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문서없는 노예가 되어(3)
어느 토요일 밤, 미리 연산동으로 온 장모 순란씨가 영순씨를 따라 농장으로 와서
“이서방, 고생 많제? 나는 우리 영순이가 이래 잘 살 줄을 몰랐네!”
감탄을 하는지라
“잘 살다니요? 남의 땅에 심심풀이로 농사 조금 짓는 건데 말입니다.”
“그래도 이렇게 넓고 시원한 곳에 이만한 별장을 짓고 사는 사람이 어데 흔하나?”
“예에?”
이야기가 더 나가다간 ‘영순이 너거 아부지가 살아서 여기에 같이 와봤으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이야기가 나올까 싶어 입을 다물었다.
이미 한 뼘이나 자라 지천으로 깔린 쑥을 한 줌 뜯어 솜씨 좋은 영순씨가 미리 사온 도다리를 넣고 당시 한창 붐을 타던 유명한 <도다리쑥국>을 끓여 셋이 저녁을 먹고 난 순란씨가 커피를 마시다가
“우리 큰 딸은 잊어버렸는데 망내이 성아는 우째 그래 안 풀리는지...”
한숨을 쉬는지라
“와? 요새도 위태위태한가?”
“위태위태한 정도가 아니라 입술이 바짝 타는 모양이더라. 전화목소리를 들으면 금방 숨이 넘어갈 것 같아서 저러다가 아이들 밥이나 제대로 먹이는지 모르겠더라.”
“큰일이네.”
“그 뿐이 아니다. 갑린이도 통 일거리가 없는 모양이더라. 우짜다가 일거리가 생겨 밤잠 안자고 일하면 물건 값이 잠겨버리고...”
“우짜겠노? 우리 집 아들이 그래서.”
“그래서 말이다...”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쉬는 장모를 보며
“다음 일요일 다들 불러서 삼겹살이나 한 번 굽지요. 어차피 농장은 구경시켜야 할 테니까요.”
“그래. 그래 해주면 고맙지.”
하고 잠자리에 드는데
“히야, 장가간 지 40년이 다 되어 우리 장모님하고 한방에 자보네.”
“그러게. 방이 하나뿐이니 어쩔 거야.”
모녀가 나란히 창고 안에 일을 보고 오는 동안 열찬씨는 이슬이 축축한 밭둑을 한참이나 걸어 어둑한 거름더미에 소변을 보고 돌아왔다.
다음 토요일 밤이었다.
“내일 장모님이랑 처가식구 안 오는가?”
짐을 내리면서 삼겹살을 굽기로 했으면 고기는 물론 곁들일 야채와 술과 음료수를 사와야 할 텐데 간단하게 열찬씨 밑반찬과 쑥국을 끓일 도다리 한 마리뿐인 것을 보고 묻자
“황서방이 일이 바빠서 1주일 늦추기로 했어.”
“그래. 그럼 우리 둘이 낮에 앞산에 고사리나 뜯으러 갈까?”
“왠 고사리?”
고사리라면 자다 일어나는 영순씨가 반색을 하는데
“요즘 날마다 저 앞 물 억새 숲에 고사리를 뜯으러 오는 사람이 대여섯 팀은 돼. 어떤 때는 주차를 함부로 해서 닭 모이 싣고 오는 차량이 빵빵거리고 난리야.”
“그래 많이들 뜯던가?”
“웬 걸? 한 줌 뜯는 사람도 있지만 빈손으로 가는 사람도 많아 그런데 신기한 건 갈 숲에서 나는 고사리라 그런지 키가 크고 통통한 게 한 5,60개만 뜯어도 한번 삶겠더구먼.”
“히야!”
하고 낮에 열찬씨가 뜯어놓은 쑥을 넣고 도다리쑥국을 끓여 저녁을 먹는데 영순씨의 전화가 울리더니
“여보세요.”
하는 순간 금방 미간이 찌푸려지며 예, 예, 예를 반복하다 전화를 끊고 한숨을 푹 쉬는데
“와? 누구 전환데?”
“밭주인 윤여사.”
“그래서?”
“내일 매실 밭에 농약을 제초제를 친다는구먼.”
“그래. 오늘 보일러 집 담벽에 고라니가 자주 출몰하는 곳에 제초제를 치러 와서 얼마 치지도 못 하고 싸움만 하고 가던데.”
“그런데 한 시간 넘게 농약을 치는 동안 당신은 멀찍이서 쳐다보기만 했다면서?”
