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서상균]

4거리에서 곰내터널방향으로 가려던 방향을 급히 좌회전으로 바꾸어 냅다 기장체육관 앞까지 달리더니 반송고개로 좌회전 반송의 189번 종점에 이르자

“여기서 타면 바로 연산로터리로 갑니다. 조심해서 가세요.”

차를 세우며 사람 좋게 웃었다.

22. 갈수록 태산 오리농장(5)

“오늘은 모처럼 이 국장이 오시니 국고수입을 좀 올려볼까?”

“그까짓 연금생활자 잡비가 얼마나 된다고?”

“무슨 소리? 사업하는 우리야 다달이 수입이 얼마나 될까 걱정이지만 이 국장은 날만 새면 나오는 돈 아닌가?”

“그런가?”

최현조 회장과 상무 홍명희씨, 같은 운수업자 박판수씨와 서원조씨의 동향 감포 출신 친구이자 여보산악회회원인 안창준씨가 이미 판을 벌여놓고 반색을 했다.

“바로 들어갈까?”

돈 3만 원을 꺼내들고 자리에 끼어드니 바로 패가 돌아왔다. 다섯이서 게임을 벌여 한 사람이 돈을 다 잃으면 게임을 중단하고 중간정산을 하는데 딴 사람은 절반을 내놓고 잃은 사람은 절반을 도로 받아가는 식이라 3,40분에서 한 시간이상 걸리는 한 게임에 망해도 15,000원 만 잃으면 되고 밤 열시 이후에 게임을 마치면 그 때까지의 잃고 따기에 따라 승자가 또 얼마를 패자에게 주는 식이었다. 거기에다 저녁도 매번 서원조 회장이 사는 판이라 잃는 사람도 돈 1,2만원을 들이면 하루를 즐길 수 있는 신선놀음이지만 게임 그 자체에는 엄청나게 집중해서 스트레스를 푸는 것이었다. 그렇게 한 30분이 지났을까

“외삼촌, 어디 계세요?”

명촌의 생질 화식씨였다.

“연산동인데 왜?”

“가건물 싣고 오리 밭에 왔어요.”

“가건물이라? 자재를 싣고 와 밭에서 제작, 설치하는 것 아니었나?”

“에이, 요즘 누가 그렇게 한답니까? 공장에서 제작해서 바로 차에다 싣고 와서 땅에 내려놓기만 하면 되지요.”

“그래? 그럼 내가 그리로 갈까?”

“연산동이라면 택시비만 한 5만 원 들 텐데요?”

“하긴.”

“제가 저 물탱크아래쪽에 설치하고 갈게요. 농장 키는 대문 기둥 밑에 있지요?”

“그래. 내가 아까 거기 두고 왔지.”

“알았습니다. 설치하고 전화드릴 게요.”

“알았어.”

하고 다시 게임에 끼어드는데

“가국장, 화투를 왜 그렇게 치나?”

“예에?”

“첫손에 두꺼비를 먼저 써 상대방의 피를 뺏고 비 쌍피를 먹지 비 쌍피 뺏길까봐 생짜 패를 내주나?”

“아, 그런 수가 있나요?”

“전화 받더니만 골치 아픈 이야기가 있나보지.”

“아, 에.”

하는데 또 전화가 와

“삼촌, 안 되겠는데요.”

“왜?”

“밭에 들어가다 차가 빠졌어요.”

“그래서?”

“중간에 가건물을 내려놓았어요. 며칠 있다 날씨 좋은 날 다시 와서 설치해드릴 게요.”

“알았다. 수고했다. 그런데 돈은?”

“그건 나중에 건물을 보고 의논합시다.”

“알았다.”

해놓고도 자꾸만 마음이 불안했다. 현장에서 조립하는 창고나 원두막형태로 짓는다고 해놓고 가건물을 지어 차로 싣고 왔다니 규모도 꽤나 클 뿐 아니라 운반비만도 꽤나 들 것이었다. 거기다 처음엔 가건물이라 하다가 나중에 건물이라고 한 부분도 맘에 걸렸다. 엉뚱 생각에 사로잡혀 자꾸 실수를 하자

“이 국장은 한판 빠지고 나중에 하지.”

