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서상균]

22. 갈수록 태산 오리농장(6)

마침내 한 동안 그의 상념을 짓누르던 꼬투리하나를 찾아내었다.

그건 바로 그가 부산으로 처음 진출한 연산동 1공구의 부산역전화재의 이주민을 집단수용한 정책이주지의 임시건물이었다. 금련산언덕을 파헤친 비스듬한 언덕에 모양은 그럴 듯한 도로를 내고 중간에 끼인 블록마다 가로 6미터, 세로 4미터의 여섯 평이 조금 넘는 땅을 분할하고 그 위에 가로 6미터 세로 3미터의 건물을 어깨동무하듯 줄줄이 이어 서 지은 정책이주지의 슬레이트건물, 1,820이란 하나의 번지에 따로 설계도 없이 지은 바람에 모든 사람의 주소가 1,820 한 번지라 통 반 표시가 없으면 찾을 수도 없는 집, 열린 창문을 통해 보잘 것 없는 살림살이와 반찬도 없는 밥상까지가 환히 들여다보이던 집, 당시 유행하던 <서부개척사>나 <황야의 은화 1불>이나 <돌아온 장고>처럼 나지막한 휘파람소리를 배경으로 마차가 다니고 긴 가죽부츠옆구리에 단검을 매달거나 장총을 단 무법자나 매단 보안관인 크린트 이스트우드나 리 반 클리프가 영화의 한 장면처럼 금방이라도 그 완강한 매부리코와 냉정한 눈빛으로 천천히 시가를 피우다 문득 권총을 빼들 것만 같은 그 살벌한 마을, 그 6평짜리의 대부분이 그 알량한 입주권마저 팔아넘기고 떠돌이 유랑민처럼 근처 산기슭의 소나무 밑이나 무덤의 귀퉁이에까지 천막을 치거나 판잣집을 지어 웅크리다 6원짜리 3번 버스를 타고 서면이나 시내로 나가 지게꾼과 건축공사장, 노점, 구두닦이, 껌팔이, 음화판매, 완월동의 호객꾼에, 자갈치어판장 앞에서 벌어지는 윷과 섯다판의 바람잡이를 하다 술이 거나하게 취해 다시 3번 버스를 타고 돌아와 마치 서부개척사의 한 장면처럼 다방 두어 개, 술집 두어 개와 파출소, 동사무소가 있고 가끔 순경이 어슬렁거리는 황막한 거리에서 치고받고 싸움을 벌이거나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다 공연히 동사무소의 대문을 흔들어대다 숙직하던 열찬씨가 나가면

“나는 밥을 굶었는데 너거는 저녁을 묵었제?”

하면서 주머니에서 칼을 꺼내 보이다 출동한 경찰관에게 잡혀도

“그래, 날 잡아가라. 밖에서 굶는 것 보다 안에서 콩밥이라도 넉넉히 먹고 별이라도 하나 더 달지!”

하던 그 아비규환의 동네, 숙직실에서 기거하던 그가 유일한 식당인 평양집의 돼지국밥을 사먹을 돈이 없으면 통장네 쌀가게에서 쌀 한 봉지를 사고 역시 통장네 반찬가게에서 김치 한 봉지와 고등어를 사 미리 들고 간 냄비에 찌게를 앉혀달라고 해서 숙직실 연탄아궁이에 올려 저녁을 때우던 지독히 가난하고 외롭던 시절, 그래도 소주 한 병은 꼭 사다 마시며 맥없이 헤어진 옥자씨에 대한 죄책감과 아무리 부딪혀도 한 마디의 대응도 없는 얼음처럼 차갑고 눈꽃처럼 단아한 순영씨에 대한 연모와 회의에 함몰되어 좀체 정이 붙지 않는 어설픈 도시인이 되어가던 시절의 그 아무 개성도 없이 끝없이 이어진 사각형 건물과 꼭 같았던 것이었다.

“그래 예까지 집을 실고 온다고 고생했다. 나는 원두막이나 농막을 지어달라고 했는데 이렇게 거창한 건물을 지어 와서 어안이 벙벙하다.”

생질 또식씨에게 전화를 걸어 차마 왜 그랬냐는 말을 못해 빙빙 돌리는데

“외삼촌, 가게에 있는 재료로 대충 짜 맞추다 그래도 우리 집안에서 제일 알아주는 어른인 외삼촌이 아무리 농막이라도 이 정도는 되어야 될 것 같아서요.”

역시 말을 돌리는지라

“그래 비용이 꽤 났제?”

“예, 뭐 있는 재료에 인건비만 좀 들었는데 하다 보니 새 자재도 들어가고...”