“그럼. 남 농약 치는데 내가 뭘?”
“아니, 땅주인이 땀을 뻘뻘 흘리며 농약을 치는데 남의 땅에 농사짓는 사람이 쳐다보지도 않으면 우짠단 말이고?”
“당신 그게 무슨 소리고?”
“내 말이 아니고 윤여사 말이야.”
“그래?”
“그러니까 당신이 알아서 조금 도와주기도 했어야지.”
“뭐이라?”
한참이나 고개를 갸웃거리던 열찬씨가
“첫째 도와달라는 이야기도 않았지만 내가 끼어들 소지가 없었어.”
“왜?”
“점심 먹고 얼마 안 있어 그들 부부가 도착했는데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하자말자 그 이선생이란 작자가 방에 들어가 벌렁 드러누워 일어날 생각을 않는데 윤여사가 분무기에 물을 받아 약을 제조하고 여보, 여보 아무리 불러도 도무지 일어날 생각을 안 하고 죽은 척 잠만 자자 괜히 나를 흘낏흘낏 쳐다보면서...”
“그래 무어라 했는데?”
“우리 저이는 부잣집에서 귀하게 자라 생선도 남이 발라주는 것만 먹어서 지금도 자기가 발라준다면서 사람이 귀골이라 머리도 좋고 친절하고 인물도 좋지만 도무지 힘을 쓰지 못하는 것이 탈이라고 하더군.”
“그래서?”
“아, 그러시냐고 하고 하던 작업을 계속했지.”
“아이구, 이 눈치도 없는 사람아.”
“눈치가 없다니?”
“그게 자기네 농약 치는 일을 좀 도와달라는 말 아니야?”
“무슨 소리? 내가 어디 그 사람들 머슴인가?”
“옛날부터 남의 땅 부치면 농사일 돕는 것은 관습이라면서?”
“히야, 당신 그 문자는 어디서 배웠어?”
“어디긴? 윤 여사지.”
“지금이 옛날 농경사회도 아니고, 내가 이 땅 소작해서 먹고 사는 것도 아니고 또...”
“또?”
“내가 이 사장보다 나이도 열 살 가까이 많고 공무원신분으로 봐서도 몸이 귀하다면 내가 더 귀하지.”
직원시절 감사원감사를 받다가 무슨 일이 잘 못되어 전체 조직을 살리기 위해 혼자 사표를 내고 희생양이 되었다고 들었으니 아무리 높아도 6급 이하일 텐데 무려 서기관 국장에 부이사관으로 퇴직한 자신에게 그런 말도 안 되는 기대를 한다고 생각하니 화가 불끈 치미는데
“아이고, 이 양반아. 당신이 지금도 서기관이고 국장인줄 착각하나? 당신은 지금 단지 남의 땅 붙이는 소작농에 불과해!”
“무슨 소리? 우리가 처음 만나던 날 미리 땅세 삼아 한 20십만 원 돈을 받으라니까 우리 같이 좋은 사이에 돈은 무슨 돈이냐고 자기들이 사양했잖아?”
“그렇지. 그런데 그 사람들이 돈이 아쉬워 우리에게 땅을 주었겠어? 땅을 빌려주면 당연히 농사일을 거들 줄 알았겠지.”
“허허, 참 이게 현대판 농노(農奴)제네. 중세의 봉건지주들이 농노들의 생사여탈을 장악하고 심지어 시집가는 신부의 초야권까지 가졌다더니 우리 부부가 바로 농노들이 되었네.”
“무슨 소리?”
“중국에서도 전호(佃戶)라고 해서 노예나 다름없었고 우리나라에도 나처럼 지주의 집 안에서 거주하며 농사를 돕는 노예를 행랑살이나 협호(夾戶)라 했고 당신처럼 밖에서 거주하면 외거노비라고 했지. 왜 우리 하동악양면의 최참판댁에서 보았잖아?”
“아이구, 아는 게 많아 먹고 싶은 것도 많겠다. 그러니까 당신이 행랑아범처럼 주인집 일을 도와줘야 하는 거지.”
“...”
어이가 없이 숟가락을 놓고 소주병을 찾아와 한 잔 마신 열찬씨가
“그런데 말이야, 그 사람들 제초제 치는데 내가 끼어들 여지가 아예 없었어.”
“왜?”
