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서상균]

22. 갈수록 태산 오리농장(7)

그는 함양인가 산청인가 지리산 아래의 군청소재지에서 세무서장의 아들이자 3대독자로 너무나 귀하게 자라 세상의 제일가는 가치가 돈을 잘 벌면서도 남들이 설설 기는 세무서장이며 세무서장의 아들인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신분임을 자각하고 스스로 세무공무원의 길을 택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야말로 손에 물 한 방울도 묻히지 않을 정도로 귀하게 자라고 밥 한 끼 먹는 것도 방과 후 집에 도착해 세수를 하고 식탁에 앉을 시간에 맞추어 밥과 국을 푸고 갈치나 고등어 같은 생선도 방금 구워 살점도 부드럽고 향도 제일 좋게 할머니와 어머니와 가정부 셋이 일천전심으로 신경을 쓰는 귀공자로 자라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명문의 규수와 결혼해 아들까지 하나 두었으나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현대판 귀공자와 그 가족들의 과잉보호에 길들여지지 못한 아내는 <내가 조선시대에 돌아가서 사는지 모르겠다. 이건 내가 결혼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고 사극드라마에 빠진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며 이혼을 요구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을 나가 버린 것이었다.

그렇게 십여 년을 지나 마침내 알맞은 혼처가 나타난 것인데 그건 우선 자신보다 나이가 열 살 가까이 많아 이해심이 깊고 혼자 살아오면서 체득한 끈질긴 생활력으로 부동산을 서너 건이나 가진 재력에 세련된 화술, 당찬 행동거지가 희대의 귀공자라기보다는 마마보이로 자란 그에게 적합했고 특히 처녀라는 점이 그의 하늘을 찌를 듯 한 자존심을 채우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윤 여사 역시 모처럼 혼담이 들어온 데다 상대의 집안이 면장을 지낸 7공주 집 딸만 일곱인 자신의 집안보다 빠질 것이 없는 세무서장의 집안인데다 무엇보다도 재력이 든든한데다 뭐 부동산을 투기한다기보다는 영리하게 재테크한다는 입장에서 늘 두려움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그 무서운 세무공무원이라는 점이 더 한층 구미를 당기게 했고 정작 맞선을 보자 자기보다도 나이도 훨씬 어린데다 아직도 앳된 표정이 남은 너무나 깔끔하게 생긴 귀공자인데다 목소리마저도 차분하고 나지막한 게 그야말로 40이 훨씬 넘은 노처녀의 마음을 흔들어 열네 살의 전처자식이 있어도 흔쾌히 결혼을 승낙한 것이었다.

아무리 성격이 좀 까다롭다고는 해도 자기 언니와 영순씨가 둘도 없이 가까운 이웃인데다 남편의 상사로서 지금도 만남이 이어지는 강모세무서장과 열찬씨가 같은 조기축구회의 회원으로 수십 년을 지내온 점을 생각해 설마 그렇게 심각하게, 말하자면 예상치도 못 했던 커다란 건물과 열찬씨를 동시에 내치는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는 마음으로 오리 농장에 도착해

“허허, 참!”

아직 제대로 밭을 일구지도 못 하고 무엇 하나 제대로 심지도 못한 허허벌판에 번듯하게 자리 잡은 건물을 바라보며 장탄식을 하고나서

(그래도 집이라고 있으니 좋기는 좋군.)

문을 열고 메고 온 배낭을 장판까지 잘 놓인 방바닥에 놓고 나와 부지런히 땅을 일구는데

“이 선생님!”

하얀 승용차하나가 멎더니 검정 라이번을 낀 윤 여사가 나타나더니

“대단하십니다. 우리농장이 뭐 팬션 촌도 아니고.”

하다

“저 위에 대학원까지 나와 블루베리 재배하는 젊은 김사장 집보다도 더 좋겠네!”

하며 두개의 문을 연속으로 열어보며

“내부시설도 보통이 아니네. 장판도 놓이고 형광등도 다 달리고 창틀도 고급자재를 썼네.”

어제 불같이 화를 내던 일과 딴판으로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로 생글생글 웃더니

“시에서 요직에 계셨다면서 기장군청에 그만한 힘이 없지는 않을 거고.”

빙긋 웃더니

“사실 이 근방에 있는 모든 농사용 건물들이 하나도 제대로 허가를 받지 못해 심심하면 군청의 단속요원들의 밥이 되고 있지요. 해마다 벌금은 벌금대로 물고 단속요원들에게는 또 떡이 되게 빌고...”