최현조씨의 제의에 따라 판에서 물러나는데 문득 고향친구 엄영호 치과원장의 이야기가 생각나는 것이었다.

한 이태 전에 홈커밍데이를 한다고 언양친구들을 부산에 불러놓고 자갈치횟집에서 만나는데

“어이, 주호야, 영관아, 종석아, 석주야!”

반갑게 소리치며 악수를 하던 엄 원장이 맨 뒤 황찬승씨를 보고

“왔나?”

얼굴을 반쯤 외면하고 손만 내미는 것이었다. 어릴 적부터 매일 복걸을 헤매며 물고기를 잡던 단짝에다 나이 든 여자를 하나 얻어 간월에서 일품관을 운영하던 시절이나 음주운전으로 수감된 상태에서 아들의 결혼식을 올리는 북새통속에서도 늘 연락을 끊지 않고 지냈으며 마침내 나이 든 여자마저 떠나버리고 일품관도 문을 닫은 후 혼자 여기저기 토목, 건축현장을 떠돌며 일당을 벌어 저녁마다 거나하게 술이 취해 새벽에 잠이 안 온다고 열찬씨에게 전화를 걸어오던 차마 미워할 수도 없는 친구라

“찬식아, 니 영호하고 무슨 일 있나?”

물어보자

“응, 삼동면 금곡에 영호네 별장 하나 지어주고 계산이 좀 안 맞아서.”

“그래.”

하고 자갈치에서 회를 먹고 노래방에 가서 <촌놈들 소 판 돈>으로 실컷 도우미를 집적대다 저물어 부산, 언양 간의 KTX열차시간에 맞추어 언양손님들을 보낸 후 부산친구들끼리 저녁을 먹다

“엄 원장, 와 찬식이 하고는 소 닭 보듯이 하노? 그래도 명색 꼬치친군데.”

열찬씨의 말에

“아이구, 생각만 해도 골치가 아프다.”

한참이나 미간을 찌푸리고 입을 달막거리다

“내가 이걸 이야기해야 되나?”

하더니 소주 한 잔을 털어 넣고

“이런 걸 저도 망신, 나도 망신 가부시끼 망신이라 카는 모양인데...”

씩 웃고 나서

“너거 듣고 욕은 하지마라. 내가 금곡에 주말 농장 겸으로 땅을 좀 샀는데 우선 울타리 펜스를 치고 과일나무를 심고 채소 심을 밭을 일궈 상추씨를 뿌리는 과정에서 우연히 찬식이를 만났지. 원래부터 쇠꼴, 한문으로 금곡(金谷)인 좁고 긴 골짜기를 따라 꼬불꼬불한 길을 올라가는데 저 위에서 짐을 싣고 내려오는 포터 화물차하나가 어띠 비틀거리는지 정신을 바짝 차리고 겨우 비키면서 ‘여보시오, 그 운전 좀 똑바로 하시오.’ 하려고 상대방의 얼굴을 보니 그게 시뻘건 찬식이 얼굴이었어. 평소 술을 많이 먹고 음주운전에 자주 결렸다고 들었지만 대낮부터 그렇게 술 냄새 풀풀 풍기며 운전까지 할 줄은 몰랐지.”

뜸을 들이고

“어이, 이기 누고? 엄 원장, 영호 아이가?”

서로 적당히 차를 세우고 인사를 나누는데 자기는 당시 한창 주말농장을 겸한 고급별장이 들어서는 붐이 일던 금곡에 별장을 하나 짓는 일을 맡아 한다면서 주말농장 울타리를 치고 온다던 엄원장을 억지로 끌고 자신이 일한다는 현장을 보여주고 엄 원장의 농장까지 둘러본 뒤

“엄 원장도 여기 한 서른 평 별장을 짓지.”