“일어나라, 조금만 더 쉬고를 반복하며 대치하다 오후 세 시경에 일어난 이선생이 분무기를 지는데 얼마나 힘이 없는지 윤여사가 잡아주어도 비실비실하는 거야. 더 웃기는 건 보일러 집 울타리를 따라 제초제를 살포하는데 ‘여보, 여기 치세요. 여보, 저기는 빼놓으면 어떻게 해요?’ 윤여사가 자국자국 따라다니며 잔소리를 하는 거야.”
“그래서?”
“안 그래도 입이 튀어나온 이 선생이 한참이나 묵묵히 농약을 치다가 문득 윤여사를 빤히 쳐다보는데 ‘아이고, 답답해랴. 명색 남자가 어째 저래 힘이 없노? 내가 미끈한 인물하나만 보고 시집을 간 게 바보지 운운 신세타령을 하는데 갑자기...”
“갑자기?”
“이 선생이 ‘씨팔년아!’ 대갈일성 고함을 지르더니 분무기를 벗어던지고 방에 들어가 버렸어.”
“그래서?”
“윤 여사가 약통을 한 구석에 치우고 방에 들어갔는데 나는 이제 저 집에 큰일 났다 싶었는데 한 20분 지나자 둘이 하하호호 웃으면서 나오는 거야.”
“그래 맞아. 윤 여사가 젊은 남편에게 오로지 일편단심 해바라기래. 그러고도 남을 거야. 호영이할매말을 들으면.”
“그러고는 무슨 일 없었나?”
“아, 그 사람이 사이좋게 걸어 나가면서 ‘이선생님 내일도 밭에 계실 거냐고 묻더군. 그래서 그렇다고 했지.”
“아, 알겠다.”
“알기는 무얼? 어데 수캐가 부랄을 앓나?”
“그게 아니라 내일 그 집 아들 대호, 그러니까 이대호가 와서 매실밭에 제초제를 치는데 같이 좀 도와달라는 말이지.”
“정 그렇다면 잠깐잠깐 도와주지, 뭐. 그런데 아이이름이 이대호라?”
“응, 윤여사가 시집올 때 열네 살이었는데 지금은 서른둘이래. 야구를 안 할 뿐이지 덩치도 4번 타자 이대호만 하고 심성도 착하답니다.”
“그런가?”
이튿날 열찬씨가 일어나 컴퓨터 앞에 앉은 일출 즈음에
“여보, 오늘은 하루 글 안 쓰고 나하고 고사리 뜯으러 가면 안 되나요?”
하도 간곡한 눈빛이라 따라 나섰는데
“아이쿠야!”
벌써 대문 앞에 두 대의 승용차가 서 있고 부부인 듯 세 커플이 갈숲을 뒤지는데 얼마나 사람이 많이 다녔는지 숲 사이로 길이 반들반들 했다.
“히야! 이거 대박인데!”
길이 3,40센티에 굵기가 아이들 새끼손가락만큼 한 통통한 고사리를 하나 꺾어들고
“야, 내가 평소에 꿈꾸던 고사리 밭이야.”
신이 나서 덤벼댔다. 한 시간쯤 지나서
“당신은 소리 소문도 없이 잘도 뜯네.”
“그야 농민의 아들과 군인의 딸이 차이가 날 수밖에.”
하고 세어보니 영순씨가 열여덟, 열찬씨가 마흔 아홉 개였다. 하도 실해서 그 정도며 한 솥을 삶아 채반하나에 널고도 남을 것 같았다. 영순씨가 세탁기를 돌리며 밥을 하는 동안 열찬씨는 고추밭을 반듯하게 골을 타기 위해 여기저기 쌓아둔 돌을 치우고 모서리부분의 각을 세웠다. 둘이 늦은 아침을 먹고 커피를 마시는데
“이 선생님, 안녕하세요?”
윤 여사일행이 들이닥쳐 시계를 보니 열시가 넘었다.
“어이, 대호씨. 롯데의 한해농사는 자네에게 달렸어.”
열찬씨가 덩치가 과연 야구선수 이대호만 한 대호씨와 악수를 하는데
“잠시 앉으시지요.”
영순씨가 세 사람의 커피를 타는데 윤여사는 벌써부터 분무기에 제초제를 타고 있었다. 600평이 넘는 매실 밭은 가로가 40, 세로는 거의 7,80미터나 되어 아득히 멀기만 한데 첫 번째 한말들이를 대호씨가 시원시원하게 살포하고 다시 분무기를 채우자 영순씨의 눈짓에 따라 열찬씨가 분무기를 메는데
“아이구야!”