“그래요? 절차를 밟아 신고를 하면 될 텐데요. 아무리 건축법상 허가조건이 맞지 않아도 땅이 있어 농사를 짓는다면 당연히 농사용 창고정도는 있어야 되니까요. 농사를 지으면 비료나 농기구가 있고 이걸 비에 젖지 않게 넣어두는 창고건물이 있어야 한다는 이치는 법을 떠나 세상사는 이치인 것이니까요.”

“그게 어디 그런가요. 서민들 앞에 법은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로 족쇄가 되지만 공무원들에겐 무기가 되니까요.”

“설마?”

“이제 선생님이 오시면서 이 산비탈의 무허가 농막건물에 혁명이 오겠네. 최초로 허가건물이 나올지도 모르겠네.”

“예. 저 앞의 도로가 도면에 나오는 공부상도로가 아닌 현황도로가 아니라 문제가 되겠지만 농기구나 비료를 창고에 넣어야한다는 이 불변의 이치도 어떻게든 참작이 되겠지요.”

“아하, 그렇군요. 속이 다 시원하네.”

하고 밭을 둘러본다며 아래쪽의 황무지와 위쪽의 매실 밭을 비잉 둘러 물탱크아래 자신들이 농기구와 분무기를 놓은 것도 세심히 체크하고 나서

“벌써 울타리 손보셨어요? 개구멍을 막았네.”

“예. 혹시 산짐승이 들어올까 봐 그물을 때웠지요.”

“아하, 그랬구나? 혹시 키 크고 귀 먹은 영감하나 하고 땅딸막한 노인하나가 뭐라고 않던가요?”

“예. 그 귀먹은 노인네가 뭐라고 잔뜩 악담을 하고 갔어요.”
“그렇겠지요. 그 개구멍이 그 노인데들이 자기들 밭에 질러가는 길이었거든요. 생면부지의 사람이 나타나 그 지름길을 막아 그 노인네들이 숨을 헐떡거리며 한참이나 돌아가야 하니.”

“그래요? 그러면 짐승은 못 다니고 사람은 다니는 문을 하나 내줄까요?”

“하하하, 그렇게나 친절하게.”

하고 무엇이 좋은지 연신 싱글벙글 웃더니

“이 선생님, 점심은 어떻게요?”

“김밥 사왔어요. 우리 아파트 앞에 고봉민김밥이 얼마나 맛있다고요.”

“예. 저도 샌드위치 하고 우유를 가져왔는데요.”

하고 차에서 커다란 봉지와 보온병을 들고 와 방안에 들어가며

“가선생님, 김밥 갖고 들어오세요.”

해서 김밥과 샌드위치에 집에서 가져온 김치와 소주까지 꺼내들고 먹기 시작하는데 삐리릭 전화벨이 울리지

“예. 지금 가선생님 하고 점심 먹고 있어요. 건물이 팬션 빰칠 정도로 예쁘고 편리해요. 덩달아 우리도 별장이 생겼어요.”

하고 생글생글 웃더니

“뭐 가선생님이 여자 꼬시는데 전문이라 창문 열어놓고 식사하라고요? 하하, 걱정도 팔자시네. 모처럼 시인이랑 소풍기분을 좀 내려는데.”

하며 라이번을 벗으려다 흉터가 보일까 봐 황급히 다시 쓰며

“역시 풍류가 있어. 소주도 다 가져오시고.”

하며 샌드위치 한쪽을 건네주며 자신도 김밥을 집어먹으며 잔이 비자 소주도 부어주며

“뭐, 내 생애 봄날은 간다라는 노래 가사가 다 있더라마는 오늘 참 멋진 하룹니다.”

“뭐, 내 생애 봄날까지 아니더라도 연분홍 저고리에 봄바람이 나오는 백설희의 봄날이 가는 것도 좋지요.”

“그럼요.”

하고 커피를 부어주면서

“이 좋은 봄날에 선생님, 매화꽃 구경을 가지 않으실래요?”

“매화라? 아니 여기에도 수 십 그루 만개했잖아요?”

“여기 말고 우리 일광 밭에는 양지쪽이 되어 비교할 바가 아닙니다. 경치도 좋고.”

“그럴까요?”

점심 먹은 자리를 치우자 나른하게 잠이 와서 넓은 방에 그대로 늘어져 낮잠이라도 자고 싶었지만 예의가 아니라서 다시 삽을 들고 나서는데

“쇠뿔도 단기에 빼라고 바로 출발하지요?”

