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산박물관의 ‘황산역’ 특별전. Ⓒ박창희
#아, 황산역이여!
아직 갈 길이 멀다. 박 선달은 황산진에서 만날 ‘그림’을 생각하며 발길을 재촉한다. 황산진에는 ‘일 잘하는 황산 이방 최연수’를 만날 수 있을까. 아니면 최연수를 떠올릴 수 있는 유적이라도….
때마침 양산박물관에서 ‘황산역 특별전’(2017. 10. 27~2018. 1. 21)을 열고 있다. 황산역의 역사와 역할, 현대적 의미 등을 총체적으로 소개하는 자리다. 박 선달을 위한 특별전인가 싶게 내용이나 형식이 좋았다는 관람평들이 나온 터다.
여기서 말하는 역(驛)은 기차역도 아니고 지하철역도 아닌 말(馬) 역을 일컫는다. 영어로는 ‘horse station’이다.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역에는 말들이 돌아다녔다. 이곳에서 왕명이나 공문서 전달, 관수 물자 운송, 사신 영송과 접대, 범죄인 체포와 압송 등의 역할을 맡았고, 유사시에는 국방의 임무까지 떠안았다. 암행어사가 돌아다닐 때 거점으로 삼는 곳도 바로 역이다.
황산역(물금읍)은 동래와 기장, 밀양과 대구, 울산과 경주로 통하는 양산의 최고 교통요지에 위치했다. 고속도로와 KTX가 생기면서 물금읍이 한갓 시골처럼 전락했지만, 조선시대가 끝날 때까지도 대단한 역할을 수행했다.
핵심 시설인 황산역 관아는 양산시 물금읍 화산4길 18번지 서부포교당 일원에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가뭇없다. 후대에 지었다가 철거한 건물 잔해만 낭자하다. 『황산역지』에는 동헌(東軒)을 중심으로 장적고(帳籍庫), 창고(倉庫), 작청(作廳), 관청(官廳), 형리청(刑吏廳), 관노청(官奴廳), 사령청(使令廳), 일아정(日皒亭), 환취정(環聚亭) 등 관아 10여 동과 2동의 누각이 들어선 것으로 되어 있다. 영남 최대의 역참다운 면모다.
역마 운용이 특히 흥미롭다. 역에 소속된 역마를 이용할 때에는 상서원에서 발급한 마패에 그려진 말 수에 따라 역마를 쓸 수 있었다. 흔히 암행어사가 지니고 다니는 마패가 그것이다. 마패는 5마패는 물론 경우에 따라 7마패와 10마패가 있었다.
조선시대 나무 마패.
보통 사극에서 “암행어사가 출두야!”하고 외치면 어디선가 수많은 병졸들이 튀어 나오는데, 그 병졸은 대부분 역에 소속된 역졸들이다. 황산역이 번성했을 때에는 역리·역졸·역노 등이 총 8,80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를 총괄하는 책임자가 찰방(察訪)이다. 암행어사가 뜨면 찰방이 보필했다. 당연히 위세가 컸다.
역참은 기본적으로 공무를 수행하는 관원들이 이용했다. 선비들이나 장사치들은 역에서 운영하는 원우(院宇)에서 숙식을 해결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건물의 명칭, 용도, 기능 하나 하나가 문화콘텐츠 감이다.
황산역의 동과 서에는 대천(양산천)과 황산강(낙동강) 범람을 막는 제방이 있었고, 제방 안쪽 부분은 모두 말을 키우기 위한 마위전(馬位田)이었다. 지난 2010년 정부의 4대강 살리기 사업 과정에서 여러 문헌에 나타나는 ‘황산언(黃山堰) 유적’이 발굴됐다. 출토 유물로 보아 이 제방은 12세기 초 고려시대때 처음 축조됐으며 15~16세기 조선시대 전기에 대대적으로 수축된 것으로 조사됐다. 한국 고대의 치수(治水) 정책의 실상을 알려주는 획기적인 발견이다. 황산언은 황산역을 지키는 제방이었다.
지금은 존재조차 잊혀졌지만, 조선시대의 역참은 곧 나라의 길이었다. 국가적으로 역참이 잘 돌아갈 때는 나라가 흥했고, 역참의 병폐가 드러나 운영이 어려워질 때는 나라가 흔들렸다. 역참을 가볍게 볼 수 없는 이유다.
