상추를 먹네.”
감탄을 하는데
“아, 써!”
무심코 민들레를 입에 가져간 차복씨가 오만상을 찌푸렸다. 방에서 상을 내어다 혜원이, 주형이, 지현이, 영서 네 아이의 상을 잔디밭에 차려주고
“김 서방 덕에 호강하네. 우리도 앉자.”
영순씨의 세 자매와 혜원이엄마가 탁자에 끼어 앉자 교영이와 주형이가 익은 아나고를 운반하는데 구우면서 얼마나 먹었는지 입가에 초장과 검댕이 번졌다. 그렇게 순식간에 아나고 구이 2관을 먹어치우고 이번엔 삼겹살과 목살을 먹기 시작하는데 휘익 바람이 불며 그늘막이 흔들려
“야, 바람도 참 세네.”
하고 사정없이 요동치는 그늘 막을 보다
“형님, 철사나 노끈 있어요?”
황 서방이 금방이라도 다시 단단하게 고정시킬 판인데
“그냥 두게. 헐렁하게 두어 펄럭거려야 바람이 그냥 통과하지 너무 단단하게 고정시키면 자기에게 반항하는 줄 알고 기어이 무너뜨릴 걸세. 그늘 막뿐 아니라 집까지 말이야.”
열찬씨의 말에
“그런가?”
황 서방이 물러앉는데 또 한 번 휘익 바람이 몰아치더니
“아빠!”
고기를 굽던 교영이가
“울타리그물이 통째로 넘어졌어.”
해서 바라보니 시꺼먼 그물이 무너져 기다란 뱀장어처럼 길을 덮고 누워있었다.
“이런 도로아미타불이네. 고기 좀 먹고 다시 해야겠네.”
황 서방의 말에
“내 생각엔 다시 튼튼하게 고정시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물에 칸칸이 탁상달력이나 A4용지만 한 구멍을 뚫어주어 바람이 통하게 하는 것이 좋겠어.”
“그러든지요.”
하고 다시 삼겹살을 먹는데
“야, 입에 살살 녹는다.”
어디서 배웠는지 세 살짜리 현서가 한마디를 해 모두 웃음보를 터뜨리는데 빵빵, 길가에 자동차클랙션이 울리더니 하얀 승용차하나가 멎었다. 순간
“아이구야!”
영순씨의 표정이 일그러지더니
“드디어 올 것이 왔네.”
한숨을 푹 쉬었다. 이어 윤 여사와 이 선생이 넘어진 울타리를 바라보며 휘적휘적 걸어오더니
“야, 대단한 가든파티가 벌어졌네. 식구가 많아도 오지기도 많네.”
윤 여사가 중얼거리며 들어오자
“오셨어요?”
얼굴이 벌개진 영순씨가 안절부절 하는데
“누고? 땅주인이가?”
민감한 영신씨도 젓가락을 놓고 일어서는데
“이 선생, 어서 오세요. 윤 여사도 좀 앉으시고.”
열찬씨가 일어나 자리를 권해도
“아, 아닙니다. 남의 가족회식에...”
윤 여사가 말끝을 흐리는데 얼핏 구서동에서 보던 교장사모의 새파라동동한 얼굴이 느껴져 열찬씨가 멈칫하는데
“방으로 가십시다. 따로 상을 봐드릴 게.”
하고 두 사람을 방으로 모셔 상이 없어 열찬씨의 책상 앞에 앉게 하고 삽겹살과 야채를 들고 와 소주까지 부어주며
“미리 이야기 하고 회식을 한다는 것이 내 동생들이 하도 갑자기 밀어붙이는 바람에.”
영순씨가 죄를 지은 사람처럼 전전긍긍하다
“조금만 일찍 왔으면 아나고구이도 있었는데...”
하고 말끝을 흐리자
“아닙니다. 야외라 그런지 삼겹살 맛이 기가 찬데요.”
이 선생은 기분 좋게 한 잔하고 삼겹살을 집는데 윤 여사는 끝내 고기를 집지 않고 창밖을 내다보며 이리저리 눈망울을 굴리다
“여보, 우리는 밭이나 한 바퀴 돌아보고 갑시다.”
아직 삼겹살에 미련이 많은 남편을 기어이 일으켜 세워 자기네 매실밭에 들어갔다.
“큰일 났다. 언니야.”
“와?”
“땅주인여자 표정이 장난 아니더라.”
“뭐. 자기 땅을 빌려 농사짓는 사람이 자기들도 안 하는 삼겹살파티를 하는 것이 보기 좋겠나?”
“그런 정도가 아니고 방금 불벼락이라도 칠 표정이더란 말이지.”
