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샘과 금정산 주능선. 뒷쪽이 정상인 고당봉이고 왼쪽 아래에 범어사가 있다. 금어동천은 어디쯤 있을까? 출처: 부산시 문화관광 홈페이지
#금어동천을 찾아라
금어(金魚)! 비늘에서 금빛 광채가 뿜어졌다. 푸르고 싱싱한, 밝고 아름다운 한 마리의 금빛 물고기였다. 눈이 부셨다. 주변에 신선들이 노닐고 있다. 느긋하고 평화로운 표정들. 몸을 흔들자 짙푸른 금어가 푸드득 전신을 관통하고 지나간다. 온몸이 감전된 듯 쩌릿하다. 소름이 돋으려는 찰라 꿈이 깼다.
금어, 금어라…. 박 선달은 한층 명료해진 의식으로 방금 꿈에서 본 금어를 화두처럼 바라본다. 금어는 금정산의 상징이 아니던가. 금어가 사는 곳이 금정(金井, 금샘)이고, 금정에서 노는 물고기가 금어렸다. 문헌에는 범어사 옛길 언저리에 ‘금어동천(金魚洞天)’이 있다는 기록도 있다. 하다면, 풀리지 않을 것도 없다. 가 보자, 현장에 답이 있을 터. 걷는 것이라면 당장이라도 자신의 두 발이 네 발의 말이 되어 뛰고 싶은 박 선달이다.
어? 그런데 금어동천이 어디 있지?
금어동천은 세상의 공식 지도에는 나오지 않는다. 인터넷 블로그 같은 데서 간간이 비밀리에 소개가 되어 있곤 하지만 막상 찾으려면 난감해진다. 범어천, 즉 범어사 계곡 어디 어디에 숨어 있다고 하는데, 원효 대사쯤 되면 모를까, 단순한 지시만으론 도무지 찾아갈 수가 없다. 해운대 가서 모래알 세기요, 서울 가서 김서방 찾는 격이랄까. 하긴 금정산 범어천 계곡이 어디랍시고 한갓 바위인 금어동천을 찾아내겠는가.
금정산성 북문을 기점으로 금정산 물줄기는 크게 두 갈래로 흐른다. 하나는 범어천 계곡을 따라 범어사를 거쳐 온천천~수영강~부산 앞바다로 흐르는 물줄기다. 또 다른 하나는 서쪽으로 흐르는 천인데, 부산학생교육원 옆의 시시골을 끼고 대천천을 따라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금정산은 이처럼 부산 바다와 낙동강의 중요한 원천(源泉)을 이루는 산이다.
범어천 계곡에 금어동천을 꼭꼭 숨겨놓은 데엔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범어천은 옛날부터 물이 많고 물이 좋기로 소문이 나 있었고, 계곡 자체가 비경이라 범접할 수 없는 신비성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일제 강점기 때부터 수원지 보호구역으로 묶여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기도 했다.
이곳이 ‘범어사 문화체험 누리길’로 탄생한 것은 지난 2012년 6월 부산 금정구가 탐방로 조성사업을 벌이면서다. 옛날 수원지 보호구역 때 설치한 철조망을 걷어내고 데크 등을 설치하자 멋진 탐방로가 탄생했다. ‘범어사 문화체험 누리길’은 금정구 청룡동 친수공원에서 범어사까지 약 2.3km에 이른다. 범어천 계곡을 따라 이어지는 이 누리길은 골짜기의 기암괴석과 편백나무 군락지 등이 어우러진 천혜의 도시 산림을 자랑한다.
범어사 문화체험 누리길이 열렸으나 금어동천은 여전히 신비의 베일을 벗지 않았다. 범어천 계곡 속을 걷는 누리길과 금어동천을 지나는 범어사 옛길은 엄연히 다른 길이다. 범어사 옛길은 서기 678년 의상대사가 범어사를 창건하고부터 트인 길이라 할 수 있다. 일제 강점기 때 수원지 보호를 위해 만든 누리길과 1,300여년의 역사를 지닌 범어사 옛길은 사실 비교 자체가 무리다. 말하자면 국보급 옛 문화재와 근대의 풍물 하나를 놓고 비교하는 격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 두 길을 혼동하는 것은 그만큼 범어사를 잘 모른다는 말도 된다.
