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문서없는 노예가 되어(2)
개간사업이 순조롭게 이루어지면서 엉뚱한데 문제가 생겼다. 한창 땅을 일굴 때는 모르는데 일을 마치고 세수를 할 때면 손가락마디가 욱신거리는 거였는데 저녁을 먹고 텔레비전으로 프로야구를 보고 저녁 10시쯤 잠자리에 들면 자정을 전후로 목이 깔깔하면서 잠이 깨는데 그건 전기보일러 난방이 너무 세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또 저녁반주로 소주 한 병을 마신 게 깨느라고 그런 것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당뇨가 있어서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잠시 창문을 열어 환기시키면서 농막 뒤 오지독에 오줌을 누고 와서 다시 불을 끄고 자리에 누우면 어둠속에 은밀히 그물을 치거나 벌레를 잡는 거미처럼 스멀스멀 찾아오는 손님이 하나 있는데 그게 바로 손가락마디가 아리면서 쑤시는 통증이었다. 엄지를 뺀 4 손가락의 밑에 마디가 가장 심하고 위에 마디도 아파서 손가락을 꺾을 수가 없는데 왼쪽 보다는 오른 쪽이 심했다. 원인은 간단했다. 밭에 돌을 팔 때 삽으로 흙을 파다 좁고 깁게 박히거나 크고 넓게 박힌 돌이 마주치면 곡괭이로 옆구리를 파들어 가지만 뿌리가 너무 깊으면 작은 틈을 만들어 삽이나 곡괭이의 끝을 넣고 지렛대처럼 움직여보지만 꿈쩍도 않을 때가 많았다. 날카로운 호미 끝으로 다시 밑을 파기도 하지만 그 모든 과정에서 급하면 저도 모르게 가는 것이 바로 손이었다. 새우깡 같은 스낵으로 군것질을 할 때 아이들이 하는 노래 <손이 가요, 손이 가>처럼 인간은 급하면 저절로 손이 가는 모양으로 손바닥이 나오게 뒤집어 중지를 밀어 넣고 안간힘을 써 조그만 공간을 만들고 삽날이 힘을 못 쓰는 돌멩이를 손으로 움직여 뽑다보니 손가락 마디에 무리가 가는 모양이었다.
한 이틀 비가 와서 작업을 쉬고 부산으로 돌아가 산우회사무실에서 훌라를 치고 노니 한결 나았지만 날씨가 개어 오리로 돌아와 한 나절 쯤 작업하니 다시 아리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보다 못한 영순씨가 약방에서 반창고를 사와 마디마디 붙여주며
“당신이 뭐 배구선순가? 명색 글을 쓴다는 사람이 이렇게 노동자처럼 손가락이 다 망가진 사람은 조선천지에 당신 혼자뿐일 거야.”
하며 혀를 끌끌 찼다. 그래도 한결 통증이 덜한 지라 오리 농장으로 가던 버스정류소 앞의 약국에서 반창고 두 개를 더 사서 갔는데 웬 걸 이번 것은 붙인지 얼마 되지 않아 절로 돌 말리면서 들고 일어나는 것이었다. 영순씨가 사준 것과 어떻게 다를까, 사람이 평소에 야무지지 못 하다 보니 한갓 반창고 하나를 사는데도 차이가 나는 걸까, 유심히 살펴보니 영순씨가 산 반창고는 가운데 부분의 둥근 종이심이 붉은색이고 열찬씨가 산 것은 파란색이었다. 다음엔 약국에 가서
“빨간 반창고하나 주세요.”
하니 약사가
“빨간 반창고는 없어요. 모두 흰색이지.”