“이 사람아, 니나 내나 버든동네 초가집에서 살며 앞새메하고 복걸을 발발 기며 미꾸라지 잡고 기살도랑에 기나 자던 처지에 웬 별장씩이나?”

“아니지. 그래도 버든마을에서 최고로 출세하고 돈도 많이 번 엄원장정도면 금곡에 별장정도 하나 있는 것은 당연하지.”

설왕설래 끝에 그러면 우선 원두막형태의 가건물이라도 하나 지어서 따가운 햇볕이나 비라도 피하자는 말에 공감이 가서 우선 신문이나 텔레비전 광고에 자주 나오는 멋들어진 원두막을 하나 짓기로 약속하고 헤어졌다고 했다. 그리고는 날마다 병원의 환자를 받느라고 가마득히 잊고 있었는데 하루는 전화가 와서

“어이, 엄 원장, 인자 기초를 다 마치고 뼈대가 올라가는 판인데 한 번 와보지.”

난데없는 말에

“아니, 기초는 뭐고, 뼈대는 다 뭐고? 그냥 비나 햇볕 피하는 원두막 하나 짓는다고 안 했나?”

“그렇지만 천하의 엄 원장, 버든에서 제일 출세하고 돈을 많이 번 우리의 엄원장이 어느 정도는 지어야 안 되겠나? 남의 눈도 있고.”

“무슨 소리? 그리고 지으면 짓는다고 말은 하고 시작해야지.”

“아니 우리 같은 꼬치친구끼리 무슨 절차가 그래 복잡하노? 다 각자 알아서 적당하게 하는 거지.”

그러고 보니 찬승씨를 만난 지가 보름이 넘고 그 가운데의 주말에 비가 와서 현장에 가지 않은 것이 화근이었다. 다음 일요일에 현장에 도착한 영호씨는

“아이구야!”

절로 탄식을 하며 땅바닥에 주저앉고 싶었다. 커다란 굴삭기하나가 여기저기 울타리와 땅을 헤집고 시멘트콘크리트로 건물기초를 놓은 자리가 스무 평도 훨씬 넘어보였고 울타리펜스를 허문 자리에는 어디서 싣고 온 건지 회색의 이끼가 핀 거대한 바위로 축대를 쌓고 상추를 심었던 자리에는 굵다란 원통형 기둥감을 비롯한 건축자재가 산더미처럼 쌓이고 노란 작업모를 쓴 인부 여럿을 지휘하던 찬승씨가

“아이구, 우리 원장님 오셨네.”

모자를 벗고 꾸뻑 인사를 하는 것이 영판 건축업자가 주인을 대하는 모습이라

“어이, 친구야. 지금 니 뭐하는 거고?”

“뭐 하다니 별장 짓고 있지.”

“아니, 누가 언제 이런 집을 지으라고 했나?”

“그래도 남의 집도 아닌 친구 집을 지으려면 이 정도는 지어야 이 꼴짝에서 빠지지 않지.”
“아니, 아무리 친구사이지만 설계도 없고 계약도 없고 또 착공한다는 말도 없이?”

“일단 집을 지으라고 했으니 친구 간에 굳이 계약서를 쓸 것도 없고 착공은 알아서 하면 되고 설계는 내가 언양바닥 최고의 기술자 황대목 장남아이가? 별장은 별장대로 대충 몇 개의 스타일이 있고 표준설계 비슷한 것이 있는데 요 지점, 요 면적에 주변경관을 따지면 요렇게 짓는 것이 좋을 것 같아 표준설계하나를 빼왔지. 같은 골짝에 똑 같은 집을 짓는 법이 아니라 상북면 소호의 별장지대에서 제일 멋진 건물의 설계를 말이야.”

하면서 두툼한 설계서를 내미는데 표지에 시멘트 몰타르가 묻어 만지기도 뭣해서

“내가 이빨이나 보는 사람이 설계도를 볼 줄이나 아나?”