“내가 처음에는 농막이나 원두막 형태로 한 30만 원이나 50만 원 안쪽으로 하라고 한 말 들었제?”

“예. 그래서 공장에 있는 재료로 시작을 했는데 하다 보니 자꾸 딴 자재도 들어가고 전기설비도 해야 되고 또 출입문 두 개와 창문도 그래도 남 보기에 번듯하지는 못 해도 옹졸하지는 않아야 되겠다 싶고 하다 보니 호동이 인건비도 자꾸만 들어가고...”

“그래서?”

“가게에 있던 거 말고 새로 산 자재비 50만 원에 호동이 인건비도 3일치 하루에 25만 원에 75만 원, 또 운반 장비 40만 원에 뭐 한 백60만 원 정도...”

“알았다. 내 의논해 볼께.”

“예. 죄송합니다.”

“아니야.”

하면서 노가다, 특히 건축업 하는 사람들이 참 무섭구나, 슬비를 시집보내기 위해 아파트내부수리를 할 때 설비, 미장, 유리, 페인트, 전기, 조명등을 전부 산우회회원들에게 떼주었는데 개인별로 차이가 좀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이 은근슬쩍 공사의 범위나 양을 넓혀 새 재료를 넣고 날짜를 더 잡아 처음 천만 원으로 충분하다는 공사비가 무려 2천만 원에 육박하는데도 아침에 출근한 미장인부가 목욕탕이나 싱크대 밑을 조금 깔짝거리고는 종일 낮잠이나 자면서 이튿날 또 시멘트반죽 몇 삽 바르고 하루를 보내는 식으로 인건비를 늘이며 서너 번 포대에 담아 엘리베이터로 버릴 철거자재도 굳이 사다리차를 불러 또 한 50만 원의 경비를 추가시키는 것이 기가차서 큰 사업장을 가져 공사를 많이 해본 양경석회장에게 술자리에서 하소연을 하자

“그래서 노가다를 노가다라 하고 평생 노가다를 못 면한다고 하지. 오로지 제 몸 하나 제 기술 하나로 먹고사는 그 사람들이 되도록 천천히 자기 기술을 발휘하고 땀을 덜 흘리며 하루라도 더 벌어먹겠다는데 무슨 말을 하겠노? 당신은 조그만 내부수리지만 난 공장건물을 짓다 조금만 열심히 하면 당일로 끝날 일을 오후 서너 시만 되면 하는 듯 마는 듯 시간을 끌어 이튿날까지 사다리차에 굴삭기, 인부 다섯 명의 인건비등 몇 백만 원씩을 더 준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렇게 서로 속마음을 숨기며 마치고 나서 고생했다고 같이 술을 마시고 산우회로 와서 고스톱을 치고 다음 일요일 날 같이 등산을 하고 노래방에 가고 말이야.

그렇다고 그게 다가 아니야. 그 정도는 약과야. 괜히 친구한테 돈 몇 십만 원 적게 주려다 얼굴 붉히고 온 동네에 더러운 소문나기 전에 무조건 고생했다고 인사하고 공사 끝나면 그 친구들 다 불러 거하게 술밥이나 사게.”

하는 말을 듣고 혀를 끌끌 차면서 술을 산 적도 있었다. 집에 돌아와 괜히 무슨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영순씨에게 말을 하니

“아이구, 그 놈의 밭농사 지어서 밥을 먹는 것도 아니고 무슨 취미생활에 등골이 다 빠지노?”

한숨을 푹 쉬더니

“그놈의 교장선생만 심술을 안 부려도 아니 그 심청궂은 할마시만 아니라도 생돈 몇 백이 안 들어가는데...”

하다

“당신은 사람을 잘 믿는 것이 큰일이야!”

버럭 성을 내며 쳐다보는지라

“아니, 그게 무슨 말인데?”

“당신이 교장선생 말에 단숨에 넘어가서, 좌우지간 만나는 사람마다 늘 사람 좋다고 믿고 그러다가는 늘 뒤통수나 맞고...”

“무슨 소리! 5각정 정자가 편리하고 물이 좋다고 같이 커피라도 끓여먹고 가족처럼 지내자고 샐샐 웃은 사람이 누군데?”

“아니, 철없는 마누라가 그랬더라도 가장인 남편이 판단을 잘 하고 무게를 잡아야지?”

“...”

어떻게 그렇게도 잘 빠져나가는지 신기한 일이었다. 또다시 모든 잘못과 책임을 뒤집어 쓴 열찬씨가 냉장고에서 소주병을 꺼내와 거푸 두 잔을 마시고

“그래, 당신은 책임이 없으니 내가 다 알아서 하란 말이제?”