해서 설명을 하자
“요즘은 심이 붉은 반창고는 잘 안 나오는데요. 값도 배나 비싸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여기저기 약방을 돌며 서너 통을 더 사다놓고 저녁마다 새 반창고를 붙였다. 오리에 들어온 지 벌써 한 달 가까이 되어 이제 출입문에서 농막까지 50미터도 더 되는 거리의 길을 따라 폭 11미터의 반듯한 밭이 완성 되었다. 들어오는 입구 쪽에 비닐을 씌우고 감자 다섯 골을 심고 농막 앞에 두 골은 상추와 쑥갓에 민들레와 정구지에 좀 이르다 싶지만 열무도 씨를 넣었다. 열찬씨가 애지중지하는 장촌의 덕찬씨가 심어준 곰보배추가 얼마나 자랐나 싶어 돌아보던 열찬씨가
“?”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고라니가 들어와서 뜯어 먹었으면 뿌리라도 있을 텐데 흔적조차 없는 것이었다. 마침 침구소독을 한다고 이불과 담요를 빨랫줄에 걸고 볕바른 지붕에 베개를 올려놓는 영순씨에게
“여기 혹시 문디배추 못 봤나?”
“문디배추라? 거기 그럼 잡초가 아니고 문디배추란 말인가?”
“우쨌는데?”
“잡촌 줄 알고 뽑아버렸지.”
“아이구, 일생에 도움이 안 되네. 우리 장촌누님이 큰맘 먹고 캐온 건데.”
하고 어디 버렸는지 물어 쓰레기장을 뒤지니 이미 다시 심을 수도 없도록 토막토막 잘려 있었다. 모처럼 더운밥을 하고 꽁치 통조림을 지져 함께 온 미혜씨와 밖의 테이블에 둘러 앉아 점심을 먹는데
“야, 이거 소풍 온 기분이네. 무려 50년 만에.”
미혜씨가 기분이 좋은지
“옳지, 갈 때 우리 갑장 제부 회 좀 먹일까? 칠암 꺼먹동네에 가서 아나고 말이야.”
하고 신명을 내더니 오후에는 둘이 쑥을 뜯는다고 <봄 처녀 제 오시네>를 흥얼거리더니
“엄마야!”
“어이쿠야!”
다급한 비명을 질러 바라보니 저 만큼 고라니 새끼 한 마리가 풀쩍풀쩍 뛰어 검정 그물의 터진 틈으로 산으로 내뺐다. 보일러 공사를 한다고 해서 보일러김씨로 불리는 아래쪽 여러 종류의 오리와 닭을 키우는 집의 담 밑 으쓱한 쑥대밭에 은신해서 살아온 모양이었다.
“보소. 당신 땅만 파서 될 것이 아니라 그물부터 쳐야겠네.”
구서동 물만골에서 고라니에게 무, 배추와 고구마, 심지어 고추모종까지 많은 피해를 본 영순씨가 농막앞의 밭을 꼼꼼히 살피더니
“봐, 짐승이 안 먹는 상추는 돋았는데 쑥갓하고 열무는 싹이 안 튼 것이 아니라 올라오는 족족 고라니가 뜯어 먹었네.”
하며 알루미늄 고춧대와 파란 그물을 찾아 이종자매가 길에 펼치더니
“당신도 그만 하고 망치 찾아 이리 오소. 말뚝 박는 데는 명색 사내꼬랑대기가 있어야지. 그게 어데 아녀자가 할 일인가?”
하며 불렀다. 무언가 생각이 떠오르거나 할일이 생기면 당장 하자고 조르고 그걸 열찬씨가 반대해 하지 못 하면 무슨 전쟁이 쳐들어와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불같이 화를 내며 못 견디는 아내의 성격을 안 열찬씨가 삽을 놓고 망치를 찾아들고 셋이서 뚝딱뚝딱 부지런히 그물을 치는데
“히야, 그 신기하네. 금방 녹색 장벽이 생기네.”
모처럼의 노동에 두 볼이 발갛게 상기된 미혜씨가
“어데서 이래 긴 그물이 다 나오노? 영순이 너거 부부는 참 손발도 잘 맞는다니까? 무어든 깊숙이 찡가박고 또 둘이서 슬슬 눈을 맞추어 꺼대다 쓰고...”