기가 차서 한참이나 숨을 고르다

“니 생각대로 집을 다 지으면 돈이 얼마나 드나?”

“한 일억 오천만 원. 와? 설마 그 돈이 없어서 묻는 거는 아닐 끼고.”

“그래 딱 일억 오천이면 모든 것이 끝나나?”

“집이란 것이 짓다보면 기초에 암반이나 지하수도 나오고 날씨가 안 맞아 연장되는 수도 있어 추가경비 몇 천이 나오기는 예사지. 그리고 나중에 취, 등록세 세금도 있고.”

“그럼 이억은 들어야 된다는 말인데. 만약에 지금 공사를 중단하고 지금껏 한 자재를 도로 철수시키면 얼마나 드나?”

“이적지 든 자재비 공사비가 오천만원이 훨씬 넘는데다 기초공사한 걸 파내고 자재를 치우고 원상복구를 하는데도 한 오천이 더 들면 그것도 근 일억 몇 천은 들걸.”

“허허, 참 배보다 배꼽이 크다더니. 이기 도대체 무슨 꼴이고?”

“친구야, 우짜겠노? 대신 내가 공사는 야무지게 해줄 게.”

“그래.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내일부터 며칠 쉬고 기다려라. 내 마누라랑 동생이랑 의논을 해보고 다시 연락하꾸마.”

“마누라는 그렇다 치고 동생은 와?”

“내 동생 영철이라고 알제?”

“알지?”

“그 아가 생물학박사로 남극의 세종기지근무까지 갔다 온 권위잔데 생물학 실험용 약초를 재배한다고 나랑 같이 어불리서 산 땅인데 말이다. 남의 연구용 농장에 별장을 지었으니 난리가 날 기다.”

“암만 연구를 해도 일단 별장을 지어 삼겹살이라도 꿉어묵고 천천히 하는 거지. 어데 소금물이 쉬나, 바닷물이 넘치나? 새털같이 많은 날에 드문드문 놀다 하지.”

“저런 팔자도 좋은 소리하네.”

“거기 아니라 원장님. 공사 중단 시키면 또 하루에 얼마씩 우에 경비가 안 나나?”

“그래?”

“한 분 봐라. 저 장비랑 일꾼이랑. 또 비라도 와서 뭣이 씻겨가거나 무너져도 그렇고.”

“저런? 그럼 세금 빼고 일억 오천이다. 더는 한 푼도 못 준다. 그래 알고 해라.”

하고 아내와 동생을 설득시키느라 진땀을 빼고 버든의 사촌동생 영관씨에게 가끔 현장이나 살펴보라고 하고 공사를 마쳤는데 역시 우려하던 대로 추가경비가 또 3천만 원이나 나왔지만 너무 돈을 아끼면 설비나 집기를 하품으로 넣을 수 밖에 없다는 말에 울며 겨자 먹기로 받아들여 세금을 포함 2억이 넘는 돈이 들었다고 했다.

[그림=서상균]

그런데 일이 거기서 끝났으면 그나마 다행인데 그게 아니었다. 막내아들 결혼도 있고 해서 부산의 아파트 하나를 팔아 서울의 집을 사는데 보탰는데 양도소득세가 엄청 나온 것이었다. 그 동안 약간의 부동산을 사고팔아 재테크도 나름대로 해온 처지인데 금곡의 별장을 지음으로서 1가구 2주택이 적용된다는 것을 깜빡한 것이었다. 그래서 진태씨, 용찬씨, 석찬시 버든 친구들과 저녁을 먹으며 한탄을 하는데 용찬씨가

“아, 그거면 걱정 마. 내 동생이 세무사 아닌가?”

하고 용찬씨와 달리 버든 큰집에 통 걸음이 없던 고향후배가 나서서 양도소득세의 금액을 좀 낮춰서 해결을 봤다는 것이었다.