금어동천이 숨어 있는 이유야 금어동천만이 알겠지만, 짐작컨대 이런 저런 이유가 있었을 법하다. 금어(金魚)는 금정산을 상징하는 하늘 물고기, 동천(洞天)은 신선이 산다는 선경을 일컫는다. 신선사상이 면면히 이어져온 우리나라에는 곳곳에 동천이 자리했다. 경남에 홍류동천(합천), 화개동천(지리산), 운흥동천(울산), 자장동천(통도사)이 있고, 부산에도 범어사의 금어동천을 비롯하여 사상구 운수사의 청류동천(淸流洞天), 장전동의 백록동천(白鹿洞天), 동래 학소대의 도화동천(桃花洞天), 기장군 홍류동천(紅流洞天), 묘관음사의 조음동천(潮音洞天) 등이 있다. 저마다 금수강산의 비경 한자락씩을 품고 있었다. 중국 도교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동천에의 꿈은 우리 조상들의 의식세계가 선(仙, 禪)에 닿아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범어사가 오늘날 선찰대본산(禪刹大本山)이란 사격을 유지하는 것도 금어동천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속세에서는 문필가들이나 유배된 정치가들이 동천을 찾아 그들만의 세상을 가꾸기도 했다. 동천은 선계로의 여행지이자, 속세의 도피처였다.
금어동천 옛길 풍경. Ⓒ박창희
하지만 금어동천은 최근에야 그 존재가 알려졌고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있는 자리를 알지 못한다. ‘숨어 있어야 동천’이란 말이 있는데, 금어동천이 바로 그런 것 같았다. 박 선달의 생각도 다르지 않았다. 숨어 있어야 보존이 되고 가치가 높아지니, 숨어 있을 수밖에.
#금정산의 부산 정신
후훗, 짐작한 바가 있는 듯, 박 선달이 쓴웃음을 짓는다. 걷는 자가 누리는 달관의 웃음이랄까. 나침반과 도리도표(道里圖標)를 꺼낸 박 선달은 길을 파악한 듯 범어사 옛길 초입에 들어선다. 여기서부터 이름을 ‘금어동천 옛길’이라고 하자. 사람들은 그냥 편하게 범어사 옛길 또는 가마등길이라 부르는데, 그건 이 길의 진정한 뜻이 아닐 것이다. 찾아야할 것이 금어요 챙겨야 할 것이 동천이란 것을 알게 되면 더욱 그렇다.
금정구 청룡동 경동아파트 옆으로 난 돌계단 산길이 이른바 금어동천 옛길의 들머리다. 원래의 길은 금정구 부곡동 십휴정(十休亭) 기찰(譏察)에서 지금의 도시철도 1호선 범어사역 인근의 팔송정을 거쳐 경동아파트 쪽으로 올라온다. 그러나 세월이 바뀌고 도로가 변했음에랴. 오고 가지 않는 길이 없듯이, 그대로 머물러 있는 길도 없다.
그런데도 고마운 것은 경동아파트 초입에서 계명봉 산자락을 따라 난 금어동천 옛길만은 옛길 그대로다. 길 하나에 천년 이상의 시간이 고스란히 녹아 흐른다면 이건 보물급이다. 천여년 동안 쌓였을 스님들의 발걸음과 절을 드나든 민초들의 애환과 역정을 어찌 다 말로 다 하랴. 범어사의 개산조인 의상 대사가 다녀갔을 테고, 당대의 쌍벽인 원효 대사가 금정산 원효봉이나 원효 석대에서 선 수행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경허, 용성, 동산, 성철 스님 등 고승대덕들이 연연세세 범어사로 드나들며 도를 닦고 덕을 세웠을 것이다. 거기에 중생들은 불문에 기대어 염화시중의 미소를 배우며 번뇌의 바다를 건너갔을 테다. 풍류객들은 금어동천 바위 주변의 절경을 찾아 한 세월을 노래했을 것이고, 시인 묵객들은 금어동천에 천고에 남을 시문을 걸었을 테다.