윤여사의 말에 짐을 챙겨 차에 오르자 말자

“아니, 이건 불교음악아닌가요?”

열찬씨가 묻자

“예. 저는 혼자 드라이브를 할 때 주로 염불소리나 불교음악을 듣는데 그 중에서 목탁소리가 가장 좋지요.”

“아아, 목탁소리. 제 가슴 속의 욕심과 번뇌를 마지막 한 꺼풀까지 벗겨내어야 비로소 투명하게 영혼을 울리는 그 목탁소리!”

“아, 표현이 멋져요.”

하고 백미러로 열찬씨의 얼굴을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사실 저 한 때는 문학을 하려고 <토지>를 세 번이나 읽은 적이 있어요.”

“그 긴 박경리의 <토지>를 세 번이나! 나는 겨우 한번 읽는데 수년이 걸렸어요. 그나마 6.25이후 두 형제의 갈등이후는 흐지부지 읽지도 못 하고.”

“그러게 말입니다. 혼기에 찬 처녀가 딱히 챙겨줄 부모님도 다 돌아가시고 의지할 데도 없으니 마치 천애고아 서희와 같은 신세인데 저에게는 만주처럼 도피할 땅도 없고 길상이나 상현이처럼 얼쩡대는 사내도 하나 없고...”

“...”

자동차가 달음산등산로의 옥정사로 가는 길에서 급히 좌회전을 하더니 부산울산고속도로 언덕 아래로 펼쳐진 좁고 외진 골짜기의 엉성하게 포장된 시멘트 길을 한참이나 달려

“세상에 부산천지에 이런 곳이 다 있나?”

중얼거리는 열찬씨에게

“이런 외진 곳이라야 공짜 비슷하게 사서 나중에 목돈이 되지요.”

하며 웃더니

“여기서 부터 한 5분 걸어야 합니다.”

하고 차에서 내렸다.

[그림=서상균]

구불구불한 들길을 한참 걷다 이제 폐가가 된 을씨년스런 울타리를 돌아 찌질한 물구덩이를 건너 한참 만에 도착하자

“어때요? 무릉도원이 따로 없지요?”

“예. 그렇군요.”

하면서 둘러보니 비스듬한 산비탈에 7,8백 평은 됨직한 넓은 매실밭이 펼쳐진 아래도 대부분 묵정밭인 작은 골짜기 아래로 작은 마을이 하나 흩어져 있고 매실 밭 뒤로는 제법 가파른 산언덕인데 그 위에 고속도로가 있는지 꽤액! 경적을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언덕을 한번 둘러보세요. 쑥이나 온갖 나물도 많지만 머구가 엄청 많아요. 나른한 봄철의 입맛을 돋우고 활력을 찾아준다는데 우리 식구들은 특유의 신맛 때문에 잘 먹지를 않아요.”

해서 금방 한 아름 뜯어 나오는 열찬씨에게

“가선생님 같은 좋은 농부 오셨을 때 우리도 상추와 쑥갓이라도 좀 심고 열무 골도 좀 타놓을 까요?”

하며 간이화장실처럼 생긴 조그만 창고에서 삽과 괭이를 꺼내왔다.
“어디에 무얼 심을 지 표시만 해주세요.”

그 제서야 굳이 일광밭에 데려온 속셈을 깨닫고 쓴웃음이 나왔지만 짐짓 흔쾌한 표정을 지으며 열댓 평은 됨직한 입구쪽 밭을 돌아보는데

“상추, 쑥갓이야 몇 평 안 심어도 되지만 기왕이면 일꾼 있을 때 거름도 넣고 보드랍게 뒤졌으면 합니다.”

하는 바람에 매실밭 가운데 쌓아둔 가축부산물퇴비를 다섯 포대나 갖다 살포하고 부지런히 삽질을 하는데 자기도 따라나서는 윤여사의 삽질이 서툴기도 하지만 몹시 서두는 것 같아

“나오세요. 삽질도 제대로 안 하고 엉뚱하게 하면 흙을 다치게 한다고 밭이 운답니다.”

하고 한 30분이나 허덕거리며 삽질을 하고 고랑을 파 이랑을 만들어

“자, 이제 상추씨를 심읍시다.”