“와? 언니도 형부하고 그래 좀 살지?”
“텄다. 우리 그 양반은 너무 양반이고 나도 자존심이 강해 통 대화가 없다.”
“계하는 날에는 만이아부지! 만이아부지! 입에 물린 혀처럼 친절하기만 하더니.”
“거기 다 전시용아이가? 우리 부부는 각자 지 팔뚝 지 흔들고 산다.”
“아니, 형부가 얼마나 경우 바르고 친절한 사람인데?”
“그 기 문제란 말이다. 먹고 살만 하제, 따로 바쁜 일 없제 하니까 각자가 제 친한 사람 찾아 같이 시간 보내고 밥 묵고 하는 기 하루 일관데 아침에 나갈 때, 저녁에 들어올 때 서로 예의를 다 해 극진하게 인사는 하지만 그게 끝이란 말이지.”
“그러면 되지. 남자가 차분하고 의젓하고 야무딱지고.”
“무슨 소리? 남자는 이 서방처럼 술도 한 잔씩 하고 가끔 실수도 하고 어떤 때는 우리 마누라가 최고라고 실없는 소리도 한 번씩 하고, 그러니까 우리 이 서방같은 사람이 오히려 편하다.”
“그런가?”
“대화가 있잖아? 또 실수가 있어 같이 웃을 일도 있고 비집고 들어갈 공간도 있고.”
하면서 일을 마치고 돌아갈 시간이 되었는데
“제부도 같이 갑시다. 칠암서 아나고 먹게.”
“아니요. 한 번 따라나서면 부산에 가서 하루나 이틀 자고 돌아오는 길이 얼마나 멀고 힘든지. 그만 여기서 슬비애미 끓여놓은 육개장에 밥이나 말아먹고 잘랍니다.”
하는데
“갑시다. 당신 아나고회 좋아하잖아?”
“회는 좋아하지만 혼자 돌아오는 일이 기가 차서.”
“안 되면 내가 도로 여기까지 데려다 줄께.”
해서 꺼먹동네라는 횟집에서 아나고회 1관을 시켰다. 보통 사람 셋이면 그것만 해도 먹고 남는다는데
“아지매 여게 잡어회도 한 사라!”
하고 식탁위에 지갑이 든 손가방을 탕, 놓으며
“제부, 돈 걱정 하지 말고 실컷 잡수소. 내일부터 또 돌멩이 잡고 씨름하려면 묵어야 힘을 쓰지.”
하고 셋이 부지런히 회를 먹다
“영순아, 니는 우째 그래 양이 적노? 좀 더 먹어라.”
“아이다. 언니, 나는 배부르다. 언니 많이 잡수소.”
“아이다. 우리 가서방 술안주 해야제.”
하며 다시 술잔을 채우고 회를 한 쌈 싸서 입에 까지 넣어주며
“내 영순이 니 어릴 때는 상대도 안 했는데 늙어가며 이래 친구가 될 줄 몰랐다. 가서방도 그렇고. 우리 아부지 형제가 6남매라 4촌간이 무려 스물아홉 명인데 늙어가면서 친구가 되는 사람이 영순이 니하고 이 서방밖에 없으니 말이야.”
“사람이 별 사람이 있나? 그냥 맘 붙이고 지내면 되지.”
“아이다. 아무리 4촌이라도 서로 나이도 비슷하고 묵고 사는 형편도 비슷하고 취미도 비슷해야 친구가 되지 묵고살기 바쁘거나 성질머리 더럽거나 심술궂으면 4촌도 넘보다 못 하다.”
하며
“자, 이 서방!”
또 술을 부어주고 쌈을 싸 열찬씨에게 건네주어 얼른 받아먹은 열찬씨가 상추에다 회를 넣어 맵시 좋게 쌈을 하나 싸 건네주자
“아이고 시뻐라! 사내가 우째 그래 손이 작소? 새로 크게 하나 싸 주소.”