“그래. 엄원장이 고생은 했지만 어차피 있어야할 별장이니까 잘 끝났다고 보고 요새 찬식이는 우짜고 지내는고?”

“가끔 일은 하지만 돈 있으면 그냥 마셔 뿌고 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살던 집하고 돈이 좀 쳐졌지만 형제들 갈라주고 제 몫은 아들 좀 주고 큰돈은 없는 모양이더라. 하긴 있어도 떨어질 때까지는 마셔버릴 테니까...”

“그렇구나.”

(설마 지 외삼촌인데 그렇게 심하게 바가지야 씌웠을라고?)

화투판이 끝날 때까지 영 기분이 찜찜했다.

“오늘 이 국장은 전화 한 통 받고 통 힘을 못 쓰네.”

최현조씨로 부터 택시비 만원을 받아 돌아오면서도 아내 영순씨에게 무어라고 설명할 지 고민이 태산이었다.

이튿날 아침 딸네 집에 나서는 영순씨에게

“또식이가 농막을 지어왔다는데 말이야.”

운을 떼니

“아니, 재료를 가져와서 밭에서 직접 짓는 것 아니었나?”

“나도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요즘은 다들 공장에서 이동식으로 제작해서 현장까지 차에 싣고 간다더군.”

“큰일 났네!”

“큰일이라니?”

“생돈이 좀 날아가게 생겼단 말이지.”

“그게 무슨 소리지.”

“정년퇴직까지 했다는 사람이 순진하긴. 조카가 외삼촌이라고 뭐 서비스차원에서 공짜로 지어줄 줄 알았나?”

“그럼?”

“좌우간 현장에 가서 보고 이야기하세요. 돈도 얼마 준다고 이야기하지 말고 나랑 의논하고.”

예상이라도 한 듯 말했다. 조카가 서비스차원에서 농막을 지어준다는 말에 솔깃한 열찬씨를 보고

“아이구, 이 양반아 집 지을 재주가 없으면 눈치라도 있어야지.”

혀를 끌끌 차던 모습이 떠올랐다. 도대체 어떤 집일까 밭까지 근 세 시간이나 걸리는 내내 궁금증과 설렘에 빠졌다 180번 버스를 내려 한수원아파트 울타리를 돌아 또 한참이나 산 구비를 돌아 텅 빈 원룸의 언덕을 올라 마침내 평평한 밭이 시야에 들어왔을 때

“!”

저도 몰래 흠칫했다. 이건 농막이나 원두막 형식이 아닌 길쭉한 건물로 두개의 문과 커다란 창문까지 달려 완전한 주거형 건물 같아 보였다. 처음 50만원의 예산을 잡아 자기네 공장의 폐자재로 서비스차원에서 지어준다는 것이 자재비만 해도 꽤 들고 인건비는 둘째치고라도 저 큰 건물을 언양에서 예까지 크레인처럼 예인장치가 달린 커다란 화물차로 싣고 오는 운임만 해도 만만치 않을 것 같았다.

급히 문을 열고 들어가니 땅바닥이 질어 차가 빠졌는지 깊숙이 파인 타이어자국 끝에 가로 6미터, 세로 3미터는 됨직한 패널로 조립한 건물이 거대한 성채처럼 우뚝 서있었다. 지붕도 유원지의 원두막처럼 빨간 마감재로 덮여있어 얼핏 보아도 꾀나 비용이 들어간 것 같았다.

(가로 6미터에 세로 3미터라?)

머릿속에 뱅뱅 도는 상념에 한참이나 매달리던 열찬씨가

(혹시 컨테이너 사이즈?)

하고 무릎을 탁 치면서

(그래 위에 위장막을 덮어 컨테이너박스를 갖다 논 것으로 위장한단 말이지.)

역시 장사꾼들은 머리가 좋다고 생각해도 뭔가 개운치가 않다가

(오라!)

마침내 한 동안 그의 상념을 짓누르던 꼬투리하나를 찾아내었다.

※ 이 글은 고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