도발하자

“내가 이 말은 안 할라캤는데 당신 형제들 일은 와 하는 일 마다 다 그렇소?”

하다 스스로 이게 아니라 싶은지 말을 끊고 한참이나 숨을 죽이더니

“달라면 줘야지요. 조카한테 일시키고 안 주고 배길 장사가 있나?”

은근하게 눈빛을 바꾸는데

“전부 165만 원이 들었다는데 150만 원 정도 줄까?”

“가만 있어보소. 틀림없이 경비가 더 날 텐데 언제 농장에 와서 건물 바로 앉히고 전깃불 넣어줄 지 물어보소.”

해서 전화를 하니

“예. 땅이 마르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모래쯤 호동이하고 저 하고 갈 때 사람 힘으로 못 드니 또 장비가 가야 됩니다.”

“아니, 그럼 또 돈이 든단 말이가?”

“예. 하다가 보이 그래 됐는데 그놈의 땅만 안 질어서 차만 안 빠져도 좋았을 건데...”

“그라면 전체 경비가 200만 원도 더 들었다는 말인데?”

“예. 한 250 들었는데 한 백만 원 자재비는 깎고요.”

“글쎄. 의논해보자.”

하고 전화를 끊자

“당신은 와 만사 당신이 저질러놓고 내보고 의논해본다 카는데?”

“아니 당신이 사사건건 간섭 안 하고 곱게 넘어가는 법이 한번이라도 있었나?”

“그거사 당신이 일을 늘 그렇게 하니 그렇지.”

연방 또 한방 싸움이 붙을 판인데 전화가 오더니

“외삼촌, 호동이 월급날이 되어서 돈이 좀 급한데요.”

또식씨의 풀죽은 목소리에

“그래 우선 통장번호를 문자로 넣어라. 내 내일 얼마간 넣어줄 께.”

하자

“일단 전화를 걸어 다시 더는 돈 들어갈 데가 없는지 물어보소.”

“와?”

“좌우간 한번 해 보소.”

해서 전화를 하니

“예. 이건 제가 외삼촌한테 서비스로 해드리려고 하는데 집 앞에 놓을 방수목 탁자, 의자까지 달린 커다란 식탁 겸 작업대가 30만 원, 쓰레기 소각하는 드럼통화덕이 한 5만 원에 탁자 위에 볕을 가리고 비를 막을 가림 막도 한 30만 원이 드는데 뭐 서비스해야지요.”

“뭐라고? 그러면 또 65만 원이 더 든다는 말이가?”

[그림=서상균]

몰래 역정을 버럭 내는 열찬씨에게 옆에서 듣고 있던 영순씨가 손짓으로 전화를 끊으라는 신호를 하더니

“내일 150 송금하고 모래 건물 앉히는 것 완전히 끝나고 방문 열쇠 두 개 받고 방에 전깃불 들어오는 것 확인하고 50만 원 더 보내소.”

“그래 하면 되겠나?”

“내 짐작에 그 정도면 크게 손해는 안 보고 저거 둘 인건비는 나왔을 겁니다.”

“그런가?”

하고 각자 잠자리에 드는데 요란하게 열찬씨의 휴대폰이 울리자 영순씨가 황급히 튀어나왔다.

“이, 이 선생님!”

잔뜩 화가 난 목소리가 속사포처럼 튀어나오자

“?”

열찬씨의 미간이 찌푸려지는데

“호, 호영이 이모할매. 오리농장”

영순씨가 귀에 대고 속삭이자

“아이구, 윤 여사가 이 시간에 어떻게?”

“아니, 이 선생님. 듣기로 열심히 밭을 잘 가꾸고 있다고 해서 안심했는데 뭐 오늘 커다란 저택을 하나 지어서 밭 가운데 팽개쳐 놨다구요?”

“예. 그렇게 된 모양입니다. 제 생질이...”

“아니, 아무리 밭을 빌렸더라도 남의 땅에 집을 지으려면 서로 상의해서 지주의 승낙을 받아야지요.”

“예. 건축업 하는 생질에게 비바람을 피하고 농기구를 넣어놓을 농막이나 원두막을 하나 지어달라고 했는데 일을 그렇게 크게 벌여놓은 줄은 몰랐어요.”

“이 선생님도 잘 모르신다고요?”

“예. 오후 늦게 전화로 연락을 받았어요.”

“그런데 말입니다. 공직에 오래 계셨으니까 잘 아실 텐데 그린벨트에 무허가건물 단속이 얼마나 엄하며 건축주나 지주가 얼마나 시달리는지는 잘 아실 텐데요?”

“예. 그렇지요.”