해서 주먹밥만 한 걸 하나 싸서 주자
“아이구 고맙어라!”
하며 우물거리며 먹는데
“우리 처형은 대범한 성질 하고 저 잘 먹는 식성 때문에 병울 이긴 거야. 처형 발병한 지 5년이 다 됐제? 내가 보기에 이미 완치가 된 것 같아.”
“뭐, 인자 4년 좀 넘었는데 의사도 그렇게 말 하고 나도 그래 느끼는데 자궁경부암 때문에 죽지는 않을 것 같아.”
“그런 다행이 없네.”
“그래도 내가 처음 암 진단을 받고 느낀 건데 우리 엄마가 몸이 뚱뚱하고 당뇨가 있어 70을 못 살고 갔는데 내가 생긴 거나 체질이나 성질까지 꼭 우리 엄마를 닮은 거야. 그래서 내도 아마 70을 넘기기 어렵지 않나 생각은 했는데 그래도 이번 고비는 넘어가는 거야.”
“그 심각하기는? 내가 보기에 처형은 70이 아니라 80도 더 살겠네.”
하고 한참 시간이 흐르다
“참, 처형 그 자궁경부암이 사용자부주의 때문에 생긴다는 거 아나?”
“사용자 부주의라니? 내가 뭐 목욕을 안 하나, 속옷을 안 갈아입나?”
“아니지. 거기에 사용자는 처형이 아니라 예서방 형님이지. 처형은 그냥 관리자고.”
“하긴. 사용자부주의가 아니고 직무유기야. 통 사용을 않으려고 했으니 말이야.”
하고 웃으니 영순씨도 따라서 웃었다. 처음 자궁경부암진단이 나고 무슨 치룐가를 시작하면서 의사가 부부를 불러
“자궁경부의 치료를 위해서는 자궁이 개방된 상태여야 하는데 그 방법은 첫째로 치료가 시작되면 부부가 매일 관계를 하고 방법이 있는데 남편 분은 가능하시겠습니까?”
하고 묻자
“아, 아니요. 자신 없습니다.”
하고 손을 내젓고 무슨 기계를 사서 인공적으로 열게 했다는 것이었다.
“형부도 이상하제? 그게 뭐 힘든 일도 아니고 재미있는 일이기도 하고 돈도 절약되는 일석이조가 되는 일인데.”
이야기를 들은 영순씨가 묻자 미혜씨는
“부부간의 이야기를 남이 우째 다 알겠노? 언젠가 죽기 전에 니 한테 다 이야기 해줄 게.”
했다는 것이었다.
마침내 회 접시가 비자 매운탕에 밥 한 공기씩을 받아 저녁을 먹는데 배가 부르다며 남긴 영순씨의 공기밥도 열찬씨와 미혜씨가 나누어 기어이 매운탕까지 바닥을 보고서야 숟가락을 놓았다. 자동차가 도로로 나오자
“가만! 여기 내려주면 내 180번 타고 갈 게.”
“아니야. 어두운 산길에 내가 안심이 안 되서 못 보낸다. 거기는 설마 행인이 있겠나 싶어 차들로 안심하고 씽씽 달리고.”
영순씨가 도로 오리 쪽으로 가려는데
“가서방, 그만 연산동 집에 가서 깨끗이 목욕하고 영순이 하고 같이 자소!”
미혜씨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언니는 무슨 역정이고? 다 늙어서 새삼 목욕하고 동침하면 무슨 대수가 있냐고?”
“시끄럽다!”
“...”
“언니가 하라 카면 마 그래 해라. 너거는 아직 건강한 부분데 내 꼴이 되기 전에.”
“언니가 와?”
“남 보기는 잘 살고 잘 어울리는 부분데 사실은 대화도 없고 늘 외로운 부부.”
“...”
※ 이 글은 고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