“먹자. 기왕 벌인 잔치. 그리고 땅을 빌려줬으면 땅을 빌린 사람이 뭐를 하든 간섭을 말아야지.”
어른들의 기분이 가라앉아 금방 아이들도 분위기를 파악한 듯 먹새가 줄어들어 고기 굽는 속도도 차츰 느려져
“안 되겠다. 내가 장모님부터 한잔씩 부을 테니 황 서방은 고기 한 점씩을 권하게. 만약 제 때 못 마시면 노래 한 곡을 하기로 하고.”
두 동서가 술을 붓고 고기를 권하며 분위기를 띄우는데
“...!”
갑자기 또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그 사이 고기를 굽는 물탱크 뒤를 지나 막사 뒤를 돌아 울타리를 한 바퀴 돈 두 사람이 회식장 앞을 휙 지나가며
“분위기 좋네요. 우리는 먼저 갑니다.”
하고 나가자 영순씨가 뒤따라가며 뭐라고 해명하며 돌아오는데
“언니야, 큰일 났다!”
창고 안 화장실에서 일을 보고 나오던 영신씨가
“내가 화장실 안에서 들었는데 말이야. 그 여자 심술이나 불만이 보통이 아니던데.”
“와? 머라 카더노?”
“남의 땅 빌려서 일은 잘 거들어주지도 않으면서 온 식구들 불러다 제 집처럼 가든파티 벌이는 꼴을 좀 보라고 남편을 들들 볶더군.”
“그래서?”
“사람을 척 보면 아는데 만사를 남의 손을 빌리는 고위공무원 출신에 시인에 나이 많은 노인이 어떻게 우리 밭일을 도와줄 것인가 못 믿는다고 했을 때 그래도 모처럼 연산동처형의 부탁이니 무조건 들어주자고 한 당신이 세상물정을 몰라도 한참이나 모른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 남편이란 사람이 ‘자기는 이 선생이 너무 점잖고 존경스럽다.’고 하자 ‘이 양반아, 지금 우리가 시를 잘 쓰거나 인품이 존경스러운 사람을 원하나? 우리 밭에 약을 쳐주고 풀을 베어줄 사람이 중요하지.’ 하고 닦아세우는 거야.”
“그래서?”
“남자가 하는 말이 ‘지난주에 나이도 많은 분이 너무 고생을 많이 하며 잘 도와줬지 않냐.’고 하자 ‘그거야 소작인의 입장에서 너무나 당연한 거라.’고 했지.”
“그렇구나. 그 사람들 입장에선 그럴 수도 있겠지.”
“아니야, 그것뿐이면 내가 말을 안 해.”
“왜 또?”
“남의 밭에 자기가족 파티하면 깨끗이 할 일이지 어데 사내들이 아닌 수캐들만 데리고 왔는지 구석구석 오줌을 싸서 코를 들 수가 없다고.”
“그거야 남자들 화장실은 침침한 데가 화장실이라고 창고 안에 화장실을 여자들이 사용하니 자연 그럴 수밖에. 그리고 그건 단 며칠이면 바람에 다 날아가고.”
열찬씨가 얼버무려도
“형부, 내가 이 이야기는 안하려고 했는데. 형부가 수돗가에서 설거지를 하며 함부로 밥풀과 음식물찌꺼기를 버려 온 밭이 시궁창이 되었다고.”
“무슨 소리. 내가 뭐 많이 버릴 거나 있나? 어쩌다 밥풀떼기 몇 개 흐른 모양인데 대저 수채란 밥풀도 있고 무시 꽁대기도 있어 그 아래 지렁이가 살아야 건강한 자연과 농장이 되지.”
“보소. 그게 당신의 알량한 낭만이지 불만이 가득해서 굳이 티끌을 잡으려는 사람에게 변명이 되나?”
바로 부삽을 들고 나서는 영순씨를 말리며
“손님들 다 가고 나면 내가 정리할 게.”
말리면서
“자, 그 일은 잊어버리고 다시 고기 구워 먹고 남자들은 훌라도 치고 여자들은 수다도 좀 떨고 하다 저녁 먹고 마치자!”
열찬씨가 다독거리고 순란씨가 재촉을 해 다시 고기를 굽고 영순씨가 미더덕과 달래를 넣은 된장을 지져
“기분은 더러워도 된장은 더럽게도 맛있네.”
하며 점심을 먹고 차를 마시고 훌라를 치고 수다를 떨고 아이들은 이리저리 쏘다니며 오후 다섯 시가 넘어 영순씨가 저녁을 준비하자
“자, 우리도 울타리 다시 세우자.”
황 서방이 나서 울타리를 다시 세우고 연장통에서 면도칼을 찾아와 그물에 직사각형의 구멍을 칸칸이 뚫어 마감을 했다.
※ 이 글은 고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