“이렇게 골치 아프고 신경 쓰일 일이 생길까 싶어 그동안 밭을 묵혔는데 아이구, 골치 아파라.”

“죄, 죄송합니다.”

“그 건물도 그렇지만 이 선생님도 우리 밭에 받아들여도 될지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겠어요.”

“예에?”

“저는 저의 땅에 공무원, 특히 무허가건물단속원이 드나들며 사람을 중죄인 취급하는 것이 제일 싫거든요.”

“아, 예. 저도 실물을 안 봤으니 내일 현장에서 실물을 보고 이야기 하지요.”

“예. 종일 계시겠지요?”

“예. 오전 10시전에 도착해서 기다릴 게요.”

하고 전화를 끊은데

“여보세요. 형님, 이모할매가 성이 많이 났던데 우짜면 좋겠어요?”

영순씨가 호영이할머니에게 전화를 하는 모양이었다. 귀를 쫑긋해 들어도 잘 들리지 않아 냉장고에서 소주를 찾아 한잔 마시는데

“그 양반 성격이 까다롭고 성이 나면, 아니 자기 일에 간섭을 하거나 불편하게 하면 너무나 과민하게 반응하는 성격이라 자기도 어떻게 할 도리가 없대.”

“그래서?”

“일단 내일 현장에서 당신이 잘 이야기해보라고 하네. 그 윤여사가 명색 문학도라 당신이 준 시집하고 수필집을 보고 꽤 높이 평가한다고 들었다며 이야기만 잘 하면 그렇게 심하게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그래. 내가 그놈의 정부미 40년 먹는 동안 남에게 통사정하는 일이 어데 한두 번이었나? 귀신도 비는 앞엔 어쩔 수 없다고 설마 어떻게든 되겠지.”

하고 각자 다시 눈을 감자 처음 만나 밭을 얻은 지 사나흘 지나 열찬씨와 영순씨가 윤여사내외와 호영이할머니를 초청해 저녁식사를 하던 생각이 났다.

윤 여사가 잘 안다는 일광 학리 출신의 선장이 직접 잡아온 생선으로 회를 뜬다는 기장의 어느 골목안에 있는 <김선장횟집>에서 아나고회와 복국을 시키고 고맙다고 인사를 하며

“제가 그 넓은 땅을 다 띠질지 못 할지는 몰라도 아무튼 감사합니다. 우리 세다가 흔히 하는 말로 소위 빈농(貧農)의 아들로서 그런 넓은 땅을 바라보는 것 만 해도 절로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아서”

직장에서 상사 대하듯 정말 공손하게 술을 부으며

“이건 제가 쓴 시집과 수필집인데 수필집은 가지시고 시집은 제게도 여분이 없으니 한번 읽어보시고 돌려주시기 바랍니다.”

하고 수필집 <달팽이와 부츠>, 시집 <비오는 날의 연가>를 준 적이 있었는데 윤여사의 반응은 꽤 깊이가 있어 읽을 만하다는 이야기였고 남편 이선생은 <비오는 날의 연가> 서문의

이 땅의 모든 외로운 사내들과...

나는 왜 숨 쉬는 생명체로, 살 가진 동물로, 또 어설픈 사내로 태어난 것일까. 사내가 어설퍼 보이는 것은 모든 수컷의 세계가 그렇듯 짝을 찾기 위한 설렘으로 망설임과 기웃거림을 반복하다 마침내 그리움의 포로가 되기 때문일 게다.

그 수컷의 길이랄까, 남정네의 고뇌를 나는 유독 심하게 앓는 셈이다. 용기가 없으면서 미련이 많은 탓도 있겠지만 어쩌면 많은 사내 또는 숫으로 태어난 생명체의 대표나 표본으로 그 병을 앓아야 했던 운명인지도 모르겠다.

나이 오십은 그리움과 어울리지 않는다. 오히려 다음세대의 성년에 신경 쓸 나이에 세삼 가버림 마흔아홉 살을 되돌아보는 이 시들은 쑥스럽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 물성을 정제한 지나간 젊음의 화석이라고 자부해본다.

어느새 새천년이 와버렸는데, 아아 새천년의 사내들은 더욱 외롭고 쓸쓸할 게다. 이 땅의 모든 외로운 사내들과 이 시들을 공유하고 싶다.

2000. 4 이열찬

하는 대목에서 특히 마지막 <어느새 새천년이 와버렸는데, 아아 새천년의 사내들은 더욱 외롭고 쓸쓸할 게다. 이 땅의 모든 외로운 사내들과 이 시들을 공유하고 싶다.> 부분에 매료되어 <아아, 새천년의 사내들은...>을 입에 달고 산다고 했다.

※ 이 글은 고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