국란을 당할 때 범어사는 먼저 떨쳐 일어나 싸웠다. 신라시대 왜구가 쳐들어 왔을 때 원효 대사는 지팡이로 신통력을 발휘했고, 임진왜란의 치욕을 겪고 전란 후 금정산성을 대대적으로 수축할 때는 승병들이 주축이 되었다. 일제 강점기, 범어사 학승과 학생들은 3·1운동의 선봉에서 억눌린 조국의 의기를 떨쳤다.
동래(부산) 정신이 금정산에서 발원한다는 말이 결코 흰소리가 아니다. 그 생생한 현장이 금어동천 옛길이니 어찌 중하다 아니하리오. 박 선달이 금어동천 옛길을 끔찍이 아끼고 챙기는 이유다. 1920년대 범어사 신작로가 나면서 금어동천 절경 일부가 사라지고, 1960년대 일주도로가 뚫리면서 다시 절경의 절반이 훼손되었지만, 바위의 각자(刻字)에 스민 기운이 쇠한 것은 아니다. 더 이상은 훼손을 허할 수 없다는 듯, 숲속에 고고하게 숨어 세상을 지켜보는 모습은 차라리 눈물겹다. 어쨌든 모진 개발의 세파속에 이 정도나마 당당히 버티고 있는 모습이 아름답고 장하다.
금어동천 바위와 정현덕 각자. Ⓒ박창희
금어동천에는 누가 다녀갔던가? 흥미롭게도 다녀간 이들의 이름이 금어동천 바위에 큼지막한 각자(刻字)로 새겨져 있다. 가로 3m, 세로 2m 크기의 바위 중간에 ‘금어동천’이라 음각하고 그 옆에 김철균(金撤均)이란 이름이 적혀 있다. 그 앞쪽 바위에는 정현덕(鄭顯德), 그 밑에 윤필은(尹弼殷), 건너편에는 김교헌(金敎獻)이란 이름이 보인다. 대부분 동래부사를 지내는 등 내로라는 부산의 유력자들이다. 시대와 세대를 달리하며 금어동천이 오래 전부터 지역의 명소로 회자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형식상으로 보면 김철균이 금어동천 각석을 새겼거나 새기게 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으나, 반드시 그렇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김철균은 부산 첨사를 지낸 인물. 첨사(僉使)는 첨절제사의 준말로, 수군절도사영 아래 3품의 무관이다. 19세기 중반 초량왜관 난출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 그의 행적이 드러나지만, 크게 두각을 나타낸 것 같지는 않다.
윤필은(1861~1903)은 조선말기 동래부윤을 지낸 인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재무차관을 지낸 독립운동가 윤현진(尹顯振) 열사의 부친이다. 윤필은은 1900년 5월 동래 부사로 부임하여 그해 8월에 퇴임하였다. 이때 동래 부민들이 그의 선정을 기리는 ‘윤필은 청덕선정비(尹弼殷淸德善政碑)’를 세웠는데, 그 비석이 동래구 수안동 동래부 동헌 내 정원에 있다.
김교헌(1867∼1923)은 독립운동가이자, 대종교 제2대 교주를 지낸 인물. 1898년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대중계몽운동을 하였고, 1906년 동래감리 겸 부산항재판소판사와 동래부사로 재직하였다. 이때 통감부의 비호 아래 자행된 일본인들의 경제 침략에 맞서서 이권운동을 도모하다가 일본측의 횡포로 일시 관계에서 추방되기도 하였다.
(계속)
<이 원고는 부산문인협회 주관의 월간 ‘문학도시’ 1월호에도 게재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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