황산역 터를 돌아본 박 선달은 ‘황산역 특별전’이 열리는 양산박물관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못 보던 자료가 있다. 1800~1801년 당시 찰방이었던 윤기(尹愭)가 경상감영에 말을 보낼 것을 요청하는 ‘황산역찰방첩정’과 각 역을 둘러본 뒤 실상을 개탄한 ‘효유문(曉諭文)’이 보인다. 효유문은 어떤 사람을 알아듣게 타이르는 글이다. 박 선달은 윤기의 효유문을 읽으며 오금이 저리는 느낌이었다. ‘조선이 이래서 망했구나!’ 내용의 대강은 이렇다.
‘옛날 역참을 설치한 까닭은 왕명을 전달하기 위함이었다. 후대에도 이를 따랐는데, 나중에는 이를 데 없이 많은 폐단이 발생하였다. 역참을 설치한 지가 오래 되어 역무(驛務)가 제대로 수행되지 않고, 일이 변화함에 따라 사람들의 습속이 바뀌었다. 또한 농간에서 이득이 나오자 아전들이 간악해졌다. 말은 풍족한 먹이로 잘 사육되지 못하고 백성들은 뼈에 사무치는 원한을 안게 되었으니, 역참을 설치한 뜻이 그런 것이었으랴.
양산 물금읍의 옛 황산역 터. 사진=박창희
내가 부임하고 가만히 확인해 본 바로는, 우리 황산도(黃山道)의 역참은 폐단이 천만 가지나 된다. 그 중에 큰 것만 알기 쉽게 대략 말하자면, 본도(本道)의 역참들은 규모를 막론하고 어느 역참이라 할 것 없이 대체로 다 유명무실하다. 말(馬)로 말하면, 점고(點考)할 때 정해진 수에 맞게 번갈아 채워 넣기는 하나 병든 말이 태반이고 둔마(鈍馬)로만 가득 찬 곳도 많다. 서로 담합하여 찰방을 속이는 폐단이 규식이 되어 버렸고, 부질없이 빈 문서만 붙잡고 있는 꼴은 아이들의 소꿉장난과 다를 바 없다.
토지로 말하면, 자기 물건인 양 취급하여 온갖 잇속을 챙기고 사사로이 매매해 온 것이 점차 잘못된 규례로 굳어져 버렸다. 일을 시키면 온갖 꾀를 내어 회피하는 것을 능사로 여기고, 호령하면 응하는 척하다가 거짓 핑계를 대어 시간을 끈다. 역참에 투속(投屬)하였다가 도로 머뭇거리며 교묘히 박쥐 노릇을 하고, 일정한 소속이 없이 신분을 둔갑하며 자잘한 송사거리를 애써 찾으니, 소장이 계속 올라오고 공문이 빗발친다. 이렇듯 온갖 간악한 짓이 이루 손꼽을 수 없을 정도이니, 인심의 간교함과 폐단의 심각함이 어찌 놀랍고 통탄스럽지 않겠는가?
만약 엄히 징계하고 철저히 바로잡지 않는다면 변방의 잔약한 역참들은 필시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야 말 것이다. 이에 미리 포고하는 것이니, 각자 조심하여 혹시라도 으레 내리는 효유로 간주하지 말고 다시는 분에 넘치는 못된 짓을 하지 말아서 조금이라도 실효가 있게 하라. 옛 버릇을 고치지 않다가 죄에 빠진다면 이는 너희 스스로 범한 것이니, 나를 원망하지 말라.’
윤기의 효유문은 당시 역참의 폐단과 문제점을 구체적으로 짚고 있다. 국가의 근간인 역참이 바로 세워져야 나라가 바로 선다는 제언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역참의 폐단을 질타하면서 개선을 촉구한 대목은 안쓰럽기까지 하다. 그러나 입바른 소리가 문제가 된 것인지, 윤기는 이듬해 업무 평정에서 ‘자질구레한 비방이 상당하다’는 이유로 1년 4개월 만에 파직된다. 나라가 망하려면 신하들의 직언이 들리지 않는 법이다.
황산역은 그 후 낙동강의 잦은 범람으로 역 기능을 수행하는 데 어려움이 많아 결국 1857년에 양산시 상북면 상삼리 일대로 옮겨가고, 1895년 역원제 폐지와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윤기의 입바른 타이름 같은 것이 먹혀들지 않은 것도 역참 폐쇄의 원인이었을 터다.
황산역 폐쇄는 길의 뜻이었을까…. 무정만리(無情萬里), 길의 뜻을 알 수 없다.
<이 원고는 부산문인협회 주관의 월간 ‘문학도시’ 1월호에도 게재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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