작대기를 짚고 허리를 펴는데 무릎이 휘청했다.
“나도 인자 완전히 한물갔네. 옛날엔 80킬로 쌀가마니고 졌는데...”
서너 발짝 비틀거리다 겨우 중심을 잡고 살포를 시작하는데
“저 양반이 저래 힘들어하는 건 처음보네. 하긴 환갑진갑 다 지난지가 몇 해나 되는데.”
영순씨가 안타까워했다. 한 30분 부지런히 작업을 하는데 어깨도 빠질 것 같고 숨도 가빠 정신이 혼미하더니 마침내 다리가 후들후들 했다. 힘에 부치기도 하지만 독한 농약냄새가 코를 찔렀고 무엇보다 마스크를 써 숨쉬기가 힘들었다. 한 2/3쯤 치고 분무기를 내려놓으며
“아이구, 힘들어라. 나머지는 우리 이 선생이 좀 쳤으면.”
하는 순간
“안 됩니다. 우리 그이는 귀하게 커서 이 땡볕에 농약 통을 못 매지요.”
“...?”
어제는 잘만 매던데 하고 말하려다 영순씨와 눈이 마주쳐
“대호씨는?”
“어데 볼일 보러 갔는가, 아니면 친구랑 문자하는가?”
윤 여사가 농막 쪽으로 쳐다봐도 대호씨도 이선생도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한 5분 숨을 돌린 열찬씨가 다시 통을 매고 나머지를 치고 나서
“여보, 냉장고에 막걸리 있제?”
그늘에 앉아 숨을 고르는데 이 선생이 나오더니
“가선생님은 아직 정정하시네요. 부럽습니다.”
남의 염장을 지르더니
“오늘 밭에 사람도 많고 매화꽃도 만개하고 저 건너 달음산도 우뚝하고 참으로 좋은 봄날입니다.”
마치 시흥(詩興)이 도도한 옛 선비와 같은데
“이 선생도 분무기 함 져보지. 계속 달음산 우뚝한 봄날인지?”
“아이구, 저는 약골이라 한말들이 약통 지면 죽습니다.”
하고는 다시 방에 들어가 버렸다.
대호씨가 금방 한 통을 치고 다시 약통에 약을 채운 윤여사와 영순씨가 열찬씨를 흘낏 바라보는데
“아이구, 아직 숨도 안 돌아왔다.”
열찬씨가 비실비실 뒤로 물러나는데
“보소!”
영순씨가 따라오며 간곡하게 불렀다.
“기왕 하루 봉사하는 것 기분 좋게 하이소.”
“내가 어데 힘 나두고 안 하나? 숨이 가빠 못 하지.”
“그래도 한 번 만 더...”
“나 보다 열 살은 더 젊은 주인 놈이 안지는 약통을 내가 와 지는데?”
“쉬, 윤 여사 듣겠다.”
“아니 들으라고 하는 소리 아이가?”
버럭 역정을 내자
“보소...”
영순씨의 얼굴이 금방 울 것만 같아
“에이, 앓느니 죽지.”
다시 약통을 매던 열찬씨가 약통을 벗으며
“안 되겠다. 약을 좀 따라내고 한 2/3쯤만 지자.”
하고 다시 일어나 겨우겨우 살포를 마치고 돌아오는데
“점심을 우짜지?”
영순씨가 휴대폰의 시간을 보는데 땡, 양쪽의 다리오에서 동시에 오후 한 시의 시보를 울리고
“전남 진도 맹골만 세월호 참사의 현장에서는 오늘도 가족들의 애끓는...”
뉴스가 터져 나왔다.
“우리는 샌드위치 사왔는데...”
윤 여사가 말을 흐리는데
“이 중노동에 국물도 없는 샌드위치가 점심이 되나?”
영순씨가 혀를 차자
“뭐 그럼 감자탕을 먹으러 가든지.”
“아, 알았어요. 뭍인 김에 내가 밥을 좀 더 안 앉히지요. 머구쌈이랑 꽁치찌게랑 먹지요.”
눈치 빠른 영순씨가 ‘감자탕을 먹으러 가든지’의 말뜻을 간파하고 시원시원하게 말하자
“그라면 아들아, 우리는 밥하는 사이에 한 통만 더 치자.”
운 여사가 쾌재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