하고 호미로 얇은 골을 파고

“보통 파종은 씨앗의 두께 3배에서 다섯 배 흙을 덮도록 되어있지만 상추씨처럼 아주 작은 씨앗은 흙을 덮기보다는 손에 한 줌 쥐고 바람에 날리 듯 손가락사이로 슬슬 뿌리는 것이지요.”

“그럼 세상의 모든 씨앗 중에 상추씨가 제일 작다는 말인가요?”

“아니요. 시에 담배씨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보면 담배씨가 더 작은가 봐요.”

“어떤 신데요.”

“구연식시인이라고 우리 대학시절은사이자 다다이즘이라고 기성의 체제와 가치를 부정하고 파괴와 퇴폐와도 익숙한 당시의 첨단시인인데 그가 은퇴하고 8순이 넘어 시화 한 점을 팔아달라고 구청장을 찾아왔는데 제자인 제가 문화관광과장이니 꼼짝할 수가 있나요? 그래서 두 말 않고 사서 문화의 집에 걸어두었는데 그 내용에 <이쁜 아가씨 가슴을 담배씨 만큼 훔쳐본다.>는 구절이 있는데 문화의 집에 출입하는 할머니들 사이에 망측하다고 난리가 난 적이 있지요.”

하면서 파종이 끝나자

“옆의 열무골에는 식목일이 지난 4월 중순경에 종묘상에서 열무씨나 총각무우씨를 사다 뿌리세요. 그 때는 호미로 가볍게 흙을 덮어도 되지요.”

하며 손을 터는데

“가선생님, 여기 자주 오는 편도 아닌데 고라니나 짐승이 덤비지 않을까요?”

“글쎄. 상추는 고라니나 토끼가 먹지 않지만 쑥갓이나 열무는...”

하다 문득 이게 또 울타리를 쳐 다라는 말이구나 싶어

“지주대하고 그물은 있나요?”

저도 모르게 미간이 찌푸려지며 휴대폰의 시간을 보니 5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매실 밭 사이에서 버려진 고추지지대와 그물을 가져와 뚝딱거리며 울타리를 치고 사람이 출입할 문을 만들어 고리로 걸어주며 손을 탁탁 터니

“장하십니다. 시인에 고급관리를 역임하신 나으리께서 이렇게 성가신 농사일을 다 도와주시다니요.”

하고 부지런히 걸어 나와 승용차에 올라

“우리 신랑한테 전화 걸어 저녁이나 같이 먹자고 할까?”

하며 휴대폰을 찾더니

“아이쿠, 내 휴대폰!”

하고 한참이나 쩔쩔 매더니

“가선생님, 어쩌지요? 오리 밭에 두고 온 모양이지요. 점심 먹을 때.”

“그럼 도로 가야지요.”

“사람이 드문 곳이라 여자 혼자 가기는 좀 그렇고.”

“할 수 없지요. 제가 따라가야지요.”

한 3,40분을 달려 농장 앞에 이르자 급히 문을 따고 달려가 휴대폰을 찾아 달려 나오니

“오늘 괜히 저 때문에 고생하셨어요. 댁으로 모셔다드릴 게요.”

하고 달려 나오는데 아까 저녁 먹자는 말이 쏙 들어간 게 좀 그렇긴 하지만 잘 하면 갓 시작된 시즌의 프로야구를 한 3회전부터는 보겠다 싶어

“그러지요.”

하는데

“아, 참 내 정신 좀 봐라. 전기공사하는 집에 들려야하는데.”

“전기공사하는 집요?”

“예. 가선생님 입주하려면 전선을 연결하고 계량기를 달아야 해요. 울타리를 칠 때 전기는 넣었지만 실제도 사용은 않고 있었거든요.”

“아, 예.”

기장시내를 요리조리 또 한참을 달려 전기상회에 가서 무어라고 한참 이야기를 하다 돌아오는데 벌써 일곱 시가 넘었다. 다시 부지런히 달려 반송고개를 넘어오자 차가 막히기 시작했다. 여덟시 시보가 울리면서 벌써 저녁시간이 늦었지만 아무 말이 없는 것으로 보아 열찬씨가 제안하면 밥값도 내어야겠지만 이미 영순씨나 이선생도 식사를 했을 것만 같아 카스테레오에서 흘러나오는 염불소리만 부지런히 듣다 아홉 시 가까이 되어 주공아파트에 도착해

“수고하셨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밋밋한 인사로 헤어졌다.

(뭐지? 이 찜찜한 느낌은?)

뭔가 개운찮은 뒷맛에 열찬씨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이 글은 고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